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명의 눈동자(45-1) "제가 무녀 휼란의 현신"제45장 여명의 눈동자(3)-1<지난 글에 이어서> 세 번째 주 요리인 칭정자지위가 접시에 담겨 나오는 동안에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서란은 유흔이 사기 숟가락으로 발라주는 커다란 도미살을 받아먹으며 방계의 인물들을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흔 또한 서란이 먹는 것을 구경하며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아이고, 밍밍해라.”
차를 홀짝이던 유흔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서란의 벌린 입에 도미살과 오이무침을 넣어주었다. 차가 밍밍하다는 소리로 침묵을 깬 유흔은 점원을 불러 데운 황주를 내오라 일렀다. 주문을 받은 점원이 황주는 역시 데워서 마셔야 하는데 공자님께서 무얼 아시나 보다며 유흔을 치켜세웠고 유흔은 내친 김에 생강을 넣어 데워오라 일렀다.
“황주는 데워서 마시는 게 보통이야. 그리고 데울 때 생강이나 약초를 넣어 풍미를 더하기도 하지. 우리 화야도 한 잔 마셔볼래?”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란은 방계 인물들을 또 다시 한 사람 한 사람 노려보았다. 방계 인물들이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자 서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역시 모르실 줄 알았습니다.”
“…….”
“하긴, 아셨다면 여태 자식을 잃으며 피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겠지요.”
“…….”
“아셨다면 그저 후계혈전에 끌려가 직계 후계들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방계 자식들의 운명을 한탄하며 쥐 죽은 듯 숨어 살 뿐인 삶을 살며 이 모진 생은 언제 끝나려나 한탄하지도 않으셨겠지요.”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계 인물들 줄 한 명이 서란에게 물어왔다. 서란은 그를 한 번 흘깃 바라보고는 유흔이 먹여주는 도미를 한 입 받아먹었다.
“적어도 저를 선택하셨다면 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려 하셨어야지요. 아니, 저를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알려 하셨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요 근래 우리 한씨가와 신씨가의 접경지역에서 양측 군대의 충돌이 빈번해지고 사소한 분쟁에는 나서지 않는 천호 이상의 군대가 출정하는 일이 잦아졌지요.”
“…….”
“그 모든 것이 정녕 우연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까? 그래요. 어쩌면 으레 있었던 사소한 분쟁이 조금 격해졌을 뿐이다, 그리 생각하시고 계시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이겠지요.”
“…….”
“아니면…….”
서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만 홀짝였다. 유흔이 서란의 찻잔에 황주를 섞어주며 이러면 조금은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서란은 유흔이 섞어준 찻잔을 홀짝이다 네 번째 주요리로 나온 선어 홍소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요리사가 자신은 다른 요리사들과는 다르게 홍소요리를 할 때 튀긴 뒤에 찐다며 조리방법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고 서란은 육즙이 그대로 가둬진 방어를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아둔하신 겁니까.”
서란의 발언에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방계 인물들 중 한 명이 말씀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화를 냈다. 서란은 그를 노려보다 젓가락 받침 위에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습니까. 누가 보아도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 여기지 못하니 그 어찌 아둔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렇게 아둔하니 자식을 잃으면서도 체념하며 살 수밖에 없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 비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란은 문득, 자신의 어머니 유란을 떠올렸다. 독을 삼키고도 숨을 놓지 못하는 어린 딸을 안고 오라버니에게 딸을 살려달라 애원하던 여인. 그때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서란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서란 아가씨께서는 그 모든 일들에 다른 연유가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연유라.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주님입니다.”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이 말을 씹어뱉으며 서란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유흔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서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주님이라니 그 무슨…….”
“그렇다면 그 모든 일들의 배후에 가주님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까?”
방계 인사들의 술렁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서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란은 다섯 번째 주요리로 나온 바바오샤이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으며 황주를 한 모금 마셨다. 유흔이 서란의 입가에 묻은 양념과 기름을 손가락으로 닦아주고 제 입으로 가져가 쭉 빨았다.
“뭐야, 더럽게.”
“그러는 우리 화야는 뭘 이렇게 묻히고 먹어. 애도 아니고.”
“뭐?”
“아, 미안. 우리 화야, 애였지. 어쨌든 묻히고 먹기에 닦아준 것뿐이야.”
“피. 조금밖에 안 묻었는데.”
서란의 침묵을 깬 것은 유흔의 행동이었다. 입을 열고도 한동안 유흔과 깨소금을 볶는 듯한 대화를 나누던 서란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니, 어쩌면 저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그것이 무슨…….”
“시조이신 무녀 훌란의 현신.”
서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무녀 훌란의 현신. 그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한씨가에서, 아니, 가유에서, 아니, 키야트 아이누 전체에서 아무도 없었다. 샤쿠샤인을 죽이고 제화족과 삼백족의 7년 전쟁을 이끈 무녀 훌란의 이름을 얻은 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누가 그 말에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샤쿠샤인의 후예인 김씨가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 한씨가에서는 그 이름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저이지 않습니까.”
“…….”
“이 한서란이,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가 바로 그 무녀 휼란의 현신이지 않습니까.”
서란의 말에 다시 한 번 무겁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란이 말하는 바대로 서란은 무녀 훌란의 현신이었고, 다시 말해 그것은 가주 정옥이 서란을 두려워해 한씨가와 신씨가의 전면전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시조이신 무녀 훌란의 현신. 여태 한씨가에서 그 이름을 얻은 사람이 있었던가. 모든 방계 후계들과 직계 후계들은 물론이고, 가주들조차 38대에 이르는 동안 얻지 못한 그 이름을 오직 38대 제2후계인 서란만이 얻었지 않은가.
그러니 정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방계 후계인 서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고 자여의 목숨을 살려 다음 대 가주로 만들 방법이 필요했을 터였고, 그것이 바로 신씨가와의 전쟁이었을 터였다. 서란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한 방계 인물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며 주식으로 나온 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창펀이라고 불리는 하늘하늘한 만두를 간장과 식초 양념에 찍어 먹는 것은 꽤 맛이 있었다.
“자, 그러니 이제 이 카무라 프라 샤르휘나가 여러분들께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계십니까?”
주식으로 나온 창펀을 먹고 탕으로 나온 해삼과 누룽지탕을 먹는 동안 서란은 방계 인물들에게 김씨가와 신씨가와의 동맹을 통해 전쟁의 방향을 동북으로 돌리려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서란의 계획을 들은 방계 인물들은 저마다 사기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크게 놀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고, 서란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 점원을 불러 탕과 사기숟가락을 새로 내오게 했다.
“여기 모인 분들께서는 아무래도 탕에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야. 다른 탕을 요리해 내오도록.”
“어떤 것으로 내올까요, 아가씨?”
“쏸라탕을 내오도록 해. 어차피 내가 한 말 때문에 지금 소화도 안 되실 테니.”
곧 요리사가 돼지고기 안심과 두부, 죽순, 닭 안심을 넣고 소금과 간장, 물녹말, 날달걀, 바오닝추, 대파, 고수로 간을 맞춰 끓인 쏸라탕을 내왔다. 서란은 쓰촨의 요리인 맵고 시큼한 그 탕을 한 숟가락 떠 국물을 맛보았다. 쓰촨의 요리는 기후 탓에 매운 맛이 강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쏸라탕은 소화를 돕고 위장과 비장을 튼튼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또한 간과 신장의 기능을 좋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답니다.”
요리사가 요리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고 물러나자 서란은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체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사람 좋은 얼굴로 방계 인물들에게 탕을 맛보기를 권했다. 방계 인물들이 머뭇거리며 선뜻 숟가락을 뜨지 못하자 유흔이 설마 우리 화야가 못 먹는 것을 주겠느냐며 탕기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뜨거워! 입천장 홀랑 벗겨지겠네.”
“괜찮아, 유흔?”
“괜찮아. 이 정도 가지고 큰일 안 나. 그나저나 이거 좀 뜨겁기만 하지 독도 안 들었고 제법 맛있는데 다들 왜 안 드시는지 모르겠네.”
서란과 유흔은 탕을 선뜻 뜨지 못하는 방계 인물들에게 억지로 탕을 먹였다. 탕을 먹은 방계 인물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서란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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