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5-2) "무모한 계획"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8/05 [10:00]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5-2) "무모한 계획"

이슬비 | 입력 : 2020/08/05 [10:00]

<지난 글에 이어서>

여러 날이 걸려 서란 일행은 카이성에 도착했다. 유흔과 헤어지고서야 서란의 목적을 알게 된 비화와 구향, 소하, , 자영, 화요 여섯 사람은 일제히 경악하며 이마를 짚었다. 드디어 그대가 미쳤나보다며 바닥에 주저앉는 화요를 필두로 나머지 다섯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거나 뒷목을 잡았다.

 

뭐야, 소구로 가는 게 아니었어?”

 

.”

 

대체 왜 이렇게 무모한 계획을 짠 거야?”

 

글쎄, 이미 내 목적은 충분히 설명했지 않나. 그런데 아직 더 설명이 필요한 거야?”

 

이봐, 김서인은 아무나 가서 부른다고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 물론 그대가 아무나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알아. 김씨가의 가주이며, 추연의 영주이지. 또한 키야트 아이누답지 않게 남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계시는 인사이기도 하고.”

 

, 그대라는 사람은 정말.”

 

, 어떻게 우리까지 속일 수 있는 거야?”

 

그래서 같이 갈 거야, 말 거야?”

 

서란의 말에 여섯 사람은 하하, 하고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우리가 그대를 두고 어디를 가냐고 말하는 것 같아 서란은 그저 한 번 웃어주었다.

 

그러면 가자. 하루라도 빨리 카이성에 도착해야하니까.”

 

가라고루성에서 카이성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난했다. 가라고루성에서 웅진현, 아무르강 유역의 나로성을 거쳐, 김씨가의 한씨가 접경지역, 추연의 제1방어선에 속하는 호국성에서 카이성으로의 여정은 십사야(十 四夜)가 걸렸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면서도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것처럼 설렁설렁 말을 타고 가는 서란을 보며 비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야,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기는. 우선은 김서인을 만날 생각을 할 뿐이지.”

 

비화의 말에 서란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빨리 가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면 김서인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김서인을 만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게 된다고. 서란의 대답에 비화는 웃으며 탕 한 잔을 권했다. 모닥불에 금 간 주전자를 올려놓아 물을 끓이고 지난 가을에 말려두었을 감잎을 우려낸 탕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차보다는 탕이 좋아서.”

 

독특한 취향이군. 부상국 사람들은 탕보다 차를 더 좋아하는데.”

 

탕도 맛을 들이면 나름대로 마실만해.”

 

그런가.”

 

혹시 아나. 그대도 언젠가는 입맛이 바뀌어 탕을 즐기게 될지.”

 

어딘가 애수를 띤 말투에 서란은 더는 대화를 이어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말린 감잎이 다 떨어질 무렵, 일행은 카이성에 도착했다.

 

카이성에 도착하자마자 한 객잔에 짐을 푼 서란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한씨가의 상징인 새 두 마리가 옷깃과 소매에 수놓아진 옷을 골랐다. 옷을 갈아입은 서란은 곧바로 김씨가의 가신가문이며 방계가문인 후예씨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으로 향한 서란은 옷깃과 소매에 수놓인 한씨가의 문장을 내보이며 후예씨가의 가주인 후예유진과의 만남을 요구했다.

 

저택에 들어선 서란은 곧 후예씨가의 후원에 있는 정자로 안내되었다. 정자로 가는 길목 곳곳에서 서란은 후예유진의 첩실로 보이는 여인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하나같이 꽃같이 단장한 그녀들은 여기저기 모여 수다를 떨거나 차를 즐기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가주의 정실부인이며 사촌누나인 후예연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이야, 이거 여러 부인들께서 허구한 날 정실부인의 험담을 늘어놓으니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서란은 자신을 뒤따르는 후예씨가 시종을 무시하고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옷깃과 소매에 새겨진 새 두 마리를 본 그녀들이 금세 헛기침을 하며 한씨가에서 사절이 온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는데 그대는 누구시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느냐 물었다.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한서란입니다. 가주님을 뵙고자 하였는데 가주님께서는 출타 중이시라며 저를 이곳으로 안내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이 사람은 가주님의 첩실 중 하나인 연심이라고 합니다. 삼백족 기녀 출신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주도적으로 마님을 험담하시는 것입니까?”

 

, 그것이…….”

 

세간에서 흔히 첩을 두는 것은 집안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하는 연유가 무엇인지는 아실 테지요? 정실과 첩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면 집안의 질서가 깨지고 그리 되면 천하의 질서가 무너진다고요.”

 

…….”

 

, 남의 가문 일에 주제넘게 나섰다면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나 자라온 한씨가와 가유는 여성우월주의적인 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곳. 남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김씨가와 후예씨가, 추연의 질서에 익숙하지 못해 그런 것이라 여기고 너그러이 이해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자에 오르자 시녀들이 말차를 우릴 다구가 든 팔각상자와 밀가루 반죽 안에 팥소를 넣고 철판에 구운 과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서란은 나이 많은 시녀가 우려 주는 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말차의 씁쓸한 맛이 혀에 남아 서란은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가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 후원이 분주해지더니 시녀 하나가 정자 아래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서란은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에 꽂은 홍옥으로 만든 나비가 달린 은비녀와 백금으로 만든 진주 뒤꽂이, 에메랄드로 만든 나비가 달린 백금 뒤꽂이를 다시 꽂은 서란은 옷깃을 가다듬고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 가주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정자로 들어섰다.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한서란이 후예씨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서란은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은 꿇은 무릎 위에, 나머지 한 손은 정자의 마룻바닥 위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유진이 껄껄 웃으며 서란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시지요, 아가씨. 그래, 한씨가의 후계께서는 무슨 일로 이 사람을 찾으셨습니까?”

 

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과 마주 앉았다. 시녀들이 다구와 과자를 새로 가지고 나타나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하얀 융모(絨毛)가 군데군데 보이는 가루차를 차시로 덜어내 두 번 나누어 찻잔에 담던 유진이 서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란은 그런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말차를 우리는 풍미는 바로 이 거품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진이 주전자의 물을 찻잔에 붓고 다선으로 세게 저으며 말했다. 그가 오랫동안, 세게 격불해서인지 보글보글 올라온 거품이 사라지지 않았다.

 

, 이제 즐기시지요.”

 

서란은 찻잔을 가져가 푸른 찻물을 눈으로 한 번 바라보고, 향을 코로 들이마셨다. 찻물에서 훅 끼치는 과일향과 꽃향을 서란은 천천히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천천히 넘긴 서란은 차가 목으로 넘어가고 입 안에 남아 있는 달콤한 뒷맛을 즐겼다.

 

동정벽라춘으로 만든 말차이군요. 이리 귀한 차를 내어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인은 다인을 알아보는 법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서란은 미소를 지으며 과자를 눈으로 한 번 보았다. 색색의 꽃 모양 과자들이 저마다 알록달록한 색감을 뽐내며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서란은 그 중 하나를 집어 살짝 베어 물었다. 찹쌀과 팥소로 만든 과자의 달달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가주님.”

 

서란이 유진을 불렀다. 유진이 예, 하고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에게 무슨 일로 가주님을 찾았느냐 물으셨지요?”

 

, 그러하였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무슨 일로 이 사람을 찾으셨습니까? 한씨가에서 사절이 온다는 소식은 없었고, 역시 한씨가의 제2후계가 이곳을 여행한다는 소식 또한 없었습니다. 한데, 한씨가의 제2후계께서 느닷없이 나타나 이 사람을 찾으시니 어찌 그 연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가주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아니, 가주님을 만나러 왔으되 추연에서 저의 궁극적인 목적은 김씨가의 가주님을, 이곳 추연의 영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서란의 말에 유진의 깊은 눈동자가 호기심을 띠었다. 서란은 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자신이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말해야 할 차례라고 생각하며 서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슬비 오컬트무협소설 연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