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5월 5일 단오절은 고주몽성제 탄신일

단오 기원이 초나라 굴원을 추모하는 날이라는 것은 어불성설

편집부 | 기사입력 2016/06/09 [16:17]

음력 5월 5일 단오절은 고주몽성제 탄신일

단오 기원이 초나라 굴원을 추모하는 날이라는 것은 어불성설

편집부 | 입력 : 2016/06/09 [16:17]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은 설날.추석과 함께 민족의 3대 명절로 꼽힌다. 수릿날(水瀨日)·천중절(天中節)·중오절(重五節)·단양(端陽) 등의 다양한 이름이 있다. 예로부터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 등 월과 일이 겹치는 날은 양기(陽氣)가 가득찬 길일로 쳐왔는데, 그 가운데 5월 5일을 일년 중 가장 양기가 센 날이라고 해서 으뜸 명절로 지내왔다.

수리란 말은 고(高)·상(上)·신(神)을 의미하는 옛말인데, 이 날은 1년 중 최고의 날이란 뜻이다. 농경사회에서 파종을 하고 모를 낸 후 약간의 휴식의 시점이 단오절이다. 이날 하루 마음껏 놀이를 즐긴다. 추위가 늦게까지 계속되는 북쪽지방은 이때 비로소 날이 완전히 풀리기 때문에 더 경사스러운 날이 될 수밖에 없다. 남쪽이 추석을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에 북쪽에서는 단오를 더 중시했음은 지역의 기후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날 약초를 캐고, 창포를 문에 꽂아두기도 하며, 창포물에 머리를 감기도 하고, 창포주나 약주를 마셔 재액을 예방했다. 또 쑥으로 인형이나 호랑이를 만들어 문에 거는 풍습으로 보아, 약초·창포·쑥 등의 강한 향기와 약성(藥性)으로 재액을 쫓았던 것 같다. 이날은 둥근 절편도 만들어 먹었고, 그네뛰기·씨름·탈춤 등 여러 가지 민속놀이가 행해진 명절이었다. 민간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여러 행사가 있었다.


▲ 강릉 단오제의 흥겨운 모습. 중국 초나라 굴원의 제삿날에 이토록 흥겨운 사물놀이가 가능한지? 단오는 고주몽 성제의 탄신일이기에 명절이 되었으며, 그날 온 백성들이 흥겨운 민속놀이를 하며 이를 경축했던 것이다.며     © 편집부



중국에서 주장하는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 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굴원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을 받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해 멱라수라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 이었다고 한다. 그 후 해마다 굴원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단오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의 명절인 단오의 참 뜻을 숨기기 위해 중국의 이야기를 우리가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명절이란 기쁘고 즐거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 죽은 자를 추모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건만, 이 나라 국민들은 모두 다 단오의 유래가 중국인 굴원의 죽음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일본/중국에게 우리 민족의 정신인 역사를 다 빼앗겼는데도 정부가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려 역사회복을 게을리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오절은 고주몽 성제의 탄신일

단오절은 고구리의 시조 고주몽 성제의 탄신일을 기리는 민족 고유의 즐거운 명절이지, 중국에서 굴원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는 명절이 아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 단군의 증손자인 불리지가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는데 때는 한나라왕 원봉 2년(B.C 79년) 임인 5월 5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주몽 성제는 어머니 유화부인과 함께 동부여에 살다가 졸본으로 와서 아들이 없던 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어 B.C 58년 21세의 나이에 대통을 잇게 된다. 즉 북부여 7세 단군으로 등극하여 연호를 다물(多勿)이라 했고, 나중에 국호를 바꾸어 고구리라 칭하니 그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은 위 <태백일사>와 다르게 되어 있다.





▲ MBC 드라마 주몽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소서노를 대상인인 연타발의 딸로 묘사했다. 소서노가 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의 공주인지, 연타발의 딸인지는 좀 더 객관적인 자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편집부

<삼국사기 고구려국 본기>에는 북부여에 대한 기록이 없고, B.C 58년에 태어나 동부여에 살던 고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스스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 때가  B.C 37년으로 주몽의 나이 22세라고 하며, 19년 후 주몽은 40세의 나이로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백제국본기>에  B.C 66년생인 온조의 왕모 소서노가 B.C 6년 61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 <삼국사기>의 기록들은 김부식이 조상인 신라의 건국년도(B.C 57년)를 고구려의 건국보다 앞서게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수정한 기록으로 보인다. 고주몽의 나이를 20년 가령 줄임으로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우월성을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언급하기를, 본기와 다른 <고기>의 내용도 있다고 간단히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의 기록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 북부여 시조 해모수로부터 시작되는 고주몽의 가계도     © 편집부

그리고 <삼국사기> 내용대로라면, 고주몽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단칸 셋방에서 시작해 그렇게 단시간 내에 아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대고구리의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강역을 넓히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자수성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태백일사>의 내용처럼 고주몽이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를 물려받았다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또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삼국사기>의 고주몽 출생년도와 <태백일사>에서 주몽이 북부여의 대통을 잇는 해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김부식이 모든 것을 알고도 신라를 내세우기 위해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서의 기록을 정리해 본다면, 고주몽 성제는 B.C 79년 임인 5월 5일 탄생해, B.C 58년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가, B.C 37년 국호를 고구리로 바꾸었으며, B.C 19년 61세의 나이로 붕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고주몽의 부인이었던 소서노의 사망 나이도 B.C 6년 61세가 아니라 81세 정도로 최소 20년 이상 늘려야 역사의 톱니바퀴가 맞을 것이다. 



▲ 북부여 7세단군이었다가 국호를 고구리로 바꾸는 고주몽성제     ©편집부


김부식은 고주몽 성제가 북부여에서 고구리로 국호를 바꾼 B.C 37년을 고구려를 세운 연도로 보고 그 이전에는 고주몽이 야인이었다고 고의적으로 기혹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의도는 북부여를 고의적으로 뺌으로서 조선(대부여) --> 북부여 --> 고구리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고구리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정통성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 성제의 2,095회 생신인 2016년 올해 양력으로 6월 9일 단오절에는 국민들이 고주몽 성제의 탄신년도라도 정확히 알아주었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램이다. 김부식에 의해 고의로 잘못 기록된 고주몽 성제의 탄신년도와 북부여 7대 단군으로의 등극년도와 고구려 건국년도를 이제는 제대로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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