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블라주라고 들어봤나요? 그 평면·입체 융합미술 하고있어요, 저”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2) 김영대 융합미술작가“양평군립 미술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양평에 오면 예술가들이 달라진다고요. 뭔 말인가 했는데, 제가 8년 전 여기 온 뒤 그리됐어요. 디자인을 공부했고, 평생 회화를 해왔거든요. 양평에 살면서 둘의 융합을 시도한 거죠. 반응이 폭발적이더라고요. 예술가는 늘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두 번째 주인공 김영대(작가명 김령·Soul Kim) 융합미술작가(66·남)의 말이다. 17일 오후 초대기획전 ‘모란꽃 활짝 피다’(5월 2~31일)가 열리는 아신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전시장을 둘러보는 기자에게 “좀 낯설죠”라고 묻고, “유화라는 평면에 부조 입체를 덧붙였다”며 작품 설명을 시작했다.
융합미술이 낯설다고 했더니, 1950년대 모던아트 한 갈래인 ‘아상블라주’(assemblage, 조합예술)를 언급했다. 평면에 입체를 더한 예술로 프랑스 추상표현주의 화가 장 뒤뷔페가 창시했다. 전통적 기법과 표현만으로는 더 이상 미술적 가치를 드러낼 수 없는, 분절과 융합을 거듭하는 디지털시대 미술의 한 단면이란다.
‘모란꽃 활짝피다’ 기획전 2~31일
그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디자인과 미술을 공부하고 평생 작품 활동과 학생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미술학자이자 작가인 그가 회갑 즈음에 양평에 들어와 융합미술을 시도해 미술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 후학(또는 후배)에게 그 정신과 기법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연변대 미술대 한국분원 석좌교수를 2년 전부터 맡고 있어요. 아시겠지만, 코로나19로 수업을 할 수 없었잖아요. 자리만 지키고 실제 교육활동을 못한 것이죠. 엔데믹으로 막 풀리려는 데 한중관계가 꼬이며 좀 불투명하지만, 이겨내 잘 해봐야죠.”
평생 회화를 해왔지만, 출발은 디자인(공업디자인)이라는 남다른 이력의 김 작가. 그의 융합미술 결정판은 화투 6월 그림의 그 모란꽃에서 시작했다. 2018년 강동문화원이 주최한 ‘모란꽃 사상 작가 초대전’ 때 탄생한 것. 그는 평면(유화)과 입체(부조)의 혼합을 시도했다. 인기 최고였다.
4월에 피어 곡우화(穀雨花)로 불리는 모란. 부귀를 상징하며 중국에서는 꽃 중 왕으로 칭송받는다. ‘꽃 중 재상’으로 불리는 작약과 사촌지간. 둘 다 자태가 아름다워 ‘앉으면 모란, 서면 작약’으란 말도 있다. 사람이 꽃에 집착하는 걸 두보는 이렇게 노래한다. “꽃을 죽도록 사랑해서가 아니라 꽃 지면 늙음이 다가오는 게 두려울 뿐.”(詩 ‘강가를 혼자 걸으며 꽃을 찾다’ 중)
그의 미술 열정은 초등학교부터 남달랐다. 1학년 때 엄마 그리기를 했는데, 선생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 중학교에서도 그의 재능은 도드라졌다. 중2 때 그림이 화제가 됐다. 미술부에 반강제 추천됐는데, 그는 거절했다.
“사실 집에서 반대했죠. 미술로 먹고 살기 힘들다며. 미술부 활동을 안 하려고 한 거죠. 그런데 급우들이 막무가내로 추천했어요. 미술부 선배(당시 중고 통합 활동)들이 말을 안 듣는다며 저를 끌고 가 각목으로 패기까지 했어요.”
결국 중2 때부터 자의반 타의반 미술부활동을 시작했다. 대학(홍익대)까지 미술공부로 이어졌다. 문제는 회화를 하고 싶었는데 공예과(성적 문제)에 입학한 것. 집안 반대로 학비를 못타, 그는 화실을 차려 돈을 벌며 공부를 했다.
“꽃 지면 늙음 다가오는 게 두려워”
“회화를 하고 싶었기에 학교 수업은 뒷전이었죠. 결국 3학년 때 학업을 포기하고 화실에만 박혀 살았죠. 84년 서울산업대(이후 서울과학기술대) 공업디자인과(이 학교에 회화과는 없음)에 들어가 졸업했죠.”
석사는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회화)로 땄다. 공업디자인 전공자로 당시 합격한 건 그가 유일했다. 앞서 화실을 운영하던(대학 중퇴) 27살 때 수채화 공모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은 데다 논술 시험을 잘 봤던 게 유효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직업이 좀 안정되나 싶으니 몸이 탈이 났다. 술에 절어 살다, 잠결에 아파 병원에 실려왔는데, 담석에 급성췌장염으로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다. 3주간 금식(링거 맞으며)을 하며 치료를 받았다.
“20일 넘게 병원생활을 했는데, 정신이 버쩍 드는 거예요. 교수가 됐다고 기고만장하며 술병 들고 개똥철학을 설파한 게 얼마나 창피하던 지요. 반성하며 5년 이어오던 교수직을 내던졌죠. 팽개친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했고요.”
그러던 중 중3 아들이 미국 교환학생으로 선발(한 언론사 주관)됐다. 다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던 것. 교수를 그만두고 인기 개인교사로 돈을 좀 벌었지만, 더 필요하게 된 것. 어린이집을 인수하려다 송사에 휘말려 2년을 허비하기도 했다.
다시 반성의 시간. 단전호흡과 낚시, 그리고 축구(경신중고를 다닐 때 축구부가 꿈일 정도로 발재간 좋음, 조기축구 감독 역임) 등을 하며 맘을 다잡고 술과 담배도 끊었다. 강원대 삼척캠퍼스 강사 제의가 들어와 7년을 재직했다. 이어 연변대 미대 한국분교장 제안으로 2020년부터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그가 양평에 들어온 건 2015년. 아들이 양평의 어느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면회 다니며 괜찮다 판단한 것. 옥천면 신복리 한 농가주택을 개조하고 작업실을 지어 8년을 아내와 살고 있다. 아들과 딸은 결혼하고 직장 다니느라 따로 산다.
“양평으로 올 때 양평군립미술관에 근무하던 친구가 말합디다. ‘작가들이 양평에만 오면 바뀐다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의아했는데, 나도 살아보니 그리 되더라고요. 융합미술도 그렇게 탄생했어요. 평범함과 관행을 벗어나려는 시도. 변화의 흐름이었죠.”
“작가들이 양평에 오면 바뀐 다네요”
군립미술관의 2017년과 2020년 초대전에 참여했는데, 국회방송이 취재했고 그의 융합미술 작품을 집중 보도했다. 쟁쟁한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그의 작품에 특히 관심을 쏟았다. 그는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구나 싶어 뿌듯했다고 회고한다.
양평 지역사회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 중 하나가 옥천면 마을벽화 작업. 중미산천문대, 향교, 냉면, 패러글라이딩, 물축제 등을 테마로 한 벽화(공공미술)를 2년간 기획하고 그렸다. 그러면서 느낀 아쉬운 점 하나.
“제가 편가르기를 싫어하는데, 양평에서는 지방정치도 그렇고 문화예술도 편가르기와 세대결이 너무 첨예해요. 심각해 파괴적이라고 할까요. 문화를 비롯해 정책적 발전이 쉽지 않은 거죠.”
인터뷰를 마치고 그가 작업했다는 양평경찰서 벽화를 따라 가봤다. 물축제의 시원함이 풍겨온다. 낡을 마을을 철거하고 새 관광촌을 만들려는 시정에 맞서 벽화그리기(2007년)로 옛마을을 복원하고 여행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통영 동피랑. 그 공공미술의 위력을 양평에서도 느껴본다.
김 작가는 1984년 전국신미술대전 추천작가상(국회부의장), 1985년 한국수채화 공모전 특선, 2019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을 받았다. 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장, 평창동계올림픽 기념 우표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경기미술대전 심사위원장, 한국미협 디자인분과 위원장을 역임했다. 태평양미술가협회장, (사)서울환경미술협회 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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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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