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덕 선생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 8일

손윤수기자 | 기사입력 2019/02/05 [09:23]

김상덕 선생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 8일

손윤수기자 | 입력 : 2019/02/05 [09:23]
▲ 김상덕 선생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 개최

[다경뉴스=손윤수기자]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는 2월 8일 오전 11시 고령군 대가야읍 중앙네거리 쉼터에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이번 기념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한 3·1운동을 촉발시킨 2·8독립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가 될 것이다.

 

특히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문화부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친일잔재 청산과 민족통일에 앞장서 왔던 고령 출신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 600여 명이 모여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요구하면서 항일독립투쟁을 국내외에 선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상덕 선생은 1년 후 일제의 감옥에서 풀려나자 중국 상해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임시정부 문화부장까지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진영의 통합에 힘썼다. 또한 해방 후에는 고령에서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제헌헌법을 기초하는데 이바지하고, 반민특위위원장으로서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는 그동안 납북인사라는 이유만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향에서조차 잊혀졌던 선생의 업적을 현창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갈 계획이다.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는 올해 2·8독립선언,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4월 11일)을 맞이하여 지난 1월 14일부터 고령군 대가야읍 중앙네거리에서 장날마다 지역주민에게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있다. 향후에도 지역청소년 역사교육, 김상덕 선생 관련 책자 출판, 김상덕 거리 및 공원 조성, 김상덕 기념관 건립 등 현창사업을 지역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 개최〉
일 시 : 2. 8 (금) 11:00 ~ 12:00
장 소 : 중앙로 네거리 쉼터
의 식
- 개회선언
- 국민의례(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애국가 제창)
- 경과보고
- 대회사
- 축사 및 격려사
- 2.8독립선언문의 결의문 부분 낭독
- 만세삼창
- 태극기 들고 거리 행진

 

※ 향후 일정
- 일 시 : 2. 19 (화) 14:00
- 장 소 : 문화누리 가야금홀
- 내 용 : 김상덕 선생 기념 강연 (충남대 허종 교수)
☞ <2019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2월)
- 경상북도독립기념관 주관

 

김상덕(金尙德.1891.12.10. ~ 1956.4.28.)
이달의 독립운동가 / 국가보훈처 / 2011.02.8. / 신주백 연세대학교 HK연구교수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 학생 대표 11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된 선생은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재건을 위해 힘쓰고 중국 내 분산되어 있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의에 몰두하고, 만주에서는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띠면서도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전개되도록 주도하였으며 해방 후 국내로 귀국해서는 정부 활동에 참여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김상덕(金尙德,1891.음력12.10~1956.4.28)선생은 1892년 경상북도 고령군 저전동(저전2길)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운 가정임에도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며 유교적 소양을 갖추어갔다. 21세 되던 해인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그만두었다. 이후 2년 뒤인 1915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고학 끝에1917년 3월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선생은 경신학교의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선생은 일본에 가자마자 동경 간다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관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이곳은 조선기독교청년회(1906), 조선유학생학우회(1912), 조선학회(1915),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1915)와 같은 유학생 단체들이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곳이었다. 이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와 독립문제의 연관성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1919년 1월 6일에도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가 열렸다. 선생을 비롯한 연사들은 당시 세계정세를 한마디로 규정하고 있던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자주 독립을 달성해야 하며, 이처럼 숭고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강연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새벽 한 시가 지나도록 민족운동을 전개할 방법을 숙의하느라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이때 최팔용의 제안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학생대회를 통해 이를 발표하며, 국내외에 발송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학생대표를 선출하였다. 선생은 11명의 실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따돌리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단은 2월 8일에 열린 조선유학생학우회 임시총회에서 재빨리 단상에 올라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서둘러 선언하였고, 백관수와 김도연이 연이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참가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성을 울렸다. 하지만 서춘이 애국 연설을 하려 할 때 일본 경찰의 해산 요구가 있자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반항하면서 격투가 벌어져 집회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집회가 해산되는 과정에서 선생을 포함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모두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학생 가운데 17명은 정식 취조를 받았고, 선생을 포함한 9명은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일본 법원은 그에게 금고 7개월 15일을 선고하였다. 선생은 1920년 2월 9일 출옥하였고 곧장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선생은 1920년 3월 5일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바로 다음 날 발간된 <독립신문>에서도 “6개월의 금고를 마치고 방면된 김상덕씨는 일전 무사히 상해에 래도하다”라고 그의 도착 소식을 전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만 29세였다. 선생은 도착하자마자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의정원 신분을 유지하는 동안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56명의 한국측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대회 도중에 열린 극동혁명청년대회에도 21명의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대회는 1921년 11월부터 미국이 주도하여 열린 워싱턴회의에 대항하는 회의였다. 워싱턴회의는 소련을 배제한 가운데 중국문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열강 간 이해관계를 재조정한 국제회의였다. 소련은 여기에 대응하여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국제회의를 조직한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에서는 계급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 계급운동을 벌이는 일이 아직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한국문제를 결의하였다. 또한 민족운동에 대중이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급운동자는 민족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임시정부가 실력에 비해 명칭이 과대하므로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무소속의 학생 대표로 참가한 선생으로서는 향후 활동방향을 잡는데 많은 시사를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홍범도, 김승학, 여운형, 김규식과 같은 쟁쟁한 사람들과 함께 참석함으로써 인적 관계망도 넓히고 민족운동가들 사이에서 그의 위상도 더 올라갔을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고 1922년 3월 중순경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다시 국민대표회와 관련된 일에 몰두한다. 이미 1921년 8월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었고, 극동민족대회에서도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지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선택적 행동이 당시 민족운동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사이에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경상북도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선서문과 선언문의 수정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될수록 임시정부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화되어 갔다.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문제점을 실제 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선하자는 입장이었던데 비해, 창조파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조직하자고 주장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격렬하게 벌어진 논란의 와중에서 선생은 개조파에 동참하였다.


한편 1924년 4월 5일 상해청년동맹회가 결성되었다. 상해청년동맹회의 창립총회에는 78명이나 참석하였고, 총회 장소에서 61명이 회원 가입을 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상해지역 민족운동가들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선생은 창립총회의 첫 순서인 개회사를 맡았으며, 10명의 집행위원과 5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상해청년동맹회는 독립운동의 깃발 아래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고, 희생적으로 낡은 관례와 습성에서 벗어나 민족 독립을 완성할 것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상해청년동맹회 결성은 당시 국내에서 청년지식층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된 것과 같은 흐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국내 청년단체가 주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결성된 데 비해 상해청년동맹회의 창립 당시 강령에서는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기 상해청년동맹회는 의열단과 몇 차례의 갈등을 겪으며 의열단과의 경쟁구도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상해청년동맹회의 사회주의 사상이 짙어지면서 점차 두 단체는 사상적으로는 유사한 형태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후 만주로 활동영역을 옮긴 선생은 김응섭 등과 함께 길림성에서 한족노동당을 결성하였다. 한족노동당은 친일세력을 제외한 민족 구성원 모두가 ‘평균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우선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강령을 내건 민중 지향성이 강한 진보 조직이었다. 한족노동당은 1928년 2월 재만농민동맹으로 개편되었고, 선생은 중앙집행위원 겸 책임비서를 맡았다.


한편 선생은 1927년 9월에 개편된 ML그룹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남만주지역의 당 조직부장이자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회의를 열기 위해 찬동자를 구하는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가 반석현에서 열렸다. 하지만 내부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대립 발생으로 만주지역에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만주에서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이 와해된 이후 민족주의운동 계열은 국민부와 한국독립당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선생은 북만주에서 혁신의회를 이은 한국독립당이 1930년 7월 결성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당은 11월에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고, 선생은 한국독립군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북만주의 한국독립군은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는 정치성향의 중국인 무장부대와 원만한 협동작전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이 문제점을 타개하고자 1933년 2월에 열린 중앙대회에서 선생과 신숙을 남경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남경에 온 선생은 중국국민당 관계자들과 한국독립군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독립군도 1933년 말경이면 사실상 와해되었고, 북만주의 중국인 무장부대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통제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선생은 1934년 4월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된 신한독립당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1932년 4월 윤봉길의거가 일어난 이후 중국 관내지역의 민족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운동 세력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는 상해청년동맹회 시절에 대립했던 김원봉의 의열단도 참가하였다.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며 의열단은 테러리즘단체에서 대중운동을 지향하는 비밀결사단체로 전환한 상태였다. 한국독립군 사령관이었던 이청천은 자신의 군사적 전문지식을 살려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학생들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합에 찬성하는 단체끼리 연합조직을 만들고자 5개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1932년 10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우리들의 유일한 출로는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여 우리들의 독립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함에 있으며 당면의 제일 긴급한 일이 전선통일의 문제이다”고 보았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논의를 거듭한 끝인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민족혁명당을 창당한 사람들은 두 번째 세계대전이 임박했다고 보고,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전쟁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지도적 중심’으로써 대통일당을 서둘러 결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중심적 조직이 확립되지 못하는 한 혁명 조류에 동요하고 있는 군중을 이끌어 정확한 승리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민족혁명당은 기존의 5개 단체를 모두 해산하고 개별적으로 가입하며 구성된 중앙집권적인 조직이었다. 임시정부를 옹호하던 김구 세력을 제외하고 관내지역 민족운동 세력 대부분을 망라한 단체였다. 선생은 창립 당시 김원봉이 부장으로 있는 서기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월에는 17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상해의 한국독립당 세력이 이탈하였다. 선생과 함께 만주에서 남경으로 왔던 홍진도 이탈하였다. 이어 1937년 4월 이청천이 이끄는 조선혁명당 세력이 이탈하였다. 김상덕은 한때 만주에서 이청천과 함께 촉성회파와 한국독립군에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상덕은 두 번의 기회에서 모두 합류하지 않았다. 민족을 우위에 놓고 단일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전부터의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탈의 명분이 무엇이든 주도권 다툼과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민족혁명당은 남경에서 우한으로, 다시 구이린을 거쳐 중경에 도착하였다. 선생도 조직을 따라 함께 이동하였는데, 그러는 와중에 간난 아기인 막내딸을 잃었다. 또한 중경에 도착하자마자 부인이 운명을 달리하였다.


중일전쟁 일어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운동 단체의 흐름도 달라졌다. 1940년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에 가입해 있던 조선민족해방동맹 소속원들이 이탈하여 조직을 복원하고 중경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중국국민당의 강력한 종용도 있고 해서 김원봉의 민족혁명당도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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