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을 홀로 걷는 여인과 가을바다

녹색반가사유⑭ "생태 순환에서 이 가을은 비워둬야 합니다"

정미경 | 기사입력 2007/09/27 [22:25]

언덕을 홀로 걷는 여인과 가을바다

녹색반가사유⑭ "생태 순환에서 이 가을은 비워둬야 합니다"

정미경 | 입력 : 2007/09/27 [22:25]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타까움을 더해주었던 여름바다. 일렁이고 넘실대던 자맥질 앞에서 생명의 고동소리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감추듯이 보여주었던 바다가 나의 눈앞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여름바다가 적나라한 속살을 드러낸 여인의 나신이었다면, 내게 있어 가을바다는 바람 부는 언덕을 홀로 걷고 있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 모습에 감히 말을 건낼 수가 없어요.
 
▲ 생명의 고동소리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감추듯이 보여주었던 바다.     © 정미경

 역시나 여인은 이렇게 홀로 있어야 아름다워지는가 봅니다. 사색에 잠긴 눈, 여유로운 걸음걸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러면서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그렇게 저녁나절을 산책으로 고즈넉하게 보내는 모습이 여간 부럽지가 않습니다.
 
 머리채는 노을에 물들고 점점 멀어져 가는 윤곽은 실루엣처럼 신비로움을 더해가는 그런 가을 여인 말입니다.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가신 바다가 꼭 나를 빼닮았어요. 무채색 속에 원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잔잔한 바다는 신비롭기 짝이 없습니다.
 
▲ 바람부는 언덕을 홀로 걷고 있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바다.     © 정미경

 그러다가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바다안개가 수평선을 가리기라도 하면 또는 해안가 숲에서 밀려가는 연무에 휩싸이기라도 하면 바다는 상상의 바다로 변해버립니다.
 
 내려앉은 짙은 구름에 뭔가 큰일이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로 바뀌면 그때 비로소 바다는 본래의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모든 것을 감추고 아우르는 바다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때문이지요.
 
▲ 무채색 속에 원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잔잔한 바다.     © 정미경

  이 투명함과 모호함 사이에 가을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호객과 속임수는 온데간데없고 깊은 침묵이 시작되는 바다의 계절이지요.
 
 그래요. 생명은 감추어진 풍경입니다. 비로소 별이 바다위에서 춤을 춥니다. 얕은 바다에 떠다니는 해파리와 해변에 널브러져 있는 그니들의 주검 앞에서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는 바다를 슬퍼합니다. 원색의 싱그러움을 잃어가는 바다를 그리워합니다. 데워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본래의 시림을 안쓰럽게 기다립니다.
 
▲ 해안가 숲에서 밀려가는 연무에 휩싸이기라도 하면 바다는 상상의 바다로 변해버립니다.     ©정미경

  이 초가을에 바다는 비로소 선명해지고 숲은 점차로 퇴색해갑니다. 여름 내내 바람을 만들고 구름을 생성시켰던 숲도 피로해지기 시작하였어요. 곤하게 잠든 숲에 안기어 밤을 함께 보냈습니다.
 
 멀찍이서 지켜주는 계곡의 불침번은 쉴 사이가 없더군요. 위아래 계곡의 엇박자가 어쩌면 그리도 어울리는지. 잘 다듬어진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바로 그것입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색다른 맛에 전혀 새로운 교향곡을 듣는 기분입니다. 밤새 이어지는 연주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 투명함과 모호함 사이에 가을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정미경

 짐짓 모른 채 잠든 모습을 지켜보는 총총 별 아래 부드럽게 핥고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풀벌레 소리하며, 여여하게 부드러운 빛을 뿌리는 달빛은 지난 계절의 노곤함을 포근하게 덮어줍니다.
 
 마치 엄마의 심장소리에 곤한 잠을 자는 아기와 같습니다. 자리를 뜬 엄마를 느끼자마자 울고 마는 아기의 심정을 알고도 남습니다. 귀뚜라미를 비롯한 뭇 벌레들의 울음소리 사이로 사마귀는 알을 낳습니다. 알 위에 거품을 잔뜩 뿌려 놓습니다. 찬탄하고도 남을 모성이지요.
 
 이 숲에 보름달이 휘영청 떴습니다. 별들이 늘 그렇게 자리를 지키는 이 밤에 보름달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갑니다. 구름도 시샘하지만 곧 자리를 비껴줄 수밖에 없습니다.
 
▲ 휘영청, 숲에 뜬 부드러운 보름달.     ©정미경

   깊은 밤을 그렇게 지새우며 제 몸을 마멸시켜 온화한 빛을 뿌리는 달 또한 깊은 상흔을 지니고 있음을 보아버렸습니다. 몸 전체에 문신처럼 새겨진 고통의 흔적 말이에요. 
 
아아! 그래서 달빛이 그렇게 부드러웠던가. 퇴색해 가는 숲은 어느 하나 성한 데가 없어요.찢기고 먹히고 뽑히고 꺾이고 잘리고… 이 상처투성이의 숲이 곤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바다가 쉬고 숲도 쉴 때가 되었습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계절, 굽이도는 영마루에서 느끼는 가을은 그래서 쓸쓸합니다.
 
▲ 여여하게 부드러운 빛을 뿌리는 달빛은 지난 계절의 노곤함을 포근하게 덮어줍니다.     ©정미경

 저미는 고통을 안으로 삼키며 후대를 준비하는 생태계의 순환에서 이 가을은 비워 두어야만 합니다.
 
 제발이지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합니다. 자연이 하는 대로 말이에요. 바다가 원하는 것은 쓸쓸함이고 숲이 원하는 것 또한 고즈넉함이거든요. 침묵속의 사색이 아니라면 나와 당신의 간섭은 해코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덕을 홀로 걷는 여인은 바라보는 것으로 가을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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