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명의 눈동자(44-1) "화야, 너는 내 가주야"제44장 여명의 눈동자(2)-1
<지난 글에 이어서> Kyrie, kyrie,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christe, eleision kyrie, elei, kyrie,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가라고루성에서 금지된 이 노래에는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데가 있었다. 마치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려 하는 것 같은 이 노래를 자신처럼 극한의 공포에 내몰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생각하며 서란은 앞에 놓인 과자를 집어먹었다. 과자는 유흔이 객잔 주인에게 특별히 부탁해 사온 부용고였다.
“그러고 보니 유흔.”
서란은 유흔을 불렀다. 서란의 옆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던 유흔이 서란을 돌아보았다.
“다루설리도 이 노래를 좋아했을까?”
“응?”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다루설리도 이 노래를 좋아했을까 하는 그런 생각.”
물론, 지금의 서란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유흔이 곁에 있는 이상 서란은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유흔을 만나기 전의 서란은 항상 두려움 속에 살았고, 그 두려움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지금까지도 서란을 괴롭히고 있었다.
“나 이 노래 처음 들은 게 다섯 살 때잖아. 유흔이 해독제를 먹고 깨어난 내 옆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Kyrie, Kyrie, Kyrie, eleision…….”
“…….”
“나 그 노래 처음 듣고 운 거 기억해? 나는 그때 그 노래를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어. 마치 나더러 괜찮다고, 이제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거든.”
“…….”
“그만큼 무서웠으니까. 나는 살고 싶은데 내 어머니라는 사람은 내게 독을 먹였잖아.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아직 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 그게 너무 무서웠어.”
“…….”
“다루설리도 그렇지 않았을까. 나처럼 보호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을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살면서 많이 무섭지 않았을까.”
“화야.”
유흔은 서란의 어깨를 잡아당겨 꼭 끌어안아주었다. 서란의 여린 어깨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유흔은 서란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Kyrie, Kyrie,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christe, eleision Kyrie, elei, kyrie,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Kyrie, eleision
“좀 자.”
유흔은 서란을 침상으로 데려가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직 방계 인물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었고, 그동안에는 서란이 조금이라도 심신의 안정을 되찾도록 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그러니까 좀 자.”
유흔은 서란의 어깨를 토닥이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금세 잠이 드는 서란을 보다 말고 유흔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가톨릭을 처음 접하게 해준 것도 다름 아닌 ‘그’였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개뿔.”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성경에 나오는 한 구절을 중얼거렸다. 가톨릭의 신인 야훼가 세상을 처음 창조하고 자신이 만든 세상을 둘러보며 한 말이라 했던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야훼라는 그 새끼도 참으로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며 유흔은 서란의 옆에 함께 누워 한 팔로 서란을 꼭 끌어안았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유흔은 저녁의 어둠이 길거리에 어둑어둑하게 깔리는 것을 느끼고 퍼뜩 눈을 떴다. 언제부터 와있던 것인지 비화가 방 한구석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그래, 일어났다.”
“팔자 한 번 늘어지셨네. 낮잠이나 주무시고.”
“지금 비꼬는 거냐?”
“그럴 리가.”
“낮잠을 조금 잔 것이 내가 너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만큼 잘못한 일이었던가?”
“거 참. 비꼬는 게 아니래도 그러네.”
“…….”
“당신도 알잖아. 내 말버릇 원래 이런 거.”
유흔은 그런 비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떤 계기로 서란의 시위장이 되었든 그녀는 지금 서란의 시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서란에게도, 서란을 보호하고 있고 서란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자신에게도 말을 놓고 불손하게 대하는 것을 남들이 본다면 군신 간의 질서가 무너졌다며 개탄하겠지만 유흔은 오히려 비화의 그러한 거리낌 없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지?”
“얼마 안 되었다. 조금 전부터.”
“조금 전부터라. 왜? 무슨 일 있어?”
“쯧쯧쯧. 나더러 방계 인물들을 불러 모아오라 해놓고서.”
“그랬지. 설마 방계 인물들이 벌써 도착했나?”
“아니. 조금 있으면 당신과 서란이 말한 그 요리점으로 모일 거야. 설마하니 이제 자기가 어디로 모이라고 했는지도 헷갈리는 건가?”
“그럴 리가.”
“그러면 준비하고 나와. 서란도 깨우고.”
비화가 나가고 유흔은 서란을 깨워 준비시켰다. 낮잠을 자느라 부스스해진 얼굴을 다시 세수한 서란은 구겨진 옷을 벗고 유흔이 선물한 조하금으로 만든 진한 청색 포로 갈아입었다. 서란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잠시 주저하던 유흔은 적연이 선물한 비녀를 집어 들었다. 서란이 입은 옷에는 이 비녀가 잘 어울리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옷에는 이 비녀가 잘 어울리네.”
“…….”
“그 친구가 안목이 좋은가봐.”
유흔은 애써 웃으며 서란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그 친구가 남자라는 것에서, 그리고 서란이 그 친구에 대해 별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에서 유흔은 이미 그와 서란의 관계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서란은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었고, 그러니 자신은 그를 질투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아야!”
유흔이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서란이 비명을 질렀다. 실수로 서란의 머리를 빗으로 아프게 잡아당긴 것인지 서란이 유흔을 곱게 흘겨보았다.
“미안해, 화야.”
“…….”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그랬어. 미안해.”
“…….”
“많이 아파?”
“흠…….”
서란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유흔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유흔을 바라보던 서란이 이윽고 손을 뻗어 빗을 든 유흔의 손을 잡아왔다.
“많이 아파.”
“화야?”
“그러니까 나중에 푸딩이라는 걸 사줘.”
“푸딩? 서양인거리에서 파는 찐 과자 말이지?”
“응. 맞아.”
유흔은 빗을 내려놓고 서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한씨가의 제2후계라 하나 서란도 그저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란은 어디까지나 한씨가의 제2후계였고,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야.”
“응?”
“너는 내 가주야.”
“유흔?”
“그러니까 나는 네가 자여 따위에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그 누구도 내게서 나의 가주를 앗아갈 수 없어. 그러니 나는 반드시 너를 가주로 만들 거야.”
“유흔.” <다음 글로 이어짐>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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