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4-2) "전쟁 키우기"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6/12 [10:01]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4-2) "전쟁 키우기"

이슬비 | 입력 : 2020/06/12 [10:01]

<지난 글에 이어서>

네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신씨가와의 분쟁이 이렇게 잦은지, 또 어째서 사소한 분쟁에 잘 나서지 않는 천호 이상의 군대가 나서고 있는지 하나로 설명이 돼. 모두 분쟁을 조장해 전쟁을 유발하라는 가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되니까.”

 

그래, 맞아.”

 

더구나 세력이 많이 약해진 지금의 신씨가는 우리 한씨가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테고 그것은…….”

 

전면전을 벌일 기회지. 내 지지세력 중 한 곳이 된 신씨가 자체를 없애버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실 테니까. 우리 한씨가도 만만찮은 피해를 입겠지만 그래도 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한씨가가 입을 피해쯤은 감당할 수 있다 치부하게 만들었을 테고.”

 

유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에는 항상 자신이 서란을 보호하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서란이 갑자기 너무 훌쩍 커져 자신의 앞에 거대한 산이 되어 나타난 것 같았다.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서란을 끌어안았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크면 안 되는데.’

 

문득 드는 생각에 유흔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서란이 이렇게 자라기를 바란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런 유흔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서란이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흔, 우리 여행 갈까?”

 

여행?”

 

갑자기 여행이라니. 유흔은 서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여행. 북해도 곳곳 돌아다니고 김서인, 신다희 두 사람도 한 번 만나보지 뭐. 그리고 여행 다니는 김에 본도 동북지방도 돌아다녀보고.”

 

……!”

 

서란의 말에 유흔은 깜짝 놀라 어깨를 잡아채고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유흔은 지금 서란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서란은 지금 전쟁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 규모를 더욱 키우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흔, 우리 여행 가자.”

 

 

다음날, 서란은 서양인거주구역 13번지에 있는 데 바옌 부인의 집을 찾아갔다. 오후 늦게 도착한 방문객이 누구인지 확인하려던 하녀가 서란의 옷깃에 수놓인 새 두 마리를 보고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서란일세. 마담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하녀가 서란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서란은 응접실의 탁자 앞에 앉아 호화로운 가구들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집주인의 고상한 취향을 반영하듯 번쩍번쩍 야단스럽게 빛나지 않고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가구들을 바라보며 서란은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오셨군요.”

 

검은 드레스에 하얀 앞치마를 입은 하녀 둘을 대동한 데 바옌 부인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오늘은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쉬고 있었던 것인지 부인은 전에 만났을 때와 같은 드레스 차림이 아닌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그 위에 숄을 두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마담. 그동안 가문 내의 일로 바빠 찾아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 걸요. 혼인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준비랄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후계혈전 이전에는 혼인 할 수 없는 몸인 걸요. 마담께서는 어찌 지내고 계셨습니까?”

 

저야 새로 투자할 곳을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지요. 아시다시피 장사라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물건을 선점해 팔아야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법이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데 바옌 부인은 구하에서 유럽으로 가져갈 새로운 차를 찾았다며 하녀들에게 그 차를 내오게 했다. 하녀들이 종이에 싼 찻잎과 잎차를 내릴 다구를 들고 나타나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이것은……!”

 

하녀들이 찻잎을 감싼 종이를 풀자 서란은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백색, 녹색, 황색, 홍색, 갈색이 섞여 있는 표면을 마치 누에고치 같은 하얀 솜털이 감싸고 있는 찻잎은 구하에서도 황족들이나 귀족들만 마실 수 있다는 백호오룡이 틀림없었다.

 

역시 잎차를 즐기시는 분이라 다른가 봅니다. 구하에 있는 일꾼들이 새로운 차를 시험 삼아 사봤다며 선물로 보내왔는데 유리다관에 넣고 우려보니 찻잎이 하늘하늘 춤을 추는 것이 마치 항주 제일의 미녀가 옷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것 같더군요.”

 

맞습니다. 이 백호오룡은 찻잎이 펼쳐지는 모습이 마치 절세가인이 춤을 추는 것 같지요. 게다가 그 향과 맛도 일품이니 아마 유럽으로 가져가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사겠다 줄을 설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꾼들을 두신 것 같습니다.”

 

서란은 데 바옌 부인이 따라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청차인 오룡차 계열이지만 발효도가 높아 붉은색을 띠는 찻물에서는 달짝지근한 과일향과 벌꿀향, 그리고 나무향이 났고, 찻물을 입에 머금는 순간부터 목으로 넘기는 순간까지 온갖 과일과 벌꿀의 달콤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서란은 부인에게 북해도에서 남쪽, 부상국의 수도인 고도가 있는 부상국 영토 중앙의 섬 본도의 동북지방에 위치한 도부의 주인이며 다루씨가의 가주인 다루설리에 대해 물었다.

 

마담께서는 부상국 곳곳을 다니며 여러 영주들을 만나보셨겠지요. 그중에는 다루설리도 있었을 테고요. 그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의심도 많고 두려움도 많은 사람입니까?”

 

서란의 말이 끝나자 데 바옌 부인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서란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것 같아 서란은 다관을 들어 자신의 앞에 놓인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다루씨가도 한씨가와 마찬가지로 후계혈전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이 부상국에서 어느 가문에 후계혈전이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후계혈전을 도입한 저희 한씨가를 따라 수많은 제화족 가문들이 후계혈전을 도입하였고, 그 뒤를 이어 소수의 삼백족 가문도 후계혈전을 도입하였지요. 그런데 제게 그런 것을 물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담 같은 분께서 어느 가문이 후계혈전을 시행하고 있는지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다루설리의 부친이 가톨릭교도였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다루설리의 아버지가 가톨릭교도였다니? 서란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제까지 세간에 다루설리의 아버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삼백족 노예 출신의 가장 힘 없는 첩이었다고만 알려져 있었을 뿐. 그런데 부인의 말이 맞다면 다루설리의 아버지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다루가에서 그에 대해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루설리가 의심이 많은 것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기인했겠군요. 노예 출신, 그것도 가톨릭교도 아버지를 뒀다면 언제 죽을지 몰랐을 테니까요.”

 

그렇지요.”

 

그래서 후계혈전에서 승리해 유일한 딸이 된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손에 놓지 못하는 것이었고요.”

 

이로써 다루설리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의심이 많고 겁도 많다는 것은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란은 홍색에 가까운 찻물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데 바옌 부인이 준 정보를 어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하던 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동방미인.”

 

?”

 

유럽의 시장에 내다 팔 때 차의 이름은 백호오룡보다는 동방미인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 동방의 미인에 대한 환상을 가진 서양 귀족들이 앞 다투어 차를 사려 들지 않겠습니까?”

 

데 바옌 부인이 호호, 하고 웃으며 서란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무엇을 쥐어주었는지 서란의 손 밖으로 나무구슬을 꿴 줄이 드러났다. 데 바옌 부인의 집을 나서자마자 서란은 여태껏 쥐고 있던 손을 펼쳐보았다. 손바닥에는 가운데에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아들이 달린 로사리오 묵주가 고이 접혀 있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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