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토양의 공극 속에 표면장력으로 모여있던 물은 흙 속의 미네랄과 유기물을 품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지중수가 되어 계곡으로 흘러내립니다. 계곡주변의 나무그늘 속으로 흐르는 계류수는 매우 차갑다는 것과 깨끗하다는 특징을 지녔지요. 당연히 밀도가 높습니다. 좁은 물길과 돌출된 바위를 에돌며 굽이치기에 물살은 대단히 빠르며 용존산소가 풍부하게 녹아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심산유곡에도 물고기는 당연히 있습니다. 냉수성 어류들 말이에요. 갈겨니, 열목어, 금강모치와 산천어, 그리고 연어와 송어떼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워낙 차갑고 유속이 빠른 탓으로 상대적으로 먹이감이 부족하기에 이러한 냉수성 어종은 그 대부분이 소식(小食)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여기에 바위가 많은 지형조건을 가진 계류수에는 부착조류를 먹고 사는 날도래와 같은 수서곤충의 유충들이 살아갑니다. 이따금씩 조성되어 있는 웅덩이에는 떠내려 온 부착조류를 먹고 사는 원생동물과 윤충 등이 서식하고 있지요. 이 동물성 플랑크톤과 함께 가장자리에는 어김없이 가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류성 어종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빠른 유속에도 불구하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갈 수 도 있어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고르지 않은 하저와 굽이도는 물살, 내리꽂는 폭포가 만들어내는 소용돌이가 계곡처럼 많은 곳은 없습니다. 나선형의 물살은 공기 중의 산소를 물속으로 녹여낼 뿐만 아니라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새로운 흐름을 계속하여 만들어 내고 있어요.
결을 따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별의 운동이나 고인 물에서 물을 박차며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흐름을 타고 물위를 자유자재로 떠다니는 소금쟁이의 운동은 사실 말이지 가장 자연스러운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풍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돛단배 또한 이를 모방한 것에 다름 아니지요.
현존하는 인간사회에서 천진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은 아무래도 가톨릭의 봉쇄수도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함이 한점 때 묻음도 없이 살아 있다는 것에 경외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어요. 행복지수로 유명한 부탄이라는 나라도 마찬가지이지요. 해맑은 눈동자와 그림자 없는 미소, 몸에 베어버린 친절과 사려 깊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히말라야 산을 넘어온 새를 신처럼 떠받들며 자연 속에 껴묻혀 사는 저들이 더는 오염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구요.
사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원주민 부족들이야말로 문명의 때로 잊혀져버린 영성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저편너머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에요. 사라져가고 있는 저들의 언어는 고정되어있는 명사가 아니라 펄펄하게 살아 번뜩이는 동사라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습니다. 때문에 북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의 삶과 사랑 그 숭고한 영혼에 대한 아쉬움은 이런 점에서 못내 미련을 떨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인류의 시원으로 되고 있는 원주민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이 혼탁한 세계화는 그것 자체로 재앙이 아닐 수 없어요. 세계화에 포섭된 나라는 마치 가두리 양식장에서 항생제가 든 먹이를 먹고 사는 물고기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조국의 북녘 땅, 그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자본주의화하려는 모든 기도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화에 포섭하려는 개방은 인류의 개성을 획일화시키려는 또 다른 침략입니다. 명백한 침략입니다. 배고픈 이들을 향해 쌀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저들은 식민지 용병에 다름 아닙니다! 미제의 가련한 주구, 저들에게 동포애와 인류애가 벼락같이 찾아지이다! 사라져가는 계류성 어종, 그것은 혼탁해져가는 강으로 흐물거리듯 흐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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