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 백연의 대답을 기다리는 며칠은 무척 지루했다. 서란은 그동안 객잔의 자기 방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비화와 구향, 소하, 효, 자영, 화요와 함께 제선성의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지루해졌는지 서란은 하루 종일 따분한 얼굴을 하고 침상에 누워 있거나 흥밋거리를 찾아 도박판이나 싸움판, 홍등가 주위를 기웃거렸다.
“한씨가의 제2후계가 이런 곳에 드나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한씨가의 가주님께서 아주 좋아하시겠어. 그대를 무척 두려워해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는 분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지. 안 그래?”
서란이 가투(歌鬪)판에 앉아 있을 때, 옆에 앉아 패를 섞던 비화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서란은 패를 섞는 비화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며 무심한 투로 대꾸했다.
“글쎄. 부상국의 역대 무가 가주들 중에는 사생활은 아주 엉망이었지만 전쟁은 잘 했던 이들이 많아서 말이야 .”
“하지만 그대는 아직 가주가 아니잖아. 그렇다고 차기 가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군. 그렇다면 그대가 더 조심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뭐?”
“봐봐. 지금까지도 패를 다 안 섞었잖아. 사람들이 패를 언제 다 섞을 거냐고 재촉하는 눈으로 그대를 보고 있는데. 이러다 이들 중 내가 한씨가의 제2후계 한서란이라는 걸 눈치 채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가주님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니야?”
하. 비화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서둘러 패를 섞어 돌렸다. 패를 돌리며 비화는 서란의 손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란은 방금 받은 패 한 장을 손바닥으로 감싸 엄지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자, 이제 그대 차례야.”
비화의 말에 서란이 방금 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던 패를 탁자 위에 깔려 있는 담요 위로 던지며 패에 적힌 사비국의 시조 한 구절을 읊었다.
서로 그리워 만나는 건 꿈에 의지할 뿐
“서로 그리워 만나는 건 꿈에 의지할 뿐? 거 사비국의 유명한 기녀 황진이의 시조 아냐? 어디 보자. 다음 구절이…….”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이 서로 다음 구절에 해당하는 패가 있는지를 유심히 살폈다. 패를 섞은 비화가 다음 구절을 외우며 패를 던졌다.
내가 임 찾으러 갈 때 임은 나를 찾아왔네
서란은 다음 패를 던졌다. 비화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판은 자신이 이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라노니, 아득한 다른 날 밤 꿈에
서란은 마지막 구절을 외웠다. 상사몽이라는 제목처럼 구절 하나하나가 유흔을 생각나게 했다.
동시에 함께 일어나 길에서 만나지기를
가투가 끝나고 서란은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본래 도박판에서는 너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원한을 사게 마련. 서란은 마치 선심 쓰듯이 돈을 잃은 이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개평으로 주며 그들의 화를 달래주었다.
“기껏 딴 돈을 다 나눠 줘버리는군.”
“벌 만큼 벌었어. 그리고 괜히 이 돈 다 가져가다가 시비라도 붙으면 우리에게 좋을 게 없잖아.”
“그건 그렇군.”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돈으로 맛있는 음식이나 사먹자. 원래 도박으로 번 돈은 빨리 써야 뒤탈이 없는 법이니까.”
서란은 비화와 구향, 소하, 효, 자영, 화요와 함께 근처의 고급요리점으로 가 비싼 음식들을 주문했다. 구하의 명과 서양, 그리고 바다 건너의 대륙들에서 들어온 식재료와 향신료로 만든 요리들은 제화족이나 삼백족의 전통적인 조리방식으로 만들어진 음식들과는 색다른 풍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우와, 이게 파슬리라는 거야?”
“야, 이거 정말 맛있다.”
“그러게. 매일매일 이렇게 먹고 싶다.”
그러나 서란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조금 전 가투판에서 상사몽의 구절들을 본 뒤부터 계속 유흔이 떠올라 서란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가투판에서 실수를 하는 일은 없었지만 가투패 하나하나가 유흔의 얼굴로 보여 서란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털어야 했다. 서란은 음식을 집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젓가락 끝을 입에 대고 빨았다.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일 텐데.”
맞은편에서 음식을 먹던 비화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도자기로 만든 젓가락받침에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서란은 그런 비화를 바라보다 역시 젓가락을 젓가락받침에 내려놓았다.
“이 나라에는 젓가락에 관련된 금기가 참 많지. 그 중 하나가 젓가락을 입에 대고 빠는 행동이고.”
“그쯤은 나도 잘 알아.”
“그런데 그렇게 식사예절에 대해 잘 아시는 한씨가의 제2후계께서 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계실까?”
서란은 대답을 피하며 고기를 다져 만든 음식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나 서란은 곧 음식을 먹는 것을 포기하고 요리점 주인이 아까 가져다준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서란을 지켜보던 비화가 다시 말을 걸었다.
“통 먹지를 못하네.”
“…….”
“맛이 없나?”
서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맛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기한 향신료로 맛을 냈다 하나 서란에게는 그저 모래를 씹는 것처럼 퍽퍽하고 까끌까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란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별안간 유흔이 구워주던 경단이 생각나 서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인이 없어서 그래?”
“정인이라니?”
서란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비화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비화가 하하, 하고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혼인까지 약속했으면 그게 정인이지 뭐야.”
“그런가……. 유흔은 나보고 자기를 무엇으로도 여기지 말라 했는데. 숙부로도, 아버지로도, 스승으로도.”
“그래? 그러면 이제부터 정인으로 여기면 되겠네. 혼인까지 약속했으니 정인으로 여겨도 문제될 것은 없지 않나.”
그런가. 그러나 서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흔은 이번에도 자신을 정인으로 여기지 말라고 할 것이었다. 서란은 한숨을 쉬며 도자기로 된 국그릇의 뚜껑을 덮었다.
“벌써부터 그렇게 정인을 그리워해서야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살다보면 지금보다 더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할 날들도 많을 텐데.”
“정인…… 아니야.”
서란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인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 이렇게 가슴이 무거운 일이었던가. 마치 가슴 한켠이 저울추처럼 기우는 듯한 느낌에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께를 감쌌다.
“유흔은 그냥 유흔이야.”
언제나처럼 유흔은 그냥 유흔이라 말하는 서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란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요리점의 시중꾼을 불러 자신 몫의 요리를 내가게 했다. 곧 시중꾼이 요리를 내가고 다른 시중꾼이 들어와 입가심용이라며 차가운 말차 한 잔을 내왔다. 서란은 평소처럼 예법에 따라 차를 마시지 않고 찻잔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음 글로 이어짐>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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