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2-1) "살아남아라"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2/17 [10:08]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2-1) "살아남아라"

이슬비 | 입력 : 2020/02/17 [10:08]

<지난 글에 이어서>

그날 새벽, 유란은 유흔에게 아무런 확답을 주지 않았다. 삼백족과 키야트 아이누의 풍습대로 유흔은 그날 새벽 내내 유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란은 끝내 확답을 주지 않았고, 유흔은 그대로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는 너무 나이가 많아.”

 

가문의 이익에 따라 갓난아기가 40이 넘은 사람과 혼인하기도 하는 것이 지금의 부상국이다. 하나, 나는 나의 이익이 아니라 서란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데려가려는 것이다.”

 

또 오라버니는 내게 있어 그렇게 사윗감으로 매력적인 존재는 아니야.”

 

하면, 너는 서란이 공가의 자제와 혼인하기를 바라는 것이냐? 아서라. 공가의 자제가 서란 같은 무가 방계, 그것도 한씨가 방계의 여식과 혼인하려 들 리는 없지 않느냐.”

 

무엇보다 서란은 아직 후계혈전을 치르지 않았어.”

 

너는 서란이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보는 것이냐.”

 

솔직히 말하면 그래. 비록 내가 서란의 친어미로서 그녀의 지지자가 되기로 한 것은 맞지만, 나는 그저 오라버니가 내 역할이 필요하다 알려줘서 그렇게 한 것뿐이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아침이 오기를 함께 기다렸다. 그동안 서너 개의 찻잔이 비워지고, 한 개의 찻주전자가 동이 났으며, 시녀들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들어와 빈 과자접시들을 내갔다.

 

나는 저것들을 잘 알아. 저것들은 작은 마구니와 다름없어. 앞에서는 주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비굴한 웃음을 띠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지. 주인의 욕을 하고, 주인을 비웃고, 심지어 주인을 고변하기까지 해.”

 

…….”

 

그러나 저것들보다 더 못 믿을 것들은 바로 노예계집들이야. 어떻게든 시녀의 자리에 오르려고 서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것들. 정말 지긋지긋해.”

 

의외로구나.”

 

 

무엇이?”

 

키야트 아이누의 여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인 한씨가의 제2후계였던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김씨가와 삼백족이 아니더냐.”

 

그러한가. 하나, 나는 이미 한씨가에서도, 키야트 아이누 사회에서도, 제화족 전체에서도 광인으로 불리는 몸. 한데, 내가 무어라 떠들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라버니.”

 

유란의 씁쓸한 미소는 또다시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다섯 살 어린 서란이 독을 삼키고도 숨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그날, 자신을 향해 그녀를 살려달라고 빌었던 유란의 모습이 떠올라 유흔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서란이 살아남는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는 서란이 그저 한씨가의 가주에 머물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 양소막부나 목협막부처럼 이름뿐인 막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전국을 일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면 해.”

 

유흔이 유란의 처소를 나서기 직전, 유란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그러나 이제껏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소원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중얼거렸다. 유흔은 그런 유란에게 세 번 큰절을 올렸다. 지금 유란이 서란과 자신의 혼인을 허락했음을, 그러나 관례에 따라, 또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일부러 확답을 내리지 않고 며칠에 걸쳐 이어지는 절차를 지킬 것임을 유흔은 알고 있었다.

 

정말 서란 아가씨와 혼인하실 생각이십니까?”

 

여태 잠을 자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졸음으로 반쯤 감긴 눈을 한 보현이 유흔의 뒤를 따르며 물어왔다. 유흔은 선선히 미소를 지으며 보현에게 말했다.

 

보현.”

 

, 공자님.”

 

언젠가는 말이다. 서란이 나 때문에 울 일이 있을 것이다. 서란이 나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네가 나를 대신해 그녀의 곁에 있어주거라.”

 

그날부터 유흔은 칠일에 걸쳐 일곱 가지 예물을 유란에게 보냈다. 첫째 날, 유흔은 검은 담비털가죽 외투와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인 갖가지 동물의 가죽을 예물로 보냈다. 외투를 받은 유란은 매우 기뻐하며 예물을 가져간 유흔의 시종들 앞에서 그 옷을 입어보고 거울 앞에서 단장을 했다.

 

어머. 이 검은 담비털가죽은 정말 귀한 건데. 유흔 오라버니가 정말 신경을 많이 쓰셨구나.”

 

유란은 그 길로, 처소에 연금된 추을을 찾아가 옷 자랑과 함께 사위가 될 유흔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형부, 이 외투 어떻습니까? 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누가 이렇게 귀한 것을 예물로 받아보겠습니까.”

 

…….”

 

유흔 오라버니가 제 딸아이에게 정말 푹 빠졌나 봅니다. 키워서 색시 삼는다더니 정말 색시로 삼으려는 것을 보려면 말입니다.”

 

그러한가.”

 

게다가 옷을 고르는 안목도 어찌나 뛰어난지. 이 외투를 보십시오. 제게 너무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

 

자여도 어서 좋은 신랑감을 만나 이처럼 화려한 예물을 받아야할 텐데요. , 부친께서 금족령에 처해진 지금은 조금 어렵겠지요?”

 

둘째 날, 유흔은 아라비아와 유럽에서 들어온 진귀한 보석들을 다섯 상자 정도 채워 예물로 보냈다.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호박, 마노, 토파즈, 오팔, 다이아몬드, 진주, 석류석, 터기석, 자수정, 흑요석 등의 진귀한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담겨 있는 상자의 한 면에는 멋지게 은도금까지 되어 있었다.

 

이런. 이런. 이렇게까지 과한 예물은 필요 없는데.”

 

유란은 머리를 조금 크게 부풀려 올리고 비녀와 뒤꽂이를 부챗살처럼 꽂고는 자여를 만나러 갔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모의 등장에 자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쭈뼛거리며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리 어려워할 필요 없다. 나는 네 이모가 아니냐.”

 

그래도…….”

 

너도 들었느냐? 너의 외숙부인 유흔 오라버니가 너의 사촌언니와 혼인하고 싶어서 내게 이런 예물들을 보낸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내가 마치 저 구하의 귀비 양씨를 낳은 부모들처럼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될 날이 올 줄 어찌 알았겠느냐.”

 

…….”

 

이게 다 내가 딸을 잘 둔 덕이지. 그렇지 않으냐, 자여야?‘

 

, 이모님.”

 

가주님께서도 이런 호사를 누리셔야 할 터인데. , 너는 부친께서 금족령 중이라 당분간은 혼사가 들어오기 어렵겠구나.”

 

말을 마치며 유란은 쥘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자여 몰래 미소를 지었다. 이제 한 사람만 더 자극하면 자신이 할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셋째 날, 유흔은 녹색과 붉은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색의 비단과 조후를 예물로 보냈다. 좋은 염료를 들여 염색을 한 것인지 비단과 조후의 색감은 마치 자연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는 듯하였다.

 

이것은 조하금(朝 霞 錦)으로 만든 표의(表 衣)가 아니냐?”

 

유란은 금으로 장식된 함에서 나온 예물을 보다 말고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최고급 금사로 당초문과 가시연꽃을 수놓은 뒤 검정 물을 들인 비단으로 만든 표의는 가락지 사이로도 빼낼 수 있을 만큼 얇고 하늘하늘했다.

 

내 생전 사위에게 이런 선물을 다 받아보게 될 줄이야. 내가 대체 무엇을 잘했다고 이런 호강을 할까.”

 

말을 마치며 유란은 괴로운 듯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어린 딸을 학대해야만 했던 그때의 괴로운 심정이 떠올라 한 줄기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유란님?”

 

보현이 손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유란은 손수건을 물리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가엾은 내 딸.”

 

…….”

 

아가야. 내 딸아.”

 

…….”

 

살아남아라.”

 

…….”

 

반드시.”

 

며칠 후, 유란은 유흔이 보내온 비단으로 화려한 옷을 지어 입었다. 분첩과 화장품까지 내오게 해 정성을 들여 성장(盛 粧)을 한 그녀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낮게 올리고 비녀와 뒤꽂이를 꽂았다. 마지막으로 유흔이 보내온 검은 표의를 두른 그녀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우는 듯 웃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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