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운하로 사라질 아름다운 자연

[기행] 대운하 건설로 환경생태 훼손될 한강 하구지역을 가다

편집부 | 기사입력 2008/02/09 [00:00]

한반도 운하로 사라질 아름다운 자연

[기행] 대운하 건설로 환경생태 훼손될 한강 하구지역을 가다

편집부 | 입력 : 2008/02/09 [00:00]
▲  한강 하구 장항습지 부근 풀밭에 날아 앉은 재두루미와 큰기러기 옆으로 고라니 한 마리가 한가하게 지나고 있다
1부 : 대운하 출발점 한강하구를 가다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다리를 꼰 재두루미는 고개를 숙여 알곡을 먹고 있었다. V자를 그리며 날아온 큰기러기 떼가 마른 논에 내려 앉았다. 고라니 한 마리가 달려가자 흰뺨검둥오리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지난달 31일 경기 고양시 장항습지. 한강이 서해로 달려가는 길목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신곡수중보에서 서해까지 이어지는 한강하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생태계가 우수한 곳으로 꼽힌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구둑으로 막히지 않은 하구다. 매년 150여마리의 재두루미가 날아들고 큰기러기 6000여마리가 쉬어간다. 재두루미·큰기러기 같은 멸종위기종만 32종, 천연기념물 14종, 조류 108종이 서식한다.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성동습지엔 전세계 개리의 90%가 찾아온다. 유도는 전세계에 1600여마리밖에 남지 않은 저어새의 번식지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에 따르면 이곳의 1㏊는 3980만원의 가치가 있다. 환경부는 2006년 4월 한강하구 일대 6066㏊(1835만평)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  장항습지에 물새들이 떼지어 앉아 먹이를 먹고 있다
 
이곳은 이명박정부가 추진하는 한반도 대운하의 출발점이다. 신곡수중보에서 35.8㎞ 하류에 용강 갑문이 만들어지고 파주화물터미널 등 4개의 터미널이 들어설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대운하로 습지 전체가 사라질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장항습지에서 본 한강은 배가 다니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썰물로 인해 갯벌은 아예 수면 위로 드러나 있었다. 밀물 때는 수심 2~3, 썰물 땐 30㎝에 그친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3가 넘기 때문에 배가 다니려면 수중보를 쌓아야 한다. 수심을 6로 유지하려면 바닥을 파낼 수밖에 없다. 고양환경운동연합 박평수 위원은 강변의 버드나무 군락을 가리켰다.

“물이 들어오는 곳까지 버드나무 뿌리가 뻗어 있습니다. 준설로 습지의 물이 빠져나가면 말라 죽습니다. 이 아래 구멍을 파고 유기물을 먹고 사는 말똥게도 모두 사라집니다. 생태계가 끝장나는 것이죠.”

“새들도 위험에 처한다. 수위가 높아져 새들의 서식처인 갯벌이 물에 잠기기 때문이다. 한국환경생태연구소 이기섭 박사는 “해마다 찾아오던 10여만마리의 새들이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은 한강하구만큼은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관련 시민단체들의 모임인 한강하구전략회의는 대운하 대책위를 별도로 꾸릴 계획이다.

한동욱 PGA습지생태연구소장은 “대운하가 건설되면 한강 하구는 100% 끝장난다”며 “기존 개발 사업과는 비교가 안 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사생결단이라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2부 : 대운하 불가 기행

‘한국작가회의’, 현실주의 작가네트워크인 ‘리얼리스트 100’, 문화연대는 한반도 운하 예정지를 답사하며 훼손 우려에 처한 이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시와 산문에 담기로 했다. 이 답사에 참여한 작가들은 운하 건설의 폐해와 환경·문화의 훼손을 알려내고자 하며 지난 1월 23일 출정식을 가진 바 있다. 작가들은 강 주변을 답사하며 운하 예정지의 문화와 자연, 사람들의 이야기를 르포 형식으로 풀어낼 계획이다.

참여 작가는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면서 현실주의 작가 네트워크 ‘리얼리스트 100’ 의 회원인 김하돈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 작가를 중심으로 소설가 안재성(<장편소설 파업>, <경성트로이카>, <이현상 평전>), 소설가 윤동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 소설가 이인휘 (<활화산>, <내생의 적들>, <날개달린 물고기>), 시인 박일환(<시집 푸른 삼각뿔>), 시인 문동만 등이다. <인터넷 한겨레>는 이들 작가의 답사기와 사진을 싣는다. [편집자주]

 
장강이 닻을 내린다.

저 아스라한 백두대간의 기슭마다, 또는 크고 작은 정맥 봉우리의 계곡마다 작은 물방울 몇몇이 서로 살을 섞어 맨 처음 수줍고 앙증맞은 첫걸음을 떼던, 그 아름답고 황홀한 강물 한 줄기가 마침내 천릿길 대장정의 닻을 내린다. 길고 짧은 인간의 한 생애가 그렇듯 지난날들 돌아보면 저마다 애틋하고 눈물겹지 않은가. 그리하여 마침내, 그 시작과 삶의 날들은 비록 수천 갈래였으나 종당에는 저렇게 남김없이 한 몸이 되고 마는 것이다. 큰물이 작은 물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깨끗한 물이 더러운 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남쪽 아래로는 충청북도 속리산 천왕봉 기슭에서 거슬러온 물줄기도 있고, 북쪽으로는 함경남도 덕원군 땅인 마식령이나 아호비령(임진강 발원지) 자락에서 내려온 물줄기도 있다. 그 가운데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하여 가장 먼 길을 달려온 물줄기는 497.5km, 물경 1,240리 길을 흘러왔다. 달려온 길의 길고 짧음이야 또 무에 그리 대수겠는가. 금강산 아래 무산에서 흘러온 물도,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월악산에서 흘러온 물도 거대한 외줄기 장강이 되어 바투 바다에 몸을 섞는 것을. 화엄경에 이르면 여타의 모든 경전들이 다 부질없으므로 그저 화엄대해(華嚴大海)라 부르듯, 한반도 중부지방의 여울이란 여울은 죄다 이곳에 모여 다만 조강이란 이름으로 바다에 든다.

여기는 대한민국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

 
한남정맥의 종착역, 김포 문수산


바다가 가까워지면 땅의 존속들은 슬슬 채비를 걷고 행차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땅에서도 물이 산을 만나면 이내 돌아서고 산이 물을 만나면 금세 산이기를 접지 않았던가. 하물며 바다 앞에 이르러서야 산이든 물이든 이제 강산의 섭리와 추억을 거두어들이고 육지 존속으로서의 마지막 숨결을 가다듬는다.

한강의 남쪽 울타리, 그 한남정맥의 시작은 속리산 천왕봉이다. 예부터 천왕봉의 물을 삼파수(三派水)라 불렀다. 천왕봉 꼭대기에 내리는 빗물이 동남으로는 낙동강, 남서로는 금강, 북서로는 한강이 되어 갈라지기 때문이다. 이곳의 물을 들먹이는 옛글에 흔히 보이는 삼타수(三陀水)란 명칭은 다만 삼파수가 절집의 입맛에 맞게 비틀린 말이다. 기왕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하자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으레 이곳을 천황봉이라 불렀다. 나라 산천의 이름이 대부분 불교에서 왔으니 불교에는 없는 말이 바로 천황이므로 모두 천왕봉이 옳다. 누구의 짓인 줄이야 따질 필요도 없겠지만 영암 월출산 천황봉을 비롯하여 함양의 천황산, 통영 앞바다 사량도의 봉우리까지 아직도 천황봉이라 부르는 이름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각설하고,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강과 금강을 가르며 뻗어나가는 한남금북정맥은 말티고개를 지나 청주의 산성고개, 음성의 행치고개를 거쳐 안성 칠현산에 닿으면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금북정맥은 금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어 공주 차령을 거쳐 태안의 안흥에서 막을 내리고, 한남정맥은 그로부터 수원의 광교산과 안양의 수리산을 거쳐 김포 문수산(해발376)까지 이어지며 한강의 남쪽 울타리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한다.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도시든 김포 들판이든, 천왕봉에서 문수산에 이르는 한남정맥 산줄기는 그렇게 한 틈의 오차도 없이 외줄기로 이어지며 끊이지 않는다.

육지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마치 강물처럼 흐르는 바다를 예부터 염하(鹽河)라 하였다. 바다이되 강을 닮았으니 참으로 맞춤한 이름이다. 중국 사람들은 민물의 이름을 크기에 따라 천(川), 강(江), 하(河)로 나누어 불렀다. 중국의 황하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종종 우리나라엔 하(河)가 없다 하지만, 분명 이곳 염하는 우리 선인들의 인문학 수준을 보여주는 절묘한 강이면서 바다이다.

강화대교에서 염하를 따라 두어 마장 거스르면 문수산성 들목이다. 문수산성은 바다 건너 갑곶진의 돈대와 더불어 염하의 길목을 지키는 요충이었다. 멀리는 대몽항쟁의 이야기가 남아있고, 가깝게는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산성의 문루에 올라 염하를 바라보면 한성의 들목을 지키던 군장들의 함성이 여태 쟁쟁하다. 문수산성에서 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완고하게 늘어선 철책과 나란히 두어 마장쯤 더 들어서면 민통선 마을 보구곶리(甫口串里)가 나오고, 마을이 끝나는가 싶으면 바리게이트와 함께 군인들이 길을 막는다. 바리게이트 뒤편의 야트막한 구릉을 넘으면 지호지간에 한강의 법정하구선인 머머리섬(유도,留島)이 떠 있지만 사정을 해 본들 군인들이 길을 열어줄리 만무다. 대설주의보의 눈보라에 묻혀 산발치 아래로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도 바다도 이내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때때로 서로 난감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면 그쯤에서 냉큼 접는 게 상책이다. 그렇다고 낙심천만하여 천근만근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설 필요도 없다. 세상 어디든 길은 또 있기 마련이니….

 
한강하구 최고의 전망대, 애기봉(愛妓峰)


보구곶리에서 문수산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강변을 향해 방향을 바꾸면 거기 육지의 것들과 바다의 것들이 서로 현묘한 경계를 이루고, 하늘과 땅이 또한 보여줄 수 있는 장엄진경을 한껏 펼쳐내어 망연히 시간을 잊고 서게 하는 전망대가 하나 있다. 바다와 뭍이 그만하고 하늘과 땅이 그러하므로 인간이 철책선 몇 겹으로 가로막은 남녘과 북녘의 경계마저도 다만 속절없이 부질없다. 1.5km. 딱 그만큼 덧없는 시공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남한이라 부르고 또 북한이라 부르는 지구상에 하나 남은 분단국의 휴전선이 강심에 걸려있다. 그런 것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제일 큰 지류 임진강을 맞아들인 한강이 조강이 되어 강화바다와 주고받는 점입가경의 통과의례가 참 눈물겨우면서도 가슴 시리도록 웅장하고 또 황홀하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강 건너는 지금은 개성직할시 판문군이 된 옛 개풍군 땅이다. 고려도읍 송도의 진산 송악산(해발489)을 경계로 북쪽이 개성이요 그 남쪽이 바로 개풍군이다. 고려의 첫 임금 태조와 마지막 임금 공민왕의 능(陵)이 나란히 그곳에 있고, 조선건국을 반대했던 고려 72현이 들어가 숨어 살았던 두문동은 개풍군 광덕면이다. 조선시대에는 그곳을 해풍군 또는 풍덕군이라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힌 당시 인구는 792호에 1381명이다.

날이 좋다면 송악산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이지만 눈이 머츰한 사이에도 가물거려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니, 강물 한 가운데 그어놓았다는 휴전선은 통 보이질 않으나 분명 아직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휴전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아스라이 오두산 전망대가 보이고, 임진강과 한강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으르렁대는 전류(轉流)의 물결이 한 눈에 들어온다. 큰물이 서로 몸을 섞으며 달아오른 기꺼움을 주체할 수 없으니 그 물살이 일으키는 격정의 회오리를 예부터 전류라 불렀다. 김포 전류리 마을은 이에 얻은 이름이며 강가엔 전류정(顚流亭)이 있었다.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강의 종착역 보구곶리 머머리섬이 마침내 표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보구곶리에서 구태여 군인들에게 통사정을 하거나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바로 이곳 애기봉의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조강의 물길이 머머리섬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돌면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염하 물길이며, 곧장 나아가면 오른쪽에서 흘러드는 예성강 하구의 물과 섞여 바야흐로 대해를 바라보게 되니 큰 바다로 나가는 대하를 마지막으로 가로막고 있는 섬이 바로 교동도다. 설령 날이 좋더라도 교동도까지 보일 리는 없지만 예성강이 돌아 나오는 북녘 땅 개풍군 끄트머리가 아득히 펼쳐진다.

애기봉 전망대에서 자리를 뜰 즈음에는, 왼쪽 아래편으로 강 건너에 이르는 물길을 한 번쯤 눈여겨 보아두는 것도 괜찮다. 그 물길이 바로 저 유명한 조강도(祖江渡), 조강나루이다. 일찍이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가 나루를 건너면서 부(賦)를 지었다. “여러 물이 한데 모여 급히 흐르니 솥 안에 끓는 물이 용솟음치는 듯하네. 이무기와 악어가 입 벌리고 침 흘리는지, 독룡이 숨어 엿보는지 알 수 없구나. 그저 빨리 건너고만 싶은데 배는 가는 듯 멈추어 섰네. 해도 지지 않았는데 사방은 어둡고 바람 불지 않는데 파도 거칠구나.”

분단의 슬픔 마주 손짓하는 조강나루

애기봉에서 나오는 길에는 김종직(1431-1492)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스물여덟의 나이로 죽고, 갑자사화 때 다시 부관참시의 거듭 죽임을 당한 사림의 풍운아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의 묘와 사당이 있다. 부패한 권력의 시대를 사상과 담론의 시대로 옮기고자 했던 조선의 초기 사림이 굴절되는 수난기에 거푸 참혹을 당한 그의 생애를 위해 한번쯤 들러보는 일도 괜찮을 성 싶고, 또 그가 생전에 지었다는 「다부(茶賻)」는 차를 즐기는 이들이 저 초의선사(1786-1866)의 「동다송(東茶頌)」에 견주는 것이니 이를 한번 음미해도 좋으리라.

한재당에서 월곶면 소재지나 하성면 소재지로 통하는 큰길로 나왔다가 다시 그 두 길을 모두 버리고 강변을 향해 막다른 길을 선택하면 옛 나루 마을 조강리가 나온다. 분단과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강리는 해운과 수운으로 번성했던 옛 영화를 말끔히 잃고 역사 속의 가장 후미진 뒤안길에서 지난 반세기를 보냈다. 조강물참을 기다리던 외국의 상선이나 세곡선이 이물과 고물을 서로 맞대어 잇고 장사진을 치던 나루. 그 한강과 서해바다 뱃길의 역사 역시 분단과 함께 기꺼이 막을 내렸다.

서해안을 따라 경강으로 드는 배는 물살 거칠기로 유명한 염하를 거슬러 올라와 다시 조강나루에서 물참(물때, 만조)을 기다려야만 했다. 조강의 조수는 밀물이 8시간을 들고 썰물이 4시간을 난다. 거센 기세로 밀어닥치는 밀물의 파장은 경강의 서빙고까지 미쳤다. 일찍이 조강 여울의 위용을 몸소 겪은 바 있는 이규보는 이 조강물참을 아예 시로 지어 남겼으며, 토정 이지함은 물참을 노랫말로 만들어 드나드는 사공들이 불렀다고 한다.

눈 속에 묻힌 조강리는 여느 산촌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한적한 강촌이었다. 강마을이되 강이 보이지 않으니 그런 줄만 여기고, 민통선 마을이되 철책이나 병사들이 보이질 않으니 또한 그런 줄만 여기면서 마을을 돌아다녔으나 좀체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강변에 둑을 쌓아 만든 조강저수지가 있는 마을 끝에 이르니 비로소 거기 바리게이트와 함께 병사들이 길을 막는다.

조강리는 분단으로 끊어진 강 건너 북녘에도 있다. 나루까지는 내려가지 못한다 해도 조강리 철책선 너머에서 강 건너 개풍군의 윗조강리와 아랫조강리를 건너다 볼 수 있을까 하였으나 역시 꿈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경부운하의 한강하구 첫 번째 터미널예정지로 조강리가 거론되고 난 뒤 마치 폭풍과도 같은 부동산 바람이 지나갔다고 한다. 나는 눈보라 속에 붉은 바탕색 선연했던 민통선의 ‘검문중’ 표시판을 떠올렸다. 통일부마저 없어진다는 마당에, 휴전선으로 강물이 막히고 민통선 철책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이 최전방 마을에 뜬금없이 운하와 터미널을 운운하며 맨 먼저 투기광풍부터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냉혹한 현실이다. 반세기 넘게 분단선으로 고립되어 팍팍한 삶을 살았던 민통선마을 사람들에겐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외지인들로 하여금 동네 민심이 흉흉해지는 일 자체가 이미 재앙이다. 사람의 생리로 전답과 집값이 오르는 일이야 불감청고소원이겠지만, 돈 몇 푼 받고 떠날 사람은 떠나고, 손에 쥔 거 없어도 고향에 남겠다던 이들이 끝내 휘황해진 고향 풍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삶을 그르치는 풍경은 이 나라 땅에 이미 부지기수이다.

아, 조강리의 운명은 어찌 되려는가?

조만간 조강나루에 다리를 놓고 4차선 도로를 북녘으로 통하게 하려는 계획이 이미 추진 중인 모양이다. 경강의 물길과 서해안의 뱃길이 물류든 아니면 유람뱃길이든 다소나마 복원된다면 이 조강나루 뱃길의 역할도 어느 정도 살아날 것이다. 또한 배로 건너던 조강나루를 다리로 건너면서 옛 교통의 길목이 누리던 영화를 다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이라면 휴전선을 걷어내고 물길을 복원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와야 한다. 그러나 다만, 그 어떤 가정과 상상을 동원한다 해도 조강나루와 경부운하는 결코 연결되지 않는다. 대체 어느 미친 사공이 조강나루에서 내륙으로 배를 몰아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 부산으로 가겠는가? 아니 그러한 물길이 이 땅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경강이나 서해안 물길에 훤한 뱃사공들이 인정이나 하겠는가?

조강리를 이미 몇 차례나 휩쓸고 지나갔다는, 경부운하 첫 번째 터미널이란 이름으로 몰아닥친 부동산투기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지난 천년 세월 동안 조강나루를 건너다닌 숱한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글을 남겼다. 그 가운데 단연 절창으로 꼽을 만한 것이 고려 시인 백원항(白元恒, 생몰미상)의 시다. 천년 세월이 사이에 걸렸지만 예나지금이나 나라와 세상일을 걱정하는 시름은 변함없이 조강나루를 적신다.

나룻배 떠나려니 밀물이 가로막아(小舟當發晩潮催)

강가에 말을 매고 홀로 쓴웃음 짓네(駐馬臨江獨冷?)

언덕 저편 세상일은 언제 끝나려는지(岸上世情何日了)

앞사람 건너기 전 뒷사람이 또 왔네(前人未渡後人來)

조강이여 지금처럼, 아니 옛날처럼

철책과 나란히 달리는 김포 제방도로를 지나 새로 놓인 일산대교로 한강을 건넜다. 자유로에 실려 파주출판단지를 지날 즈음 전에는 보지 못했던 개성과 평양을 알리는 이정표가 머리 위로 스쳐지나갔다. 그래 모두 예서 얼마 되지 않는 곳들이지. 이 길로 대통령이 승용차를 타고 그곳을 다녀왔으니 이젠 그런 이정표가 길가에 걸려도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 운전을 하면서 왼편으로 힐끗 쳐다보니 서울을 천천히 빠져나온 한강이 바투 오두산의 합강(合江)을 앞에 두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었다. 저 철책선만 좀 걷어내도 좋으련만.

아니다. 지금 같아서는 저 철책선이 그래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누구라도 한강하구나 조강나루의 애기봉에 올라본 사람이라면 한강이야말로 정녕 얼마나 위대한 강인 줄을 사무치게 절감한다. 세상의 그 어떤 도시보다 축복받은 도시가 서울인 것을, 그 어느 도시의 강물보다 아름답고 웅혼한 강이 바로 한강인 것을 온몸으로 전율처럼 느낀다. 그 한강하구는 참 슬프게도 조국의 가장 큰 생채기로 말미암아 그래도 본래 모습을 지켰다. 이로부터 나라 산천에 걸린 숱한 강변마다 사람들이 들어서고 개발이 밀려가 강의 속살이나 은밀한 지경까지 거덜을 내놓은 것을 떠올리면, 통한의 분단선이 그래도 이곳을 철책 안에 가두어 저리도 곱게 품어두었던 심사를 알 것도 같다.

사람들은 왜 강이 온전해야 비로소 나도 온전하다는 간단한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내 이웃이 살인을 즐긴다면 내가 곧 그의 목표가 되듯이, 내가 살아가는 산과 물이 생명을 버리고 살기를 품는다면 그 살기의 대상이 곧 나임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 이 땅, 어머니 대지가 품어 안은 인간 이외의 뭇 생명들은 인간에 대한 복수로 하나씩 스스로 혀를 깨물어 멸종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그들이 전부 사라지고 난 다음 인간만이 난무하는 이 문명의 지상낙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오두산 전망대!

북녘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이곳에 이르러 제 이름을 버리고 한강이 된다. 그 장쾌하고 늠름한 이름이 너무 아까워 한강의 지류임에도 옛 사람들은 임진을 독립된 강으로 대접했다. 그리하여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 오두산 앞에서부터 한강이 끝나는 머머리섬까지를 조강이라 불렀던 것이다. 조강 할아비의 두 아들이 임진강과 한강이며, 임진강의 지류 한탄강이나, 한강의 두 갈래 남한강과 북한강은 손자 강이다. 북한강의 소양강이나 남한강의 동강과 서강은 증손자 강이 되는 셈이니, 산천이 무릇 말이 없다 하여도 사람이나 매 한가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모셨던 까닭이다.

한 여름에도 반소매 옷은 소름이 돋는 곳이니 눈보라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의 오두산 전망대는 담배 한 대 참을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되우 추웠다. 그래도 오래 오래 버티고 서서 나는 한강이며 임진강이며 조강을 번갈아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조상들의 삶의 내력이 마치 저 용비봉무의 장강 물결처럼 수 천 년을 이어 온 것을, 큰 산을 보마고 히말라야를 갈 일이 무엇이고 큰물을 보마고 황하 요하를 넘볼 일이 무엇이겠는가. 무릇 이 나라 산천의 기백과 정신이 백두대간과 그 품안에 깃든 크고 작은 강줄기에 현묘하게 어리고 서렸으니, 다니면서 보라! 저 지혜로운 이들이 진즉 어느 곳에 나라를 세우고 어느 곳에 삶터를 만들었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가슴 벅찬 이야기 속에 지금 우리가 들어앉아 펄럭이며 나부끼고 있는지. 다시 그리하여, 부디 산과 강을 그대로 두시라! 이 강산 아직은 죽지 않았으니...


3부 : 독일인은 ‘라인강의 기적’을 모른다 왜? 

글을 쓴 임혜지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10대때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 칼스루헤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건축학 박사다. 현재 뮌헨에서 살고 있는 임씨는 그동안 건축과 관련한 서적을 독일 유명출판사에서 펴냈고 또 다른 책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임씨는 그동안 <인터넷한겨레> ‘코리안네트워크’에 ‘독일의 건축과 환경, 역사’에 관한 글을 써 왔다. 이 글은 임씨가 자신의 블로그(http://www.hanamana.de/hana)에도 실었다. 편집자 


명색이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공학박사인 나는 운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내가 토목공학을 공부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구나 오랜 세월을 바쳐 한 우물을 판 특정 테마에서만 전문가일 뿐, 교량전문가라도 하루아침에 운하전문가로 둔갑할 수는 없다.

그간 우리나라의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뭔가 의견을 보태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서 못하는 처지가 미안했다. 문득, 그나마 내가 독일어는 좀 하니 독일의 선례에 대한 정보라도 보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 대운하의 모델이 된다는 독일의 수로교통에 대한 왜곡된 정보라도 바로잡아드린다면 국민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국민을 상식적으로 납득시킬 수 없는 사업은 헛점이 있는 사업이므로 수정, 보완되던지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의 전문지식은 일반상식의 범주를 뛰어넘어야 하지만, 그 전문지식을 이용해서 실행하려는 사업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꾼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주인도 어리석은 주인이고, 일꾼을 뽑았는지 상전을 뽑았는지 잊어버리고 맹종하여 상식적인 판단마저 유보하는 주인도 어리석은 주인이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주인의 몫으로 돌아온다. 일꾼이야 나중에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만이지만 주인은 그 손해의 후유증을 대물림하며 감수해야 한다.

나 역시 친정나라의 주인 노릇을 잘하고자 독일의 뱃길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상식에 기초하여 넓은 범위에서 시작한 조사의 반경이 어느덧 라인강으로 좁혀졌다. 당연한 일이다. 남쪽의 알프스에서 솟아나와 전국토를 가르며 북해까지 이어지는 라인강은 독일에서 수로를 이용한 총물동량의 80퍼센트를 소화하고 유럽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수로이고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즉, 독일 수로교통의 대명사이다.

그런 사실 이외에도 라인강으로 귀결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라인강이 일급 수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천혜의 결과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이의 오랜 투쟁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즉, 생땅을 파고 물길을 새로 만든 마인-도나우 운하 뿐만 아니라 라인강 자체도 인간이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변형시킨 것이다. 차기정부에서 추진하려는 한반도 대운하의 적절한 모델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운하의 공사에는 낙동강과 한강에 배가 다닐 수 있도록 강바닥을 파고 물길을 다듬는 수술이 포함되는 사실을 볼 때, 독일 라인강의 예는 여러모로 우리에게 이로운 임상실험이 되겠다. 독일인들이 몇 백년의 세월을 두고 벌인 수로사업의 경과와 결과를 관찰하여 활용한다면 우리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운하 전반에 대해 넓게 조사하던 나의 초점이 라인강으로 좁혀진 데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예전에 나는 라인강을 뱃길로 만드는 공사와 그 영향에 대한 조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적이 있다. 운하를 건설하는 일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좀 알아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찾다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도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반적으로 운하 건설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주력하기로 했다. 나의 좁은 지식 하나만으론 이 세상에서 이룩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지식의 범위가 좁더라도 자기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정보사회를 따라갈 수 있는 연구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오늘은 라인강에 대한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얘기로서 물꼬를 트기로 한다.

30여년 전에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나는 라인강 주변 도시에 살았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라인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라인강 중류의 강변 산책로는 홍수가 나면 가끔 물에 잠겼다. 첫 데이트도 라인강변에서 했고 고등학교 졸업파티도 라인강변의 잔디밭에서 했다. 그때 깜깜한 밤에 수면에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을 보며 곧 헤어질 친구들과 밤새도록 도란도란 대화하던 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내가 대학을 다닌 도시 칼스루에도 라인강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간 곳에 강을 끼고 있었다. 나는 토지이용계획을 설계하느라고 라인강 유역의 갈대밭 지역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갈색으로 유장하게 흐르는 라인강 근처에는 옛 라인강의 팔(Altrheinarm)이라 불리는 라인강의 본래 물길이 무성하게 서걱이던 갈대밭 사이에 얌전하게 고여 있었다.

이렇듯 개인적으로 나에게 친근한 라인강은 한국에서도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로 친근한 단어이다. 그런데 정작 독일인들은 라인강의 기적이 무슨 소린지 모른다. 몇 년 전에 내가 남편에게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을 했을 때 그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내 남편이 가진 상식의 범위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러려니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둘 다 고등학교 고학년이니 그간 역사나 지리시간에 배운 것이 아직 머리에 남아 있을 것이고 일반상식도 웬만한 어른 수준은 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질문을 통해서 남편만 모른다는 내 고정관념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웬걸? 아들의 대답은 한 마디로 모른다였다. 음, 아들은 남편을 닮았으니까. 나는 희망에 찬 눈초리를 딸에게로 돌렸다. 딸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반색을 했다.

“아, 라인강의 기적? 이차대전 직후에 있었던 라인강의 기적 말이지?”

오오, 역시! 그럼 그렇지! 내 입이 벙긋 벌어졌다.

“독일 축구팀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긴 그 사건 말이지?”

내 얼굴에서 만족한 미소가 퍼지다 말고 딱 정지하는 순간 아들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에이, 그건 베른의 기적이지.”

“응, 그렇구나. 헤헤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봉착한 나는 저녁을 먹다 말고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로 구글을 두드렸다. ‘기적, 라인강’ 이렇게 두 단어를 치니 몇 페이지나 주르르 떴다.

연어가 라인강에 다시 서식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제목도 있고, 금발의 클라우디아 쉬퍼가 독일의 브리짓 바르도라나 뭐라나 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제목을 붙인 걸 보니 아마도 그의 고향이 라인강변에 위치한 모양이었다. 암만 눈을 씼고 보아도 내가 생각하는 라인강의 기적은 없었다.

나는 키워드를 라인강의 경제 기적 이라고 쳐보았다. 그나마 쓸만한 제목을 서너 개 발견했는데 전부 따옴표를 입고 ‘한강의 경제 기적’이란 말과 나란히 붙어 있는 걸로 보아 한국의 언어문화에서 파생한 표현이었다. 독일엔 그런 표현이 없다니, 그러면 라인강과 독일의 경제 기적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단 말인가?

‘라인강의 기적’이란 두 단어로서 라인강이 독일의 산업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표현하는 간결한 서론으로 시작해서, 곧장 라인강의 역사에 대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글을 구상한 나는 난감했다. 독일에 그런 표현이 없다면 서론으로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이제는 라인강이 전후의 독일 산업에 정말로 중요한 존재인지부터 제대로 조사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이럴 때는 뭔가 내가 바라는 대답이 있다는 걸 잘 아는 식구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어깃장을 놓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이차대전 직후 독일의 눈부신 경제 부흥은 라인강을 운송수단으로 하는 공업 발전의 덕택이라고 알고 있거든. 너희들은 학교에서 뭐라고 배웠어?”

아들은 19세기 말엽부터 눈부시게 발전한 독일의 공업기술이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전후에 부활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라인강이 주요 운송수단이었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경제 기적의 원산지인 루르 공업지대의 장점은 주요 산업과 에너지원인 탄전이 집결해 있다는 점인데, 그런 상황에서 교통망이 성공의 열쇠로 일컬어질 만큼 그렇게 큰 비중을 가졌겠느냐, 설령 그랬더라도 그것이 비단 수로교통, 그것도 라인강 뿐이었겠느냐고 했다. 가족들은 각자 알고 있는 토막지식을 이용하여 상식적으로 논리를 폈다. 딸은 엄마의 기억력이 흐려진 건 아닌지, 엄마가 공부시간에 딴 생각하느라고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글쎄, 네가 그렇게 물으니까 나도 자신이 없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런데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은 어디서 나왔지? 그때는 한국과 독일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적었으까 아마도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딸이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엄마, 그럴지도 몰라. 요즘 영어 시간에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을 읽는데 거기서 독일에 대한 비유에 라인강이 나왔어. 미국에선 라인강이 독일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어. 그러니까 독일의 기적이라는 말 대신에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걸지도 모르지.”

음, 그렇다면 라인강은 독일의 경제기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말인가? 요즘 한반도 대운하를 라인강의 기적에 비유하는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내가 착각했나?

“이차대전 직후 독일의 주요 운송수단은 뭐였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선박이 아니었을까? 도로도 철로도 폭격 당했으니 남는 건 강밖에 없지 않았을까?”

가족들은 내가 끝까지 라인강에 집착하는 것이 우스운지 능글능글 놀리기나 하고 대답에 성의가 없었다. 이 사람들아, 다 구상해 놓은 글이 처음부터 어긋나게 생겼는데 미련이 없을 수가 있나? 그러나 단순히 글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믿어온 진실, 그것도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믿어온 진실을 뒤집는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한 일인가?

나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구글에서 검색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독일의 브리짓 바르도 운운에서 가족들은 박장대소했다. 라인강의 경제기적과 한강의 경제기적을 비유하는 검색 결과에 대해 얘기하니 남편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20여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갔을 때 한국에선 경제가 침체된다고 난리였어. 그 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두 자리 숫자였어. 독일에서 경제기적을 이루었던 시기에 성장률이 평균 5%였던 거랑 비교해 봐. 그렇게 찬란한 성장을 그렇게 오래 지속적으로 이룬 나라는 지구상에서 아마 한국이 유일할 거야. 그런 경우는 앞으로도 없을 거야.”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나라에서 앞날을 보고 줄기차게 나가야지 왜 자꾸 뒤돌아 보냐고? 소위 라인강의 기적이 언제적이야긴데 그래? 왜 라인강이랑 한강을 묶어? 내가 한강이라면 억울하겠다. 고속성장은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야. 개발도상국을 벗어나서 성장의 한계의 반열에 들었음을 깨닫고 거기에 적응하고 대처해야지. 이제는 성장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성장하지 않고 잘 살 궁리를 해야지. 독일은 지난 30년 동안 호황기에도 성장률 2% 대를 넘은 적이 없어(3% 미만이라는 뜻). 그래도 평온하게 잘 살고 있잖아? 전후 독일의 경제 기적 수준인 5%로 성장하면서 살기 힘들다고 느끼는 나라는 어딘가 잘못된 거야. 그것부터 고치지 않으면 더 성장해도 나아지지 않아.”

우리나라 차기 정부에서 추구하는 경제성장률이 7퍼센트라는 말이 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7%를 고집할 게 아니라 5%로도, 아니 독일처럼 2퍼센트의 성장률만 가지고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이 시점의 정답은 아닐까? 쌀이 어디론가 솔솔 새는 밑빠진 독에 7%가 아니라 14%의 속도로 퍼부어도 독 안은 여전히 허전할 것이고, 국민은 일꾼이 무능하다고 여전히 타박할 것이다.

그러나 독 밑에 난 구멍을 막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간 그 구멍으로 새는 쌀로 재미를 보아온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경유착의 주인공 몇 명이 아니라 이 나라 중산층 이상을 형성하는 다수의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일해도 먹고 살기 어려울 정도밖에 돈을 못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는 노력 이상으로 편안하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한 쌀독 안에 존재한다는 소리다.

게으르고 무능력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분배하는 건 비생산적 모델이지만,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일터를 만드는 것은 쌀이 새지 못하게 쌀독의 구멍을 막음으로써 쌀독이 점점 차오르도록 하는, 지극히 생산적 모델이다. 생산적인 모델의 수혜자는 쌀알을 빼앗길까 염려했던 중산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다. 그리고 밑으로 새는 구멍을 막아서 안정된 무게를 유지하는 쌀독은 위에서 새로 떨어지는 쌀알 몇 톨에 흔들리지 않는다. 쌀독 안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룩한 주인은 구멍을 막아준 일꾼에게 쌀알 몇 톨이 늘었네 줄었네 수치로 들먹이며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에서 시작한 대화가 쌀독에 이른 후 우리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늦게까지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차대전 직후에는 라인강도 별로 쓸모가 없었다. 미국 영화 <레마겐의 다리>로 유명해진 루덴도르프 다리 하나만 빼놓고 라인강의 모든 다리들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그리고 추격하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한 독일군의 폭격으로 강물에 내려앉아 수로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직후의 복구사업 기간에 내륙수로교통이 전체 운송물량의 몇 %를 담당했는지 나는 확실히 알아낼 수 없었다. 30~40%란 주장이 있기는 한데, 출처를 명시하지 않아서 불안하긴 하지만 대략 맞는 말일 것이다. 독일연방 수로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경제부흥이 한창이던 1960년에 독일 전체 운송물량의 3분의 1을 수로교통이 담당했다. 그리고 이 그래프에 의하면 독일의 내륙수로를 통과한 물량(초록색)은 1960년 이후로 거의 증가하지 않아서 1998년에 독일 전체 물량 3800억 톤킬로미터(tkm)의 13%인 500억 톤킬로미터(tkm)를 기록했다.

역시 독일연방 수로국의 통계자료인 다른 그래프에는 1991년부터 2003년까지 각 운송수단의 비율이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내륙수로를 이용한 화물운송의 비율은 전체의 14퍼센트가 안 되는 수준에서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2006년의 내륙수로 비율은 12%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보만 나열하려던 글이 라인강의 기적에 막혀 첫 문장부터 흔들렸다. 큰 가지만 밟으며 확확 건너뛰지 못하고 잔가지부터 꿰맞추고 있으니 나도 출세하긴 틀렸다. 카리스마 꽝이다. 하지만 큰 가지만 밟으며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넘쳐나는 오늘날엔 나처럼 잔가지 하나씩만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더 유익한 인적자원이라는 자부심에 넘쳐서 애초에 한 줄로 계획했던 서론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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