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은 제게 미래와 소통하는 언어, 불확실하고 불행한 사회 조롱하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5) 정찬우 조각가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23/08/09 [11:05]

“조각은 제게 미래와 소통하는 언어, 불확실하고 불행한 사회 조롱하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5) 정찬우 조각가

최방식 기자 | 입력 : 2023/08/09 [11:05]

“어릴 적 찰흙을 조몰락거리며 무언가 만들곤 했죠. 공부 열심히 해 대학 가라는 강요에 분노하며 자랑하려고 공부하는 게 싫어질 쯤 미술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렇게 시작한 예술이 이제 제 삶이 됐네요. 불확실한 인생, 행복을 찾을 길 없는 현실, 좌절하는 나와 사회를 묘사하죠. 현실을 조롱하는 도구, 조각은 저에게 미래와 소통하는 언어죠.”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다섯 번째 주인공 정찬우 조각가(44·남)의 말이다. 9일 저녁 여주시 보통리 공방에서 만난 그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미술대전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훌쩍 커버린 중견 조각가가 됐지만 ‘미래를 사유’(백남준 말)하는 작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작업실을 들어서자마자 큰 창고(애초 제재소) 한가득 조형물이다. 몇 년째 작업 중인 테마 작품 ‘대가리 박아’다. 만취에서 깨어나 굴러다니는 소주병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게 시작이었다. 성냥개비로 페트병으로, 이젠 쇠붙이로 연작을 이어지고 있다.

 

“왠지 잘못한 듯 하고 뭔가 부족한 듯해 기합(얼차려) 받는 감성이죠. 2017년 개인전 때 제 옷을 입힌 조형물로 전시했는데, 큰 관심을 끌었죠. ‘저 사람 왜 계속 저러고 있냐’는 등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었죠. 10미터짜리 테마작품을 구상해 여태 제작하고 있습니다.”

 

▲ 정찬우 조각가.  © 최방식


‘대가리 박아’ 풍자 연작 수년째 작업중

 

‘대가리 박아’ 테마작품은 그의 ‘인생작’이 될까? 작업실 귀퉁이 하얀 칠판에 조그마케 끄적인 ‘베니스 비엔날레’가 눈에 들어온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겸연쩍어 하며 조각가라면 선망하는 전시회란다. 초대작가의 꿈. 테마작이 공개되는 날 그 꿈을 이룰까?

 

절망과 불안을 묘사했지만 카타르시스가 있는 작품. 노르웨이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 뭉크가 피오르드 해안 한 가운데 그려넣은 ‘절규’가 떠오른다. 불안한 존재를 고민하던 어느 날 해질녘 암청색 도시에 울려퍼진 커다란 비명을 그는 슬프게도 그렸다. ‘슬픈 음악’의 대명사라는 비탈리(이탈리아)의 ‘샤콘느’(G단조, 18세기 초)를 들으며 완성하지 않았을까.

 

조각가가 된 계기를 궁금해 하자,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찰흙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만들던 기억. 남편을 먼저 보내고(교통사고) 홀로 농사지으며 아들딸을 키운 여인(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에 열중했던 중고시절. 열심히 하면 돈 잘 벌고 예쁜 아내도 얻을 수 있다던 어릴적 만화 내용까지.

 

“중3 담임이 창원기계공고를 추천해 입학했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2학년 땐 전교 10위권에 들 정도였죠. 근데, 엄마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공부가 싫어졌어요. 그 때 미술이 눈에 들어온 거죠. 자동차 디자인을 배우러 컴퓨터그래픽 학원에 갔는데 형님들이 고흐·고갱 논쟁을 벌이는 데 정말 멋있어 보였거든요.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 줄 알았어요.”

 

미술을 하려면 미술대학에 가는 게 좋다는 걸 뒤 늦게 알았고, 그제야 다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몇개월의 벼락공부 끝에 국립창원대 미대(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고성(경남) 시골 마을에 첫 대학생이 나왔다고 시끌벅적했고 엄마가 좋아라했던 걸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성적이었던 그가 과대표를 맡았고 학우들의 부러움을 사는 모범생이 됐다. 늘 도서관에 살며 국내외 미술잡지를 탐독했고 미술흐름을 파악하는 자기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졸업전시회도 그가 주도해 성대(‘취업하면 끝인데 뭐 그리 하느냐’는 논란)하게 꾸몄고 결국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같은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전공은 서양화 아닌 조각. 그리고 작업실을 고성 고향 밭 컨테이너에 차렸다. 그 때 5번에 걸친 대한민국미술대전에 도전, 최우수상(‘인생의 추상성’ 작품명)을 따냈다. 대학이 발칵 뒤집혔을 정도였다.

 

▲ ‘인생작’이 될 ‘대가리 박아’ 작업장.  © 최방식


뚝섬 전시작 ‘첫키스’ 2억 판매 ‘대박’

 

“‘대학 나온 사람이 시골에 와 작업실을 차렸다’, ‘서양화가가 왜 조각을 하냐’는 쑥덕거림이 ‘이럴 줄 알았다’는 칭찬으로 뒤바뀌더군요. 그도 잠시 대학원을 마치니 탈출구가 절실했어요. 장가 가고 돈 벌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야 했거든요. 성신여대 대학원 졸업 뒤 잘 풀린 선배를 찾아갔죠. 동아줄이 필요했고, 개인전을 열심히 도왔죠. 그러다 거기 입학(석사과정 두 번째)하게 됐어요.”

 

두 번째 대학원도 그는 열심히 뛰었다. 서울시 신청사 조형물 작업(한예종 교수 작품)에 알바로 들어갔다 팀장을 맡기도 했다. 그 때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대가리 박아’를 구상했다. 한창이던 삽질정책을 비판하며 구상한 것. 거창하게 구상했는데, 작은 작품으로 대체했다. 애초 구상한 작품은 테마작으로 지금도 작업중이다.

 

그리고 3년 뒤 ‘대박’ 사건이 터졌다. 2018년 서울시와 크라운해태홀딩스가 코로나19 엔데믹 기념으로 뚝섬에서 개최한 ‘한강조각프로젝트 낙락유람’(8월 20일부터 한달간, 야외 3백점 실내 8백점 전시) 조각전에서 그의 출품작 ‘첫키스’가 2억원에 팔린 것. 삼겹살 구워놓고 ‘혼술’하며 늘 지쳐 힘들어했던 대학과 알바 시절을 회상하며 구상한 것이었다.

 

‘대박’ 탄생의 밑거름이 뭐냐고 물으니, 조각판 ‘입닫고 3년 귀막고 3년’(며느리와 여인 차별과 고통을 표현한)이란다. 노력 끝에 괜찮은 작품이 나온다는 이야기. 고비마다 길을 안내한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

 

“선배들의 가르침이 큰 힘이 됐죠. 깨달은 바도 크고요. 작품은 팔려고 만들면 안 된다고 했어요. 대학원 다닐 때도 알바할 때도 그리 배웠어요. 팔려 가면 장식품이 되고 마니까요. 구매자 의도가 지배하고 창의력이 떨어지는 허수아비가 불과하니까요.”

 

‘결혼하지 말자’는 낙서를 궁금해 하니, 연애비사가 나온다. 상대측이 해외 유학생활을 오래 하는 등의 이유로 헤어졌는데, 연애를 안 하니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 끄적여봤다고 했다. 창작열을 불태우는 요즘엔 작품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왜 예술을 하느냐는 물음에는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을 끄집어냈다. UFO를 과학자는 입증하지 못하지만, 예술가는 보여줄 수 있다는. 백남준이 뉴욕 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임의 접속 정보’ 강연(1980년)에서 했다는 말.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을 늘 기억하며 자신의 작품마다 그 미래와 상상력을 담고 있다고 했다.

 

▲ 2018년 전시회에서 2억원에 팔린 ‘첫키스’.  © 최방식


“미래를 사유” 백남준 말은 금과옥조

 

경남이 고향인 그가 여주에 들어온 건, 작업실을 어디에 둘까 고민에서 출발했다. 여주양평은 그에게 “훌륭한 작가가 많은 곳”이었다. 서울, 파주 등을 고민했으나 자기 고향 고성과 분위기가 비슷한 곳을 택한 것. 여기서 8년째 작품활동과 생계(작품 알바)를 꾸리고 있다.

 

3년 전부터는 여주민예총에 가입해 활동(시각예술위)하고 있다. 그의 제안으로 봄(터미널·장애복지관·병원)·가을(9~12월까지 동서남북) 순회전을 기획 시행중이다. 지역주민과 소통하는 예술을 해보자는 취지. 그는 대학원시절에도 민예총 활동을 했다. ‘미선효순’ 사건 때 전국시위 등에 참여했다.

 

그는 국제교류전을 고민하고 있다. 부가티 벤틀리 등과 함께 최고의 명차로 알려진 ‘뒤센버그’(스페인) 회사에서 전기차 한국발표를 앞두고 지난해 3명의 작가를 공모·선정했는데, 그도 뽑혔다. 자신의 야심작 ‘대가리 박아’를 완성해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는 2018년 12월(19~25일, 인사동 갤러리H) 전시회까지 4차례 개인전(공동전도 수십 차례)을 열었다. ‘좆같은 세상’, ‘청와대 관광나이트’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선보였다. 최근엔 환단고기(상고야사)에 꽂히기도 했다. 수천년전 신화가 그의 손에서 어떤 미래 창조로 탄생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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