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바람조차 숭엄한 백두고원에...백두의 기슭에서③ 생명살이 엄숙·고결함이 청아한 빛깔로 다소곳...고원지대에 부는 바람은 청정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멀리서 불어오는 몽고바람, 대륙에서 몰아치는 광풍과 같이 매운바람, 기슭을 타고 내리꽂히는 보라바람 등, 가지가지의 바람들이 백두고원을 에워싸고 있어요.
수목한계선 보다 높은 고원지대에서 만나는 길 잃은 길손처럼 서성거리는 서릿바람은 피곤을 단박에 가시게 합니다. 느닷없이 귀청을 찢어발기는 듯한 날파람이 불어올 때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아예 없어요.
골짜기를 훑고 쏜살처럼 치닫다가 순간에 흩어져버리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왜바람은 멀리서 온 길손의 마음을 사정없이 흩뜨려놓기 일쑤입니다. 고원지대를 지나는 바람이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자마자 제각기 갈래로 흩어지면서 생기는 바람 탓인 것 같습니다. 한대기후 가운데서도 툰드라기후에 속하는 백두고원의 바람은 또 다른 특징을 지녔습니다. 빙하지대를 가로지르는 바람이기에 언제나 늘 습기를 머금고 있다는 것이지요. 상승기류가 만들어내는 구름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는 바람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볕뉘 앞에서 드넓은 고원지대를 둘러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할 정도였어요. 하물며 드넓은 광야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는개가 잠깐 내리는 가 했는데 어느 사이에 해비가 지나갑니다. 그리고는 작달비가 온종일 길을 가로막아 나섭니다. 우림 속 이끼는 너도나도 이슬을 머금는데 여념이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계곡이 갑자기 불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빗소리 이외에는 적막하기 그지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채찍비로 돌변하여 더 이상 어쩌지를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천지 호반의 주위는 햇귀가 번쩍, 그러나 전광석화와 같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 사이에 너덜겅에선 돌멩이가 우르르 내리쏟아집니다. 골짜기와 그늘에 남아있는 눈은 그대로이고, 얼음 또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동행한 이들이 있음에도 지독한 외로움이 온몸을 엄습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또 다른 먹구름은 그 위로 쫓기듯이 밀려갑니다. 그리곤 저 멀리서 번개가 번쩍거림과 동시에 거대한 우뢰가 대기를 발기발기 찢어놓습니다. 골바람과 산바람이 낮과 밤을 교대하며 구름들을 이리저리 흩뜨려놓기 망정이지 햇살과 별빛을 본다는 것이 여간해서는 차례지지를 않는다고 하더군요.
호반주위의 만년설의 두께만 해도 평균4미터, 표토 아래엔 영구 동토층이 두텁게 깔려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별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시린 땅위로 솟아나는 땅별, 구름사이로 시리게 빛날 하늘별 들이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그런 별천지 말이에요.
안온하기 짝이 없다가도 무시무시한 공포가 내리누르는가 하면, 상서로운 잿빛 하늘 속에 갇혀있다는 두려움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이내 함성과 함께 펼쳐지는 조화의 극치가 눈앞을 가로 막습니다. 도대체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변화무쌍하고 희비쌍곡선이 무시로 엇갈리는 이곳에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내맡기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바람이 만들어 놓은 풍식구멍과 풍식버섯을 관조하면서 비로소 하찮은 인간의 바투는 행동거지가 거울처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부끄러움으로 말이에요. 날소리 보다 못한 인간의 교양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굴곡 많고 사연 많은 자연의 흐름 앞에서 몸 붙여 살아가는 백두고원의 뭇 생명체들이 숭엄한 존재로 와 닿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백두고원에 가면 생명살이의 엄숙함과 고결함이 청아한 빛깔로 다소곳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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