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 46장 야래향(46-1) "서란이 가주로서"제46장 야래향(夜來香)(1)-1
<지난 글에 이어서>
가주님을 설득하는 것은 무사히 끝이 났다. 가주를 설득하는 것은 의외로 쉬워서 마치 원래부터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패배를 마지못해 시인하는 정옥의 표정을 보는 순간, 서란은 자신이 이제 한씨가의 제1후계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서란, 먼 여정에서 돌아와 가주님께 문후 올립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한씨가의 37대 제4후계였으며 서란의 정혼자인 유흔, 서란과 함께 여정에서 돌아와 가주님께 문후 올립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한씨가의 방계들이 한씨가의 가주님께 문후 올립니다. 백년세세 강녕하시옵소서.”
서란과 유흔, 방계 인물들이 일제히 전각 안으로 들어서 문안을 올린 때는 새벽이 밝아오는 시각이었다. 동이 틀 무렵, 서란과 유흔은 한씨가 저택 주위에 모여 있는 방계 인물들과 함께 찬이슬을 맞다 그들을 이끌고 가내회의 때 주로 쓰이는 전각으로 들어섰다. 전각은 아직 비어 있었고, 비어 있는 전각에 방계 인물들이 서란과 유흔과 함께 우르르 들어서는 것을 본 시종들과 시녀들, 노예들이 정옥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고 서둘러 볶은 보리로 탕을 끓여 날라왔다.
“우선은 한 잔 드시지요.”
어두운 밤부터 지금까지 찬이슬을 맞느라 추위에 지치고 긴장한 몸이 따뜻한 탕에 풀려 노곤해졌다. 서란은 몸에 두르고 있던 검정색 피풍의를 풀어 시종에게 건네고 이따 전각에서 물러날 때 달라 하고는 유흔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유흔이 이러면 머리가 망가진다며 서란을 일으켜주었다.
“이제는 유흔이 내 머리를 걱정하는구나.”
“화야?”
“지난날에는 유흔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 내가 머리가 망가진다고 징징거렸는데.”
“…….”
“이제는 내가 유흔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려 해도 유흔이 내 머리가 망가진다며 나를 일으키네.”
서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유흔에게 자신은 가주이고, 주군이고, 군주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흔의 앞에서만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고 싶은 것을 서란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서란은 정옥이 오기까지의 어슴푸레한 빛과 어둠 사이를 눈으로 가늠하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또 슬프고 여리디 여린 곡조에 방계 인물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긴장을 잠시 잊고 귀를 기울였다.
눈이 나려 나를 덮으면 그 밤에는 오시려나 마른 가지 희스무레하게 꽃눈이 맺혀오면 저문 유월 임의 품에서 이향(異香)에 취했거늘 된 비 세차게 내리고 씻겨도 차마 떨치지 못하노라
아니 오실 임을 애써 기다려 무엇 하랴 밑가지 채 꺾어 버려도 향기가 먼저 마중 가는데 아니 오실 임을 자꾸 새겨서 무엇할까 이 생에 살아서 못 만난들 어떠리
달 비치던 푸른 강가엔 쐐기풀이 웃자라고 구름 뒤에 어슴푸레하게 숨은 내 임의 얼굴이 임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꺾고 채이고 밝히고 짓이겨져도 또 피우고 마노라
오라, 아득히 멀리 벗어버린 임의 향기여 부옇게 번지는 꽃무더기 헤치며 울어보노라 가라, 내게서 짙게 배어버린 임의 온기여 떠나시던 임의 옷깃에 엉겨 매달려 볼 것을
서란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위기는 가주의 등장을 알리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유지되었다. 시종들과 시녀들, 시위들의 안내를 받아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 정옥의 발끝이 보이자 서란과 유흔, 방계 인물들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아니었더냐?”
서란의 뒤에 모여 있는 방계 인물들을 본 정옥이 물어왔다. 서란은 고개를 들어 정옥을 바라보았다. 정옥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이모님.”
정옥을 부르는 서란의 호칭은 가주님이 아닌 이모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모님. 가주님도 아닌 이모님. 자신을 부르는 서란의 호칭에 정옥은 두 주먹을 꼭 쥐며 표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서란은 그런 정옥을 올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정옥은 더 이상 서란에게 두려움의 대상일 수 없었고, 서란을 이길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제 이 한씨가는 사실상 서란의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정옥은 그저 서란이 가주가 되기 전 가문을 좀 더 키워줄 그릇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지금 평안이라 하였느냐.”
두 사람 사이의 어두운 공기에 무거움과 가벼움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서란의 말은 무거웠으나 정옥의 말은 가벼웠고, 서란의 마음은 가벼웠으나 정옥의 마음은 무거웠다. 가벼워야 하는 자와 무거워야 하는 자가 바뀌어 어느새 가벼움과 무거움은 가벼움인 동시에 무거움이 되었고, 무거움인 동시에 가벼움이 되어 서로의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증발해버렸다. 서란은 정옥의 두 눈 사이 인당을 강하게 쏘아보았다.
“어찌하여 그리 하셨습니까?”
추궁해야 하는 자가 바뀌었고, 추궁당해야 하는 자가 바뀌었다. 서란이 정옥을 추궁하고 있었고, 정옥이 서란에게 추궁당하고 있었다. 서란은 정옥을 추궁하며 그녀의 입으로 그녀의 모든 혐의사실을 인정하기를 종용하고 있었고, 정옥은 그런 서란의 눈빛과 기세에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그리 하였다.”
“가주님.”
서란이 다시 정옥을 가주님이라고 불렀다. 혐의사실을 모두 털어놓은 정옥은 더 이상 서란에게 추궁당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졌다. 서란은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정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말을 이어갔다.
“가주님께서 일부러 신씨가와의 분쟁을 종용하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가주님을 뵙고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에 대해 가주님의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
“아니다.”
서란은 다시 가볍게 말을 던졌다. 분명 이번 일은 사안이 중대하고 무거운 일인데 어째서 자신의 말은 이다지도 가벼운 것인지 서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서란은 다시 한 번 허공을 바라보았다. 말이 가벼우면 꼬투리를 잡히기 쉽고, 실수를 범하기도 쉬우니 서란은 자신이 지금 외줄을 타고 있다 생각하기로 하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제가 방금 올린 말씀을 정정하여아 할 것 같습니다.”
“…….”
“생각해보니 제가 오늘 가주님을 뵙고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일의 연장선이기도 하니까요. 가주님께서 신씨가와의 분쟁을 조장하고 그로써 자여의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하려 하지만 않으셨더라도 제가 가주님께 이런 말씀을 올릴 까닭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서란은 이제 능숙하게 정옥의 말길을 막고 있었다. 말문이 막히니 말길이 열리지 않았고, 말길이 열리지 않으니 정옥은 그저 서란의 말에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서란은 귀에 걸린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는 서란의 손끝 하나하나에 시선을 보내는 정옥의 눈꼬리가 떨리고 있음을 유흔은 애써 모른 채했다. 유흔은 이번 일이 서란과 정옥의 싸움임을, 그리고 서란 스스로 이번 싸움을 이끌어 나가야만 서란이 가주로서,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로서 설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주님.”
서란이 정옥을 불렀다. 정옥을 부른 서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옥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어느덧 훌쩍 자라버린 서란의 뒷모습이 보여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서란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유흔.’
“저는 동북으로 전쟁의 방향을 돌리고자 합니다.”
서란은 유흔이 자신의 등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흔이 이제 정옥이 아닌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서란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유흔을 위해서라도 이번 싸움을 스스로 이끌어나가고 끝내는 승리해야 함을 서란은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다음 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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