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차를 마치 술처럼 들이키는군.”
비화가 국그릇의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서란은 비화를 바라보았다. 음식을 통 먹지 못하는 자신을 배려한 것인지 비화 몫의 요리는 절반가량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미안하군.”
“아냐. 괜찮아.”
"......."
“그러고 보니 따지고 보면 정인이든 그냥 유흔이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 어느 쪽이든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유흔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안 그래?”
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중꾼이 비화 몫의 요리를 내가고 차가운 말차를 가져와 비화의 앞에 내려놓았다.
“어찌 되었든 벌써부터 그렇게 그리워하면서 나중에 이보다 더 오래 떨어져 지낼 일이 있으면 그때는 어찌 하려고.”
“…….”
“게다가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지게 된다잖아. 명색이 한씨가의 후계께서 부군에게 지고 사실 생각이야?”
“유흔은 아직까지 나를 이겨본 적이 없어.”
“글쎄, 그것은 아직까지 그대가 유흔과 크게 싸울 일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유흔은 한씨가의 37대 제4후계였어.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잘 아는 유흔이 굳이 여성인 나를 이기려 들 리가 없잖아.”
“잊고 있었나본데 유흔은 본래 삼백족 출신이야. 아무리 제화족이 되었다 하나 태생이 삼백족 남자인 이상 언젠가는 여자인 그대를 이기려 들 거야. 그때를 생각해서라도 지금부터 유흔을 조금만 덜 그리워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서란은 그동안 유흔의 출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서란에게 유흔은 그저 유흔이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비화에게 유흔의 출신에 대해 들으니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서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유흔은 한씨가의 제37대 제4후계였어. 그러니 유흔이 삼백족이었든 제화족이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 유흔은 그냥 유흔이야. 그러니 그대도 그걸 명심해줬으면 좋겠어.”
비화의 말을 일축하며 서란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 모두의 음식값을 계산하고 객잔으로 돌아와 누웠다. 아무리 제화족이 되었다 하나 유흔의 태생은 삼백족 남자라던 비화의 말이 떠올라 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흔…….”
그러나 서란은 곧 고개를 저으며 밀려드는 상념들을 털어냈다. 유흔이 삼백족이었든 제화족이었든 무엇이 중요한가. 유흔은 그냥 유흔일 뿐인데. 서란은 유흔에게 들려준 학과 인간의 사랑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가루눈이 산등성이를 하얗게 물들이는 쇠락한 마을의 낡은 집에서 두 사람이 몸을 맞대는 겨울밤 “만났던 날도 눈이 내렸었지” 당신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어요 화롯불에 달아오른 얼굴을 커다란 소매의 그림자에 숨겼지요
봄이 찾아오고 봄기운을 기뻐하며 지저귀는 새들과 노래하면 “예쁜 목소리네”라고 당신은 말해주었어요 그저 그것이, 그 말이 기뻐서 “언젠가 예쁜 목소리가 아니게 되더라도 사랑해주시렵니까?“ “당연하지”라며 상냥하게 웃고는 살짝 커다란 손이 뺨을 어루만져주었어요
푸른 잎이 빛나는 여름날 오후 당신이 병으로 쓰러졌어요 가난한 부부살림으로는 당신을 낫게 할 약은 살 수 없어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저 한결같이 베를 짜요 덧없는 단풍잎처럼 당신의 숨이 지게 할 수는 없어요
계절은 흘러가서 여름의 끝을 알리는 방울벌레가 잉, 하고 울어요 “예쁜 손가락이네”라며 상처투성이인 손을 잡은 그 손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언젠가 예쁜 손가락이 아니게 되더라도 사랑해주시렵니까?”
그러나 서란은 다음 구절을 잇지 못했다. 가을이 지나고 남자의 약을 살 돈을 마련했지만 학의 생명력이 담긴 날개를 잃은 여자는 서서히 죽어가고, 그녀는 남자에게 사실을 밝혀야 함을 알았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제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도 저를 사랑해주시렵니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지.”
한참이 지나서야 서란은 마치 유흔이 앞에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유흔이 삼백족이었든 제화족이었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유흔은 그냥 유흔인데. 자신이 유흔을 사랑하고 유흔이 자신을 사랑하는데. 그런데 무엇이 더 필요한가. 서란은 말을 이었다.
“유흔, 나는 독을 마시고도 숨을 놓지 못하던 나를 바라보던 그날의 유흔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게는 그걸로 충분해. 유흔이 삼백족이었든 제화족이었든 그런 건 상관없어.”
말을 마치며 서란은 마치 유흔이 곁에 있는 것처럼 침상에 누워 옆의 허공을 끌어안았다. 하루라도 빨리 유흔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서란은 눈을 감았다.
※
다음날 아침, 서란은 백연의 시종들에게서 신씨가 저택으로 와달라는 기별과 함께 등판에 신씨가의 문장인 눈꽃이 새겨진 진한 청색 포를 받았다. 신씨가에서 문장이 새겨진 옷을 하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을 알리는 뜻이라는 말에 서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갈아입었다. 신씨가의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으려니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해 서란은 자꾸만 등 뒤로 손을 뻗어 금실로 수가 놓인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부군마님께서 하사하신 것들입니다. 그 옷에는 이 장신구들이 어울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서란은 시종이 건넨 칠기함을 열었다. 함에는 여러 개의 금속판들이 동그란 원 주위에 매달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하는 장식을 단 금비녀와 뒤꽂이 여러 개와 금으로 만든 머리빗이 들어 있었다. 서란은 머리를 여러 번 땋아 올려 백연이 보내준 비녀와 뒤꽂이, 머리빗을 꽂았다.
“이제 가시지요.”
서란은 객잔 밖에 세워져 있던 신씨가의 문장이 새겨진 가마를 타고 신씨가 저택의 문을 들어섰다. 가마에서 내려 가주의 집무실로 안내된 서란은 신씨가의 구성원들 앞에서 다희에게 예를 올렸다.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한서란이 신씨가의 가주님께 문후 올립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강녕이랄 것이 있겠소. 천하가 강녕하지 못한데 천하의 사람들이 그 어찌 강녕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보내드린 옷이 잘 어울리는 것 같소.”
서란은 고개를 들어 다희를 바라보았다. 표정이랄 것이 없는 다희의 얼굴에서 서란은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한 대 피우시겠소?”
다희가 앞에 있는 도자기통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곧 뒤에 서있던 시녀 하나가 다가와 무언가를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넸다. 서란은 그것이 곰방대임을 알아보았다. 또다른 시녀가 다가와 곰방대에 연초를 재고 불을 붙였다. 다희가 곰방대를 한 번 빨고 연기를 후, 하고 뱉은 다음 시녀들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눈짓을 받은 시녀들이 서란에게도 연초를 재고 불을 붙인 곰방대를 가져다주었다.
“연초라는 것이 말이오, 혼자 피워서는 도통 그 맛을 모르겠더이다. 하지만 내 남편은 연초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대와 함께 피워볼까 하여. 서란 그대는 연초를 피워본 적이 있소?”
“없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한 번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소. 이렇게 한 번 입으로 빨고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다음 후, 하고 연기를 뱉어내면 되는 것이오.”
서란은 다희가 알려주는 대로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러나 곧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역한 느낌에 켁켁 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치 사레가 들린 듯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다희는 그런 서란의 모습을 보고도 괜찮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란이 가장 원하는 말을 할 뿐.
“신씨가의 가주인 나 신다희는 한씨가와 김씨가와의 동맹에 응하는 바다. 그리고 내가 동맹에 응한다는 것은 곧 여기 모여 있는 신씨가 구성원 전체가 동맹에 응한다는 뜻. 그러니 이번 동맹의 제안자이기도 한 그대,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한서란이여, 나는 그대에게 우리 신씨가의 사절이 되어 나와 우리 신씨가의 뜻을 한씨가의 가주께 전하고, 이번 동맹이 무사히 성사되게 하기 위해 성심의 노력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시종 하나가 서안 위에 받친 사절의 인수와 임명장을 서란의 앞에 건네주었다. 시종이 건네는 사절의 인수와 임명장을 받으며 서란은 다희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정옥을 설득해 반드시 이 동맹을 성사시켜 자신과 유흔이 전장에 설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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