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명의 눈동자(45-2) "서란은 이 시대의 주인"

제45장 여명의 눈동자(3)-2

이슬비 | 기사입력 2023/05/06 [10:38]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명의 눈동자(45-2) "서란은 이 시대의 주인"

제45장 여명의 눈동자(3)-2

이슬비 | 입력 : 2023/05/06 [10:38]

<지난 글에 이어서>

우선은 죽이나 먹도록 하지요. 여기 혹시 제비집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아시다시피 광둥에서는 제비둥지로 끓인 죽을 산해진미 중 하나로 쳐서 말이지요. 저도 꼭 그 죽을 먹어보고 싶습니다만.”

 

서란은 요리사를 불러 제비집이 있는지 물었다. 요리사가 마침 손질해둔 제비집이 있다고 하자 서란은 그것으로 죽을 끓여오라 말하고는 다시 방계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방계 인물들을 둘러보는 서란의 눈에는 아무런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우십니까?”

 

제비집으로 끓인 죽이 나오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방계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던 서란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란은 이물질이 깨끗이 제거된 하얀 제비집을 수수와 쌀과 함께 끓인 죽을 바라보다 사기숟가락으로 저었다. 죽을 젓는 서란의 눈에 무엇인지 모를 노여움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유흔은 볼 수 있었다.

 

잃으면 목숨이요……, 아니다, 잃을 것도 없던가요. 아무리 가주님이라 하여도 방계 인사들 모두의 목을 자를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

 

한데, 잃을 것도 없는 주제에 내게서 떨어질 콩고물이나 바라고 정작 내가 너희들을 필요로 할 때에는 주저주저하며 나서지 않는단 말이냐?”

 

으득, 하고 이를 간 서란이 사기숟가락이 담긴 죽그릇을 집어던졌다. 사기로 된 그릇이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서란은 깨진 죽그릇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손으로 뒤엎어버렸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찻주전자며 찻잔, 접시, 젓가락, 술병, 술잔, 사기숟가락, 죽그릇 등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고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흔이 화야!” 하고 서란의 팔을 잡았으나 서란은 유흔의 손을 뿌리치고 붉은 보요장식이 줄줄이 매달린 뒤꽂이를 머리에서 빼냈다.

 

대체 무엇이 그리도 두려워서? 무엇이 그리도 겁이 나서? 잃을 것도 없는 주제에 무엇을 그리도 겁내는 건가? ?”

 

…….”

 

잃는 것은 하나도 없이 오직 얻을 것만 있을 텐데. 그것도 천하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을 마치자마자 서란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뒤꽂이로 팔을 찔렀다. 유흔이 놀라 말리려 했지만 서란은 그대로 팔을 뒤꽂이로 그어 긴 상처를 내고 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렸다. 자신은 이런 고통 하나 참아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은 지금 전쟁의 방향을 돌려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시간을, 그리고 김씨가와 천하의 패권을 겨룰 시간을 사려 하는 무녀 훌란의 현신이었다.

 

그 옛날, 여불위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자초에게 재물을 내주고 그를 화양부인의 양자로 만들어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 조희마저 그에게 내주어 그 유명한 진왕 영정, 훗날의 시황제 영정의 아버지가 되어 한때나마 천하를 얻었다.”

 

…….”

 

물론, 그는 끝이 좋지 못했다. 사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조희는 자초가 죽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전남편이었던 여불위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고, 이 사실이 아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웠던 여불위는 노애라는 사내를 환관으로 위장시켜 조희에게 보냈지.”

 

…….”

 

조희는 밤낮없이 노애와 정을 통했고 끝내 두 아들까지 낳았다. 아들들이 태어나자 조희와 노애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영정 대신 왕위에 올리기로 했고, 그 음모는 결국 탄로나 노애도 죽고, 두 아들도 장살(杖殺)되었다. 그 후, 조희는 궁에 유폐돼 평생을 죽은 듯이 살아야 했고, 여불위는 그 일에 연루되어 촉 땅으로 유배를 갔다 끝내 독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서란의 목소리는 어느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이 달콤하게 들렸다. 말을 할수록 가라앉는 서란의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유흔은 문득, 서란을 바라보았다. 서란의 주위에서는 어느새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라아나.’

 

유흔은 속으로 의 이름을 불렀다. 한씨가에서는 금기나 마찬가지인 그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유흔은 고개를 저었다. 서란은 의 딸이었지만 가 아니었다. 서란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새벽의 광명이 될 그런 존재였다.

 

너희도 그리 될 것 같으냐?”

 

서란이 물었다. 방계 인물들은 저마다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서란은 방계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붉은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턱을 감싸고 얼굴과 어깨를 쓸었다.

 

그런 것인가. 그래서 두려운 것인가.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

 

…….”

 

그러나…….”

 

서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점원에게 차를 한 잔 가져다달라고 지시했다. 점원이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나타나 차를 한 잔 따라주자 서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던져버렸다.

 

나는 그리 하지 않는다.”

 

…….”

 

나는 말이다. 적어도 내 사람은 챙기니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람이 되기로 했다면 온전히 내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챙겨줄 때 무언가라도 얻어먹고 싶다면 말이다.”

 

…….”

 

알겠느냐? 알겠다면…….”

 

…….”

 

내게 충()을 바쳐라.”

 

…….”

 

한씨가가 아니라 내게 충을 바치란 말이다.”

 

말을 끝맺는 서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매서워져 있었다. 서란의 표정을 본 방계 인물들이 흠칫 놀라 뒤로 서너 발자국 물러나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조아렸다. 서란은 그런 방계 인물들을 한 사람씩 둘러보다 자리에 앉았다. 유흔은 얼른, 서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띠를 풀어 팔의 상처를 감싸주었다.

 

화야, 괜찮아?”

 

유흔이 서란의 상처를 감싼 허리띠의 매듭을 묶고 점원에게 후식을 내오게 했다. 점원이 후식으로 과일과 부용고를 내오자 서란은 자신 몫의 접시에 놓인 청포도를 한 알 집어 입에 넣었다. 유흔이 서란의 접시에 놓인 석류 네 알을 집어 차례로 입에 넣어주었다. 서란은 유흔이 입에 넣어주는 석류알을 마치 저 먼 남부 유럽 어느 나라의 신화 속에 나오는 지하세계의 여왕처럼 느리고 우아하게 발라먹었다.

 

, 저희들은 서란 아가씨를 따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아가씨 말고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맞습니다. 서란 아가씨께 충을 바치지 않으면 대체 누구에게 충을 바치겠습니까.”

 

방계 인물들이 저마다, 붉은 입술로 붉은 석류 알맹이를 발라먹는 서란에게 충을 서약하며 더욱 더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흔의 손을 잡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좋다. 그러면 자, 이제 가자.”

 

…….”

 

가주님을 설득하러.”

 

마지막으로 방계 인물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본 서란은 유흔의 손을 놓고 장지문을 나섰다. 장지문을 나서 어두운 하늘을 한 번 보고 하늘보다 더 어두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는 서란의 뒷모습을 보다 말고 유흔은 눈을 감았다. 서란은 완벽한 가주였고, 영주였고, 새로운 지배자였으며, 천하의 주인, 시대의 주인 그 자체였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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