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8-2) "아비어미는 내 원수"

이슬비 | 기사입력 2019/11/07 [10:31]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8-2) "아비어미는 내 원수"

이슬비 | 입력 : 2019/11/07 [10:31]

<지난 글에 이어서>     

한씨가 저택으로 돌아온 서란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보현이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저택의 대문을 들어서는 서란을 보자마자 달려온 보현은 서란의 앞에서 한껏 예를 갖추었다. 평소에 보현에게 받아본 적이 드문 예법에 서란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따라온 이들 앞에서 서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이게 해주려는 허세임이 눈에 보인 까닭이었다.

 

왜 나와 있었어.”

 

아가씨가 무사히 돌아오시는지 확인하려 그랬습니다.”

 

만약 내가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부군마님을 찌르고, 저 역시 아가씨 뒤를 따를 생각이었지요.”

 

보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가씨의 것이니, 아가씨는 저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고요.”

 

서란은 보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주었다. 한씨가 내에 존재하는 얼마 안 되는 자신의 편. 자신이 한씨가의 제2후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한서란이라서, 새벽의 광명,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라서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 서란은 그런 보현과, 비화를 서로 인사시켰다.

 

이쪽은 비화라고 한다. 곧 내 시위장이 될 이이지. 그리고 비화, 이쪽은 보현이라고 한다. 내가 고도의 노예시장에서 데려온 이로, 내 어머니의 시종이다. 또 이 한씨가 내에 존재하는 얼마 안 되는 내 편이기도 하지.”

 

보현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혹여 보현보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냐?”

 

그렇소.”

 

이 아이들을 소개하지. 이 아이들은 각각 탄금, 소하, , 입동, 업생이라고 한다. 나와 함께 수학했던 아이들이지.”

 

서란은 비화가 소개하는 이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소하와 효는 그렇다 치고, 탄금과 입동, 업생은 검을 쓰는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탄금과 입동, 업생이라. 너희들의 스승이 이름을 참 아무렇게나 지어준 듯하군. 대체 무슨 뜻이지?”

 

탄금은 스승님의 애첩 되시는 분의 함자였다. 그분이 아이를 낳다 돌아가셨는데, 그때 마침 이 아이가 강보에 싸여 들어오니 이름이 탄금이 될 수밖에. 그리고 입동은 글자 그대로 입동(立 冬)이다. 입동에 스승님께 발견되었다 하여 이름이 입동이 되었지. 또 업생은 이 아이의 친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렇군. 그렇다면 내가 새로 지어줘도 괜찮겠나?”

 

이제부터 우리의 주인은 그대가 아닌가. 그대가 하고 싶을 대로 하라.”

 

서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이들에게 어울리는 이름들을 생각해냈다. 서란은 탄금과 입동, 업생의 이름을 새로 고쳐주었다.

 

탄금은 구향(九 香). 아홉 구(), 향기 향(). 아홉 가지 향기라는 뜻이다. 입동은 자영(紫 英). 자줏빛 자(), 꽃부리 영(). 자줏빛 꽃이라는 뜻이다. 업생은 화요(枠 妖). 벚나무 화(), 아리따울 요(). 벚나무의 아리따움, , 아름다운 벚나무라는 뜻이다.”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서란은 시위장을 시켜 시위들을 모두 연무장에 불러 모으게 했다. 연무장으로 나서기 전, 서란은 가지고 있는 옷들 중 가장 화려한 곳으로 갈아입었다. 붉은 공단에 황금빛 자수가 온몸에 걸쳐 놓여 있는 그 옷은 황제나 황후의 옷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한 옷이었다.

 

잘 어울린다, 우리 화야.”

 

언제 들어온 것인지 유흔이 다가와 서란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 황금으로 만든 귀고리와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서란의 긴 머리를 다시 빗겨준 유흔은 머리를 세 갈래로 땋아 올려 금나비 장식이 보요 끝에 매달려 있는 금비녀로 말아 올리고, 석류석으로 만든 붉은 장미가 박힌 금제 장식빗을 꽂아주었다. 그리고 황금빗 머리끈으로, 말아 올린 쪽 주위를 한 번 둘러주었다.

 

화야.”

 

유흔이 서란을 한 번 끌어안았다. 서란을 끌어안으며 유흔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이 새벽의 광명을 한씨가의 가주로 만들 거라고. 그리고 자신이 이 새벽의 광명의 손을 놓는 날이 있더라도, 이 새벽의 광명이 망가지지 않게 할 거라고.

 

이제 가자.”

 

유흔이 서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한데 얽혔고, 손가락이 하나하나 깍지 끼워졌다. 서란은 유흔의 손을 잡고 연무장으로 나섰다. 시위들 앞에 나서기 전, 유흔의 손을 놓으며 서란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곳에서 유흔이 지켜볼 터이니 자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다들 모였는가?”

 

서란은 시위장의 앞으로 나서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시위장의 앞에 나서는 서란의 손에는 숲속에서 지니고 있었던 검이 들려 있었다.

 

시위장.”

 

, 아가씨.”

 

내가 그대들 모두를 이곳에 부른 연유를 아는가?”

 

서란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깃든 침잠함을 유흔은 알 수 있었다. 유흔은 서란을 바라보았다. 관솔불이 서란의 얼굴을 붉게 비추고 있어, 옷에 놓인 자수며 황금 귀고리와 목걸이, 비녀가 마치 불길 속에서 날아오르는 불새처럼 보이고 있었다.

 

소인이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

 

서란이 시위장을 한 번 바라보며 비죽 웃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비어미는 나의 원수요

형제자매는 원수가 낳은 혹덩어리들이라

믿지 마라 아이야

믿지 마라 아이야

네 부모도 형제자매도

모두 믿지 말아라

그래야만 네가 살 수 있을 테니

믿지 마라 아이야

믿지 마라 아이야

 

이것은 14살의 나이로 후계혈전에 끌려가 죽은 24대 가주 양화의 둘째딸 채아가 죽기 직전 부른 노래가 아닌가! 시위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서란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대를 믿을 거라 생각했나? 나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내 시위들이 누구와 만나 무엇을 도모하는지 모를 것이라 생각했더냐? 이 한서란이?”

 

서란은 검집에서 검날을 뽑아들었다. 스릉, 하는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검날이 부드럽게 밀려나왔다. 서란은 그대로 시위장의 목을 베어버렸다.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 검이 시위장의 목뼈와 관절과 힘줄과 혈관을 자르고, 다시 허공에 피를 뿌리며 돌아왔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할 것이다. 이름이 불리어지는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듣는 즉시 내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라. 너희들의 장이 죽은 이유를 이름이 불린 자들이 대답해줄 것이다.”

 

서란은 시위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 이름을 불린 자들이 서란의 앞에 나와 순서대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서란은 그들의 머리 위로 피 묻은 검날을 드리웠다.

 

지금 이자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자여와 추을이 아닌, 오직 나 한서란이다. 한데, 이자들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서릿발 같은 서란의 목소리에 무릎을 꿇은 시위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이마를 찧어대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 자여와 추을의 첩자인 죄로, 자신들의 주인인 서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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