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 산신 샛바람에 홀린 ‘밝은 여행’

[탐방-‘지리산 밝은마을’①] 여행생협 순례길 ‘즐겁고 알찬 동행’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1/12/07 [15:23]

노고 산신 샛바람에 홀린 ‘밝은 여행’

[탐방-‘지리산 밝은마을’①] 여행생협 순례길 ‘즐겁고 알찬 동행’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1/12/07 [15:23]
늘 망설입니다. 일어서려 들지를 않으니까요. ‘시체놀이’에도 맘과 몸이 고단하긴 마찬가집니다. “밥 한 번 먹자”는 ‘미모의 유혹’도 바보상자 속 인사치레일 뿐이죠. 통 큰 결단, 그리고 일탈. ‘오래된 미래’였던 모양입니다. 노고(老姑) 할머니가 전하는 샛바람을 느꼈습니다.  그리곤 탄성을 터뜨렸죠. “그렇지, 바로 이거야.”

여행생활협동조합 추진위(상임대표 김일섭)를 띄워놓고 두 달 여 만에 동행입니다. ‘즐겁고 알찬 여행’을 하자던 다짐도 잠시, 구태의연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뒤 이어 찾아온 ‘밝은 소식’. 마한(馬韓)을 지킨 정(鄭)장군의 혼이 서린 정령치를 타고 노고 산신의 단아함이 굽이쳐 흐른 능선. 거기 ‘지리산 밝은마을’(이사장 황선진)에 다녀왔습니다.

추진위 결성 두달, 구태의연 깨고

가을걷이가 막 시작된 9월 열댓이 생협추진위를 결성할 때부터 예감했던 겁니다. 지리산에서 왔다는 세 추진위원이 쏘아대는 심상찮은 안광을 마주하며 알아 봤던 거죠. 그 느낌, 그 포스. 빛나는 눈과 가슴 울리는 소리에 이심전심이었던 걸까요? “찾던 데야. 그래 거기. 가야 한다구...”
 
▲ 여행생협이 추진위를 결성하고 첫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지리산 노고할머니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도당터 느티나무를 뽑아버리고 역사를 세운 사당(舍堂)역이 그 출발이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있을까요? 삼신할매가 노하지 않기만을 기원합니다.   © 최방식 기자
▲ 여행자들은 오백리를 달려 지리산 노고단 북쪽 자락인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 있는 '밝은학교'에 당도했습니다. 학교 운영자 중 한명이 김혜경(왼쪽 모자쓴 이)씨가 아래쪽 숙박시설과 너른 앞마당을 보며 안내하고 있군요.     © 최방식 기자

지리산은 늘 어머니의 땅이었습니다. 축 늘어진 남도의 전사들을 위무하고 찾아왔던 곳도 노고 할머니의 품이었습니다. 그 참혹함에 마주할 수 없었던 주검의 잔영을 하나하나 지워주었던 망각의 땅이었죠. 장엄한 육봉, 들풀의 유혹에 빠져있노라면 성한 데라곤 찾을 길 없던 맘 속 생채기도 깨끗이 치유해준 억겁의 의원이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서 부서지고 닳아가는 육신과 영혼에 청량제가 필요했습니다. 지친 여행자의 심신을 달랠 수련이 필요했던 거죠. 하루 이틀 마음수련으로 다 해결할 거라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간’이나 보려던 것이었죠. 언젠가 수련을 시작할 테니 친숙함을 조금만 가져두려는 것이었고.

여행자들은 사당(舍堂)역에서 모였습니다. 우연일 테지만, 노고산신 할매의 샛바람을 사당(祠堂) 마을에서 마주했다니 놀랍습니다. 주민들이 섬기고 좋아했던 도당(都堂)의 느티나무를 뽑아버리고 지하철(사당역) 사거리를 세워놓은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김삿갓의 조롱이 들리는 듯 합니다. “좌수별감이 네겐 분에 넘치니 기병 보졸 따위나 마땅하리.”(풍자시)

‘밝은마을’ 가는 길은 확 트였습니다. 12인승 승합차가 주는 재미도 쏠쏠하더이다. 꽉꽉 막히는 고속도로 ‘파란선’(버스 전용차로)을 타고 씽씽 달리는 그 쾌감이라니. 모두들 신나서 창밖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차선을 보며 손가락질 합니다. 조옥화 선생(복지관장)의 탄성이 더 흥겹습니다. “야, 신난다. 니네들, 우리 부럽지?”

▲ '지리산 밝은학교'가 운영하는 백일학교 수련장입니다. 음식점으로 사용하려고 개발했다 방치한 집을 임대해 주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 최방식 기자

▲ '지리산 밝은학교' 부속 건물 중 하나인 '게르'. 강화도 백일학교에서 사용하다 옮겨온 것인데, 학교장인 윤중 선생이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겨울인데도 그는 난방을 하지 않는 게르에서 생활한다고...     © 최방식 기자


어머니의 땅, 억겁의 품에 안겨

남원까지 3시간.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 민자고속도로, 전주-남원간 새로 난 고속도로를 타니 이리도 곧 도착합니다. 빨라서 좋은 것인가요? 어디를 얼마나 그리 서둘러 가겠다고 동서남북으로 이리저리 그물망처럼 큰 길들을 닦아놓았는지.

남원 시내를 지나려는데 막걸리와 간식을 사야한다며 슈퍼에 들르잡니다. 눈에 띄는 데 있어 들어서니 큰 재벌유통사입니다. 10수년전 이마트가 들어서며 재래시장이 대부분 문을 닫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또 다른 대형 유통매장이라니. 소도시의 정겨움과 지역 농민·상인의 상권은 어쩌라고. 지역민의 신선하고 질 좋은 먹을거리를 즐길 권리는 또 어쩐답니까?

처가(妻家) 마을의 아련함도 잠시. 노고단 자락으로 접어듭니다. 굽이굽이 육모정 길을 오르니 삼신 할매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사라져버린 사당(祠堂)의 애달픔을 싣고 온 여행자를 제발 반기기만 고대하며 험한 고갯길을 넘으려는데 경고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겨울철 눈이나 결빙으로 위험하니 조심...”

뭐 별일 있겠냐는 심사로 산길 통제경고를 무시하고 고고씽.^^* 그런데 기후가 좀 심상찮습니다. 뭐 그렇지만 두려움 보다는 낭만이 먼접니다. 별 이야기도 없으면서 감성을 건드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도입부 아시죠?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저멀리 영봉이 하얗게 덮힌 지리산이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권위, 생명평화, 음식, 그리고 영생을 상징하는 하얀 산신 할머니. 여행자더러 탐욕으로 꽉 들어찬 마음을 어서 비우라고 외칩니다.     © 최방식 기자

▲ '마음수련'을 '간'보려고 달려온 밝은학교. 노고 할머니의 샛바람을 좇아 들어온 그 곳 수련장 벽 한 가운데 걸려있는 '백일학교' 깃발. '스스로 살리고, 서로 살리고, 세상을 살리자'는 표어와 '키천'(修, 공부라는 뜻)이라는 만주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 최방식 기자


험한 고갯길 넘어 하얀 세상이 펼쳐질까요? 그런데 정말입니다. 노고 할매는 벌써 머리를 하얗게 덮었습니다. 다행히 여행자들을 질책하지는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산자락 마을들은 아직입니다. 좀 더 더러워질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봉우리만 하얀 것은 소멸과 생성의 하얀 역사를 때가 되면 모든 땅에 쓰겠다는 예시인 거죠.

두려워 할 건 없습니다. 빨강·파랑의 유한한 채색에 빠진 인간들은 하양을 죽음으로 착각하지만 실은 영생이니까요. 하양은 음식(화이트는 밀-wheat에서 유래)이고 권위(정부의 백서)이며 지도자(하얀건물)죠. 생명평화(하얀 깃발)이고요. 그러니 하얗게 비우라는 것입니다.

생명평화 ‘하얀 세상’이 반기고...

그렇게 밝은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산길을 못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디지털기기의 도움에 이 마을에 오면서 조금은 맑아진 눈 덕에 어렵잖게 수련원에 당도했습니다. 문제는 여러 채의 집. 처음 본 허름한 건물은 텅 비어있고. 산길을 조금 더 오르니 또 다른 도량. 그 앞에 여행생협 도반 김혜경 선생이 손을 흔듭니다. 곁에 백구 한 마리도 꼬리를 흔들며 반깁니다.

노고단 북녘자락에 자리한 아담한 밝은마을. 고기리 구릉을 돌아 백여 미터 오르자 나타난 하얀 사각건물(숙박시설로 건축됐지만 버려둔). 다시 백여 미터 에스라인을 그리며 올라 동녘으로 난 1백여평 남짓 수련장(식당으로 건축했지만 버려둔). 1백여 발짝 올라 아담하게 쳐놓은 ‘게르’(몽골식 이동가옥). 그리고 수천평의 너른 목초지(야산을 개간).

▲ 여행생협 도반이 된 '밝은학교' 운영자 김혜정씨가 여행자를 반기며 따뜻한 차를 준비하고 있군요.     © 최방식 기자

▲ '마음수련' 차 오백리 길을 달려온 여행자들. 쥔장의 따끈한 차 한잔 대접에 벌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도심 때에 찌든 육체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소통을 시작합니다.     © 최방식 기자

마음 수련원 ‘지리산밝은마을’에 온 것입니다. 1만2천여평의 땅에 대안학교(백일학교 등)와 치유·명상·수련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곳이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모든 생명체와 어울려 하나 되고, 세상 만물과 한 뿌리 한 몸 되는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배우며 사는 곳.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고 독자적 삶을 영위하던 그 옛 마을을 재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며 자연과 지구를 착취하는 과학기술문명 패러다임 위기를 해결하자는 게 이들의 외침이라네요. <다음 글에서 계속>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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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례자 2011/12/07 [16:14] 수정 | 삭제
  • 정말이지 가고싶어요~ 쭉 거기 살고 싶어요~
    저런데서. 쭉 안된다면 한달만이라도, 아님 한 주 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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