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출신 친박 좌장도 감동한 5·18 광주시민들의 모습

고승은 기자 | 기사입력 2019/02/14 [12:01]

'조선' 출신 친박 좌장도 감동한 5·18 광주시민들의 모습

고승은 기자 | 입력 : 2019/02/14 [12:01]
▲ 서청원 의원은 친박계 좌장으로 불릴 정도로, 박근혜의 대표적 측근 역할을 해왔다.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엔 조선일보에서 근무했으며, 당시 광주에 내려가 현장을 취재했다고 한다.     © YTN

[저널인미디어 고승은 기자] “현장을 직접 취재한 기자로서 당시 600명의 북한군이 와서 광주시민을 부추겼다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 많은 인원이 육로로 왔단 말인가? 해상으로 왔겠는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친박좌장으로 불리는 서청원 의원이 12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 일부다. 최근 자유한국당 내 의원들이 ‘북한군 600명 개입설’을 읊고 있는 지만원을 국회에 초청하고, 그것도 모자라 5.18을 폭동으로 규정해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고 있는 가운데, 39년전 광주 현장을 직접 취재했던 서 의원이 이를 꾸짖었다. 당시 현장취재 중이던 자신의 사진도 함께 올렸다.

 

5.18 민중항쟁 당시 서청원 의원은 < 조선일보 > 사회부 기자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광주에 특파되어 9박 10일간동안 머물며 현장을 취재했다고 한다. 그는 “한마디로 5.18은 숭고한 민주화 운동”이라고 밝혔다. 서 의원은 그해 < 조선일보 >를 퇴사하고 이듬해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다.

▲ 5.18 민중항쟁 당시 서청원 의원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광주에 특파되어 9박 10일간동안 머물며 현장을 취재했다고 한다.     © 서청원 의원 페이스북

서 의원은 “여소야대인 1988년 5공 비리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졌고,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5·18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6년 두 전직 대통령(전두환, 노태우)을 비롯한 당시 책임자들이 내란음모죄로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며 이미 역사적, 사법적 평가가 끝난 일임을 강조했다.

 

서 의원은 당시 열흘간의 상황에 대해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특히 그는 광주 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을 극찬하기도 했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에 반대해서 항거하던 학생들을 신군부가 군화발로 짓밟고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이를 말리던 시민들까지도 무참하게 짓밟아서 생긴 민주화 운동이다. 하마터면 나도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도 있었지만, 광주 시민들은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나는 광주 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당시 문화방송과 KBS 등이 불에 타는 일도 있었지만, 군인들이 철수한 후 6일간의 무정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광주 한복판 금남로에서 금은방 하나 털리지 않았다. 도청의 문서 하나도 훼손된 것이 없었다“

▲ 5.18 당시 광주시민들은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서로 도와가면서 광주를 지켰다.     © 광주MBC

그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에도 이런 내용을 담았고, 1985년 7월 월간조선에 <광주민주화운동 5.18에서 5.27까지> 기사를 통해서 당시 상황과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에 감복한 내용을 기사화하기도 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알렸다.

 

서 의원은 12일 광주 CBS와의 인터뷰에서도 당시 사건에 대해 회고했다. 당시 광주에 내려가는 과정도 매우 험했음을 알렸다.

 

“(1980년 5월)19일 전주를 가니 이미 광주로 가는 기차나 차들이 모두 끊겼고 송정 쪽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차나 사람이 못가니깐 잘못하면 위험하다, 그래서 전주에서 1박하고 아침 7시쯤에 택시를 타고 송정을 거쳐서 광주지사가 있는 금남로에 가서 20일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가톨릭센터에 유리창 파손은 물론, 수류탄 가스 냄새가 가득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그는 21일에 있었던 계엄군의 집단발포 사건도 지켜봤다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발포 전날인 20일 계엄군이 금남로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을 마구 때려대니까 이를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분노해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 계엄군은 초반부터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 광주MBC

“아주 격렬하게 시민들이 저항했었는데, 원인은 시위하는 학생들을 마구 때린 것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왕래가 잦은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때리니깐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굉장히 분노를 한 겁니다.”

 

서 의원은 특히 5월 22일에서 27일의 광주에서의 상황에 대해 “학생과 청년들이 도청을 지키고 밤에 질서를 지키고 거리의 질서회복을 하고 이상한 사건이 터지지 않도록 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훗날 <월간조선>에 취재기를 올리면서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에 감명 받았다는 기사를 썼다. 당시 현장에서의 일을 쓰고 나서 항의전화를 받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인 만큼, 언론에 광주의 본모습이 보도될 수는 없었다. 당시 모든 언론들은 군사독재 정권의 나팔수나 다름없었다.

 

물론 <조선일보 > 도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선 보도하지 않고, 시위대가 난폭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호도했다. 또 시민들의 시위가 ‘유언비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계엄사의 일방적인 입장도 실려 있다. 그런데 그 유언비어(계엄군이 시민들에 가한 온갖 만행들)는 사실이었다.

▲ 계엄군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무참히 희생됐다.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유가족들.     © 광주MBC

<조선일보>는 1980년 5월 22일자 보도에서 <광주일원 소요사태> 라고 전했고, 23일에는 <폐허같은 광주 데모 6일째> 라고 보도했으며, 25일에는 <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면서 시민들을 폄하했다.

 

<조선일보>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차지한 다음날인 5월 28일자 신문 1면엔 < 계엄군, 광주 장악> 이라고 썼다. 그 다음날인 29일엔 <서서히 문 열리는 광주> 라고 쓰는 등, 마치 계엄군이 광주로 들어온 것이 마치 다행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일보 사진부>는 12일 페이스북 공식계정을 통해 5.18 광주에서 있었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서청원 의원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 조선일보 사진부는 페이스북을 통해,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를 기록한 사진들을 남겼다.     © 조선일보 사진부 페이스북

<조선일보 사진부>는 “당시 조선일보 취재진으로 사회부 서청원, 조광흠, 사진부 이영배 기자 등이 파견되어 10여일간 광주에서 일어난 현장에 기록된 사진들을 보여드린다. 모두 사진부 故이영배 기자가 촬영한 사진들”이라고 언급하며 10여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구타하거나 끌고 가는 장면들, 계엄군과 시민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한 모습, 시민들이 들고 무장한 모습, 태극기로 둘러싼 관에 희생자의 시신들이 안치돼 있는 모습 등이 눈에 띈다.

 

눈에 띄는 사진도 있었다. “북괴는 오판 말라!”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는 사진이다. <조선일보 사진부> 의 설명에 따르면, 5월 23일 금남로의 모습이라고 한다. 또한 계엄군이 시민들에 의해 외곽으로 물러나자, 자체적으로 수습대책위를 꾸리고 활동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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