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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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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나무에 뒤덮혀버린 문명의 미래
[인도차이나반도 기행⑥] 앙코르 톰·와트 유적과 '숲의 종교'
 
정미경
앙코르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은 보다 본질적이고 보다 근원적이며, 그리하여 가려지고 왜곡된 본성을 찾기 위한 갈망어린 하나의 노정입니다. 내게는 그랬어요. 보다 본질적이고 보다 근원적인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희구가 만들어낸 철학, 그 속내를 훑어보면 혼신을 다해 몸부림치는 우리들의 꺾을 수 없는 열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고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종교는 여기에 귀일하는 것이라고 볼 때,  철학과 종교는 변증법적 유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상호관계를 추적하는 것은 대단히 유의미한 이정표를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될 수 있지요. 


▲ 힌두의 소우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앙코르와트.     ©정미경

 자연으로부터 오는 공포는 두 가지 다른 사유방식과 행동양식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과 맞서 투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 대한 경외감과 숭배심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 두 가지 양상들이 혼재된 채로 자연 속에서 자연에 적응하면서 혹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 형태로 살아왔지요. 이른바, ‘소박한 유물론’의 시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종교가 만들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경험의 축적과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계급분화가 이루어지자, 사고와 행동의 분리가 일어남과 동시에 사유를 담당하는 계급에 의해 제정일치의 시대가 풍미하게 됩니다. 소위 신권정치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통치계급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정형화시키며, 또한 객관화시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 자신들을 올려놓아요.
 
▲ 몰락한 프놈바켕에서 본 해넘이.     ©정미경

 왕은 신, 또는 그 대리자로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화는 이것을 치장하는 부속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관념론의 시대’예요. 철학은 종교를 설명하는 언어이며, 종교는 통치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됩니다. 동시에 이 시대는 이러한 현상에 반역하는 고등종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결국 정치와의 결탁으로 돌아서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권력의 휘장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 그것을 종교가 도맡아하는 것이지요. 통치계급의 염원에 의해 이원론은 체계적으로 고정됩니다. 이른바, 종교의 도그마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저들은 왕권의 영속성을 여기로부터 보장받고, 자신들의 영화를 끝없이 이어가려는 욕망으로 현세와 내세,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고 대립시키며 천상의 환락을 꿈꾸어갑니다.

그렇게 하여 나타난 미래는 왕권의 완전한 제패, 권력의 확장된 데칼코마니로 그려냅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미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영성을 잃는 대신, 맹목화로 치달아가는 것이에요. 결국 종교는 신화와 전설로 미화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살벌한 전쟁이 일어나고 승자의 권위는 종교적으로 담보됩니다.
 

▲ 앙크르와트의 비슈누.     © 정미경

이 독단의 광풍 속에서도 명민한 이성은 스러지지 않았어요. 명맥이나 유지하며 겨우 꿈틀거리던 철학은 각처에서 사색과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주조된 신들을 조롱하며 허구를 샅샅이 까밝혀나갔지요. 그들에게 있어 화제는 어느 하나로 귀착되지 않았습니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와 과학, 문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탐구의 목록에 올려놓고,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토론과 검증 그리고 실증을 통해 정초를 하나씩 세워나갔습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지요. 물론 종교와 직접 부딪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문예부흥운동으로 돌파구를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다 대중적이고 보다 유연한 방법으로 말이에요. 그렇다고 본질을 비껴가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정면에서 이것을 다루었습니다. 교황을 지옥에서 고통받는 지위로 떨어뜨리는 재치는 바로 이들의 방법이었어요. 이 문을 열고 인본주의가 등장한 것입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종교에 대항하는 과학으로 우뚝 선 것이지요.
 

▲ 앙코르와트의 춤추는 압사라들.     ©정미경

모호함과 섞갈리는 잡설 속에서 과학은 명료함을 획득해갑니다. ‘헤겔’의 관념론과 ‘포이에르 바하’의 유물론을 재정립하여 세상에 나온 ‘마르크스 올로지’, 이것은 소박한 유물론이 관념론의 시대를 거쳐, 보다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 ‘과학적 유물론’의 정수입니다. 이로부터 혁명의 시대가 도래 합니다. 신전은 허물어지고 사찰은 폐쇄되며 교회는 박물관으로 뒤바뀌어버립니다. 반종교 투쟁이야말로 혁명의 ABC 라고 선동하기 시작합니다. 
 
 소비에트 권력이 세워지고, 코민테른이라는 망 속으로 속속 몰리면서 이른바 산업문명은 지구촌을 휩쓸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상호침투하면서 이 산업문명으로 수렴되는 것이지요. 효율성은 기능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편해버립니다. 인간성은 사라지고 가치는 그것이 이윤을 낳을 때만이 인정을 받습니다. 공리주의가 판을 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굳어집니다. 이 패권의 시대에 무모한 이상주의는 제 풀에 꺾여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기능주의가 만연하지요. 인본주의는 껍데기인 채, 시장만능주의라는 괴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모든 경향을 근본에서부터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도그마가 화제에 오르고, 상식 또한 철저하게 해부되지요. 권위는 끌어내려지고 국가 또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심지어는 이성조차 수술대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감성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입니다. 조악한 인문학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지난 시기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부정 그리고 새로운 사유관점이 이쪽저쪽에서 제기됩니다. 

 
▲ 눈에 띄게 붕게되고 있는 앙코르와트 중앙사원.     ©정미경
 

▲ 앙코르와트 북쪽 회랑.     ©정미경

분업과 전문화 대신, 융합과 통합으로 그리고 모듈공법으로 가는 길이 모색되기 시작합니다. ‘비트’ 대신 ‘아톰’이 화두로 나서는가 하면, ‘아날로그’를 대신하여 ‘디지털’이 그 자리를 메우기도 합니다. 탐구는 일정한 방향으로 모아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개성이 각광을 받는 방향으로 진행되지요. 구심은 사라지고 모두가 중심으로 자처합니다.

이제 철학과 종교는 박제화된 유물로 될 뿐입니다. 학제간 대화가 시작되면서 모든 대립항은 역동적인 차이로 평가받으며 화해의 길로 들어  섭니다. 인간은 주체이고 자연은 객체라고 하는 불문율마저 전면적으로 해체됨과 동시에 새로운 관계로 융합됩니다. 객관적 실재로 존재한다는 자연은 객체에서 영혼을 가진 실재로, 인간과 생물은 내밀성을 가진 친족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과학마저 영성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바야흐로 ‘인문학적 생태론’으로 종합되어 가고 있는 시대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 앙코르와트 북쪽회랑의 부조.     ©정미경

여기서 앙코르 전통 속에 살아있는 베다문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앙코르 전통 속에 살아있는 베다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문화의 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어요.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종교는 베다적 전통과 토라적 전통의 양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토라, 즉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하여 유대교가 성립하고, 그것을 발전시킨 그리스도교는 가톨릭이라는 이름으로 계승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랍의 전통과 맞물리는 이슬람교가 파생하였으며, 교황을 반대하는 봉건영주들의 지원을 받아 프로테스탄트가 생겨났습니다. 희랍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 등은 정치적 혹은 왕권과 관련하여 갈라진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분파입니다. 
 

▲ 춤추는 시바.     © 정미경

여기서 유대교는 탈무드를 발전시켜왔으며,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주의와 손을 잡고 서방의 지배문화로 자리를 잡았지요. 하지만, 부족 종교인 유대교를 계승하고 혁신하였다는 그리스도교의 원천은 자이나교에 있습니다. 핵심교리를 자이나교에서 차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이나교는 베다적 전통과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갈래이지요.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종교적 전통은 베다적 전통이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토라적 전통의 절대가치가 이원론에 있다면 베다적 전통의 절대가치는 일원론에 있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라적 전통에 선 종교적 가치의 핵심은 초월적인 신과, 일상과 분리된 종교문화를 가지는데 있습니다. 반면에 베다적 전통에 잇닿아있는 종교적 가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철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어요. 
 

▲ 가루다.     ©정미경

베다의 우주관은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우주는 생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을 반복하는 순환체(循環體)라는 것이에요. 이것도 마치 계절이 바뀌듯 우주의 시간도 바뀌어 결국에는 낡은 우주가 소멸되고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토라적 전통에서 말하는 천지창조 설화와는 근본에서부터 맥을 달리합니다. 그리고 토라적 전통에서 말하는 천지는 지구에 국한될 뿐이지요. ‘브라흐마’신이 우주를 생성하고 ‘비슈누’신이 그것을 유지․ 발전시키며 ‘시바’신이 소멸시킨다는 베다적 우주관에서 신이란 자연의 인격화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다신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베다적 전통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브라흐마와 비슈누 및 시바신을 필두로 하여 이 최고신이 제한적으로 구현된  ‘가네사’와 ‘쿠마라’신들이 그 하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바로 아래로는 우주론적 계획에 실제적으로 힘을 행사 한다는 ‘인드라’ ‘바루나’ ‘이그니’와 같은 그룹이 있어요. 그 외에도 신격화된 자연신으로 수많은 마을 수호신들과 반신반인(半神半人)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마다 저마다의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 연꽃을 든 에라완 신상.     ©정미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란 실체도 없고, 표현이 불가능하며, 명시되지 않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브라흐마와 비슈누, 시바는 우주원리의 3가지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비슈누 신을 예로 든다면 고대부터 있었던 많은 신들을 자신의 분신으로 영입하여 성장하여온 복합신이라는 것이에요. 브라흐만 자체를 속성이 없는 비 인격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다적 전통은 브라흐마․비슈누․시바를 단일한 실재의 세 측면, 즉 삼신일체로 파악하고 있어요.

토라적 전통에 입각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삼위일체’도 여기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삼신일체는 내재자임과 동시에 초월자이기도 합니다. 범아(梵我)와 무아(無我)라는 차이가 내부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결국 범천(梵天)이라는 범주로 통합되기도 하구요. 
 

▲ 링가.     ©정미경

 따라서 베다적 전통의 우주관, 혹은 신관은 우주의 역동적인 생태순환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베다적 세계관의 핵이라고 부르는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과, 제한불이론(制限不二論), 다원론적실재론(多元論的實在論) 및 불일불이설(不一不異說)은 현대의 첨단물리학과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되어있는 사변 체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존재론과 수행론은 베다철학의 정수가 그대로 녹아있어요. 성스러운 질서와의 우호적 관계를 중시하고, 모든 생명의 존재론적 단일성에 입각하여 근원적인 실재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존재론 말이에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윤회로부터의 해방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유체계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  탄트라.   ©선재
이 단일성을 구현하려는 비의적 열망이 만들어낸 철학의 일상화와 일상의 철학화는 참으로 신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신성을 찾기 위한 ‘탄트라’, 그것은 초월적인 신을 인간 내부에서 찾으려는, 육체에 대한 재평가입니다. 육체를 신이 거주하는 사원 또는 해탈을 위한 도구로 간주하며 감각적 향수와 자연적 기능 및 성향을 통해 영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대우주와 소우주, 즉 세계와 인간은 본래 하나라는 데로부터 자기 속에 내재하는 ‘샤크티’ 즉 여성적 요소를 ‘쉬바’ 즉 남성적 요소와 결합시켜 윤회를 멈추게 하고, 본연의 상태인 브라흐만으로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링가와 요니의 교합을 지고의 가치로 판단하는 거기에 인간성은 신성과 하나로 겹친다는 것이에요. 인간을 영과 육으로 나누고 육을 배척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토라적 전통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탄트라 수행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만트라’입니다. 주의력을 집중해서 내적인 고요상태를 만들고 지구 내부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오는듯한, 또는 소리치는 천둥처럼 창공의 보이지 않는 깊은 곳으로 부터 오는듯한 낮게 떨리는 소리들은 진정 모든 생물의 근원인 우주의 창조적인 떨림을 상징하고도 남습니다. 공명과 리듬편승,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여울은 갈라진 경계와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며, 일치되는 순간, 경계마저 사라짐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 ‘만다라’이지요. 우주의 응집체인 인간 즉, 소우주는 신들이 거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고, 우주의 힘이 응집되는 장소라고 알려진 만다라에 들어가 그 중심을 향하여 나아갈 때, 비로소 흩어졌다가 다시 결합하는 우주의 전 과정으로 합류된다는 것입니다.
 

▲ 옴(aum)     ©선재

결국, 고도의 형이상학적인 그래서 복잡 미묘한 수트라를 보충하고 보완하는 탄트라 수행과 합일과 융합을 위한 만트라 수행, 그리고 대상 속에 함몰하여 주체를 자각하는 만다라 수행은 비의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체현하는 일상으로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몰아적 헌신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아슈마라’는 일생을 통해 현세성과 초탈성의 리듬을 하나로 용해하는 생활주기로서 자리를 잡았어요. 학생기(學生期)와 가주기(家住期), 임주기(林住期) 그리고 유행기(遊行期)의 4단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베다철학이 그것을 도식화시키거나 객관화시키지는 않아요. 특정한 교조나 교리, 중앙집권적 권위나 위계조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것들이 발붙일 틈이 없어요.
 

▲ 만다라     ©선재

 철학과 종교는 객관이 아니라 주관입니다! 토라적 전통에서 있는 학파나 교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도리어 서로 상충하는 관점과 교설을 조화시키고 통일시키며 상호침투와 혼합을 통해 다른 이설들을 녹여내기 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다종다양한 철학과 종교에 대한 관용정책은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어요. 토라적 전통이 데칼코마니라면 베다적 전통은 ‘꼴라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종교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시장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의 늪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종교가 지배이데올로기화 되어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요. 베다적 전통에 서 있는 힌두교와 불교 또한 결코 예외 일수가 없어요. 
 
▲ 사원을 감싸고 있는 나무.     ©정미경

앙코르 유적군에 남아있는 톰과 와트는 이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적군에 남아있는 톰과 와트의 공간적 배치는 힌두교의 소우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형태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정한 별자리를 대칭적으로 배치한 형태와 구조는 저들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잉카문명의 유적지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조의 부계를 태양왕조에 속한다고 하고, 모계를 달의 왕조에 속해있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정말이지 왕권신수설을 그대로 빼어 닮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만다라 문양을 닮았어요. 자신들을 통해서만이 지고의 가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왕이야말로 살아있는 현신이며, 궁전이야 말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시위하는 것에 다름 아니잖아요! 힌두제국의 신권정치를 위한 강력한 물적 기반이 바로 톰과 와트라는 것입니다. 강력한 왕권과 신성한 위엄을 보여주어 백성들의 충성심을 자신들에게로 집중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건축물이라는 것이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권력은 벼농사에서 나왔고 또한 벼농사는 물이 필요합니다. 
 
▲ 거대한 사원의 성벽을 감싼 나무들.     © 정미경


 그래서 그들은 대규모의 저수지와 운하를 파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군주가 불가결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현대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불가사의한 대규모의 공사를 강행한 것이지요.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도 장엄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궁전과 사원건축을 강행한 것은 저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처에 널려있는 붉은 흙과 나무 그리고 석고보다는, 멀리서 운반해 와야 하는 육중한 돌을 사용하여, 거대한 톰과 와트를 건설한 것을 보아도 경제적 이유보다는 신성제국을 건설하려는 의도가 우선시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크메르의 왕들은 지상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었지요. 돌은 영원불멸을 상징하며, 현세적 부귀영화를 영속화 시키려는 저들의 의도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건축자재입니다. 
 


▲ 무너져가는 사원의 비단목화나무.     © 정미경

 밀림을 헤쳐 길을 닦고, 돌산에서 채굴한 돌을 옮긴다는 것을 상상해 보셔요.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내력과 어쩌면 그렇게도 빼어 닮았는지…. 경쟁적으로 석상을 만들어 세운 남태평양 이스턴 섬의 그것과도 빼어 닮았습니다.

채굴과 운반 그리고 그것을 쌓고 조각을 하는 대규모의 토목사업과 건축공정은 온 나라의 인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대를 이어가면서 말이지요.

신성제국을 건설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에 안주할 수 있었던 브라만 가문의 권세와 부가 한눈에 그려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브라흐만의 특수한 현현이라고 떠벌여지는 브라만 계급이야말로 가장 악질적인 착취계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이 세운 앙코르톰, 난공불락의 영원한 도시라고 말하는 거대한 성벽도시는 그것 자체가 왕궁이자 사원이며 영묘입니다. 장엄하고 웅장하며 또한 우아하고 섬세한 곡선으로 치장한 석조예술의 꽃이지요. 
 
▲ 밀림 속에 건설한 신성제국.     © 정미경

한편, 이 정사각형의 성곽도시 전체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거대한 해자에 의해 바깥세계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카스트 제도가 공간적으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예술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어요. 예술혼 속에 깃든 죽음과 같은 노역, 착취와 압박, 체념으로 밖에는 달리할 수 없는 신분차별, 그 숙명 속에  흩뿌리고 절여진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그것은 예술이 아닙니다. 와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힌두의 브라만 계급과 불교의 승려계급에 의해 권력이 바뀌면서 나타난 조각과 부조작품들은 그 또한 얼마나 음습한 냄새를 풍겼을까.

영원한 도성 같았지만 결국 타이족에 의해 멸망하고 밀림 속으로 사라져 방치되었던 지난날의 허망함을 앙코르톰과 앙코르와트는 다만 침묵으로 서 있을 뿐입니다.
 

▲ 폐허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앙코르 유적군, 바이욘 사원.     ©정미경

말 그대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예요!

자이언트 팜나무에 뒤덮인 앙코르 유적군은 그렇게 저물어 갑니다. 저들의 왕권도, 저들의 신들도, 저들의 예술도 그렇게 저물어 갑니다. 권력은 언제나 종교를 자신의 후광(後光), 혹은 광배(光背)로 치장하지만 발 딛고 있는 좌대(座臺)는 변함없이 서민대중일 뿐. 권력은 한결 같이 신이 되고픈 욕망으로 그것을 악용하지만, 서민들에게 있어 종교는 변함없는 애절한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계급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철학이 화석화되면 종교가 되고,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면 그토록 바라는 지고의 가치마저 도그마로 전락 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다적 전통에 선 종교를 숲의 종교라고 한다면, 토라적 전통에 선 종교는 사막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숲의 종교가 다신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사막의 종교는 일신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요. 이것이야 말로 종교적 특징은 자연적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사례입니다. 숲의 종교가 관용적이라면 사막의 종교는 배타적입니다.
 
▲ 클렌산에서 운반해온 사암으로 부조 장식한 여신.     © 정미경

그렇다고 사막의 종교가 마냥 건조하고 척박하기만 할까. 그렇지는 않아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베어있으며 무엇보다도 ‘에덴동산’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사막의 종교, 그 속살 속에 아로새겨진 각인된 본능입니다. 원죄보다도 더 질긴 향수와 지워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물론 이 양대 종교의 전통 안에서 깊이 있는 영성을 발견하는 것이 그리 큰 어려움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주류에 속할 뿐입니다. 교조와 교리 및 의례에 대해서 냉소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영성에 도달한 대부분의 ‘구루’와 ‘성자’는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 앙코르와트의 일출.     ©정미경

 그러므로 그러한 종교에는 영성이 없다고 할 수 있지요. 극단의 끝에 가서 발견한 자성과 혜안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속적인 영성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될 뿐이지요. 그렇다면 교조도 없고 교리도 없으며, 의례가 없는 영성을 우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홀로 있음과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것’ 그리하여 모든 존재에 흐르는 숨을 느낄 수 있고 그 영혼과 교감 할 수 있는 열려진 영성, 모든 생명을 에워싼 위대한 신비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과 대지를 사랑하는데 삶의 근본을 두는 여름날 저녁나절의 서늘한 바람과 같은 영성은 과연 무엇일까. 고단한 생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며 후회와 보람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밤에 날아다니는 불나방의 번쩍임 같은 것. 
    한겨울에 들소가 내쉬는 숨결 같은 것. 
    풀밭 위를 가로질러 달려가 저녁노을 속에 사라져 버리는 
    작은 그림자 같은 것.’


이라고 나직이 속삭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견고하기가 영원할 것 같은 돌 위로 뿌리를 내리는 크메르의 톰과 와트의 스펑나무는 우리에게 생태적 영성이 무엇인지를 침묵으로 보여줍니다. 
 

▲ 앙코르의 밀림.     ©정미경

 숲과 강 그리고 바다에서 별을 우러르며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했던 꿈꾸는 인디언들은 어쩌면 우리 안에 깊이 잠겨있는 그리움의 화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 대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물을 가져다주는 강과 시내에게,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필요한 약품을 공급해주는 약초들에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옥수수와 그 누이동생들인 콩과 호박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열매를 제공해 주는 덤불숲과 나무들에게, 
  대기를 움직여 병균들을 내쫓아 주는 바람에게, 
  태양이 물러갔을 때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는 달과 별에게, 
  귀신과 뱀들로부터 손자들을 보호해 주고 우리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우리의 할아버지 구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인정 많은 눈길로 대지를 내려다보는 태양에게 무엇보다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정령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의 품안에서 모든 선함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이로쿼이족 기도문>


▲ 앙코르 유적을 둘러본 것은 가려지고 왜곡된 본성을 찾기 위한 갈망어린 하나의 노정...     © 정미경

폐허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앙코르 유적군과 사라져간 인디언의 낮은 목소리가 버림받은 고아의 신세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려주는 오늘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숲은 자라고 있으며 강 또한 흐르고 있어요. 출렁이는 바다와 함께 밤바다에 내리는 별이 있기에 우리 모두는 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 할 수가 없습니다!

 
기사입력: 2008/02/13 [11:34]  최종편집: ⓒ 인터넷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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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님은 생태숲 해설가입니다. 환경단체인 풀빛문화연대의 기획위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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