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혁명군, 알록달록 다 모였군요”

[포토에세이-上] 미인계에 넋이 나간 폐인은 그만 혼수상태...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9/04/01 [19:55]

“산성 혁명군, 알록달록 다 모였군요”

[포토에세이-上] 미인계에 넋이 나간 폐인은 그만 혼수상태...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9/04/01 [19:55]
남한산성에 혁명군들이 속속 모여듭니다. 알록달록 무기를 꼬나들고서요. 치열한 미인계입니다. 미혹하려는 것이지요. 넋을 빼 전복하려고요. 폐인은 곧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밥 먹어” 소리에 헤어났습니다. 혁명군은 간데없고 밥상만 덩그런 하더이다.

지난 주말은 일탈을 만끽한 날입니다. 산성 폐인들 사이에 끼어든 녹색전사가 한 명 있었죠.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숲 해설가’입니다. 산성 아래 성남 어딘가에 사는 데,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는 군요. 동행의 사유가 충분합니다.

산성 오르는 길부터 달라집니다. 폐인들은 마천에서 50분이면 오르는 가파른 길로 다녔습니다. 하루 종일 할 도 없으면서 빨리 올라서 뭐하겠다고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등산로는 서너 갈래인데, 두 길은 한두 번 가봤고. 늘 한 길로 다녔습니다. 또 다른 한 길은 알지도 못했고요.
 
일탈의 묘미는 좌익노선에서...
 
일탈의 묘미는 노선이 바뀌는 데서 시작합니다. 마천 버스종점에서 등산로에 접어드는 곳이죠. 돌다리가 있는 삼거리일 겁니다. 언제나 지나치는 곳이지만 늘 멈칫거리는 곳이지요. 그 때마다 오른쪽이었는데, 이번엔 왼쪽입니다. 성불사 오르는 좌익이지요.

▲ 성불사 곁 담장에 매화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앞다퉈 제 성기를 자랑하면서요. 폐인더러 감상하라는 게 아닙니다. 중매쟁이를 부르는 겁니다.     © 최방식 기자

▲ 녹색전사를 따라 이른바 '1번국도'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까치와 직박구리가 반깁니다. 사실은 이방인의 출현에 경계경보를 울리는 것이지요. 조심하라고. 여의치 않으면 방위군을 소집하겠다고.     © 최방식 기자

▲ 청량산 계곡엔 이리저리 꾸불꾸불 가는 곳마다 샘이 많습니다.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산성 혁명군의 생명수지요. 폐인들의 목도 축이고...     © 최방식 기자


사찰이 가까워오는데 하얀 매화가 한창 시위 중입니다. 그 수를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많습니다. 폐인이 먼저 영접을 시작합니다. 칙칙한 카메라를 꺼내드는데 전사들이 움찔합니다. 무서웠나요? 부끄러움을 타는 모양입니다.

망원으로 보니 그게 아닙니다. 자리다툼입니다. 앞 다퉈 제 존재를 뽐내려는 것이지요. 뇌쇄적인 꽃잎을 활짝 펴들고서요. 그 때 쯤 숲 해설가의 귓전을 때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습니다. “저 꽃이 나무나 식물에게 무엇인 줄 아세요?”

폐인 눈엔 도성 공격을 위해 산성에 모인 혁명군들의 병장기입니다. 초록, 노랑, 하양, 연보라 빛 봄이 펼치는 변혁 앞에선 누구도 감당해낼 도리가 없으니까요. 제 아무리 날쌘 수비대도 막을 수 없죠. 항복한 뒤에야 깨닫게 되지요. 혁명을 저지할 수 없었음을요.

“성기랍니다. 종족번식을 위해 아름답게 피워내는 것이지요. 중매쟁이를 부르는 것입니다. 뇌쇄적인 자태로 그들을 끌어들여 짝짓기를 하려는 거니까요. 꽃잎은 성기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유혹하는 기능을 하지요. 꽃잎에 새겨진 무늬는 ‘허니 가이드’고요.”

▲ 긴 잠에서 깨어난 산성의 숲은 지금 혁명군을 소집하느라 부산합니다. 도성을 향한 변혁의 의지를 높이세우면서요. 이방인의 낯선 침입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칩니다.     © 최방식 기자

▲ 숲속 혁명 수비대는 이제 막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초록의 잔 가지는 1년생입니다. 그 곁 회색의 두툼한 가지는 선배세대고요.     © 최방식 기자

▲ 생강나무가 봄의 혁명 대열에 끼었습니다. 생강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리 불린다는군요. 참, 산수유와 비슷하지만 대부분 숲 속에 핀 건 생강나무라고요. 산수유는 나무 껍질이 너덜너덜하고 이건 매끄럽다는 군요. 녹색전사가 알려줬지요.     © 최방식 기자

꽃잎에 새겨진 무늬는 중매쟁이를 꿀샘으로 유인하는 활주로의 안내등 같은 역할을 한다는 군요. 벌과 나비를 불러 꽃잎에 착륙시키고 안내 표지판을 따라 빼먹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하려고요. 오묘하기도 합니다.
 
혁명군은 뇌쇄적 성기로 유혹
 
새로운 세계는 늘 흥미롭습니다. 꽃에는 충매화, 풍매화, 수매화 등 중매쟁이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답니다. 벌이나 나비가 중매하는 게 충매화고요. 아름다운 모습을 한 꽃들은 바로 충매화라는 군요. 중매쟁이를 유혹하려고요.

산성의 혁명군들에게 폐인들은 초대받지 못한 이들입니다. 중매쟁이가 아니니까요. 아름다운 봄의 혁명에 방해만 될 뿐이니까요. 중매쟁이가 되어 저 매력적인 꽃잎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절 뒤편 숲으로 들어서니 까치가 울어댑니다. 손님이 오면 울어댄다고 하더니만. 낯선 자의 침입을 알리는 경계경보라나요. 까치만이 아닙니다. 직박구리도 바삐 손님의 왼쪽 오른쪽으로 날아댑니다. 저들도 경고하는 것일까요?

 
▲ 산성 숲속에선 도토리도 혁명에 참여했습니다. 이제 막 땅을 짚고 비틀비틀 몸뚱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곧 수만의 병사를 잉태하고 수비대에도 참여할 겁니다.     © 최방식 기자
▲ 숲 혁명군에게 생명수를 제공하는 둠벙입니다. 올챙이와 도롱뇽의 자궁이기도 하지요.     © 최방식 기자
▲ 혁명군에게 봄은 사랑의 계절입니다. 암꽃은 앙증맞은 붉은 꽃을 피워 숫컷을 유혹합니다. 곁에 길다랗게 몸뚱이를 늘어뜨린 멋쩍은 수꽃은 사랑에 목말라하면서도 애타게 때를 기다립니다.     © 최방식 기자

숲 해설가는 생태계의 박사입니다. 새 이야기가 한참 이어집니다. 텃새, 철새, 떠돌이새, 나그네새... 까치, 까마귀, 참새, 직박구리는 텃새고요. 제비같이 여름에 왔다 추워지면 강남으로 가는 여름철새, 기러기처럼 겨울을 나고 더워지면 북으로 가는 겨울철새.

폐인은 늘 다니던 숲이 청량산 자락인줄도 몰랐습니다. 주봉인 수어장대가 청량산이랍니다. 산성 안 해발고도 350미터 분지가 언제나 마르지 않아 그리 불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 곳 등산로엔 정말 샘이 많습니다. 꾸불꾸불 가는 곳마다 눈에 띄는군요.
 
‘1번국도’ 해설사는 녹색전사
 
폐인 일행이 접어든 좌익코스는 청량산을 가장 멀리 왼쪽으로 도는 이른바 ‘1번국도’였습니다. 등산로 표지판에 1번이라 돼 있어 일행은 그리 불렀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소요하는 노정인데, 참 아름답습니다. 해설사가 곁에 있어 더 그랬을 겁니다.

남한산성은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가 맞다은 곳입니다. 조선시대엔 국방의 보루였죠. 인조는 청군에 쫓겨 한 달 보름을 이곳에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서쪽의 주봉인 청량산, 북으로 연주봉, 동으로 망월봉 능선을 연결한 해발 350미터의 넓은 구릉이자 천혜의 요새지요.

 
▲ 숲의 선배세대는 200년동안 제 몸을 바쳐 후배세대를 기릅니다. 나무 한 그루가 50개체의 생명을 먹여살린다니 혁명 수비대의 선후배 애정은 정말이지 남다른 가 봅니다.     © 최방식 기자
▲ 숲 속에는 나무가 참 많습니다. 그냥 멋쩍게 자빠져있기도 하고, 누군가 잘라 반듯하게 쌓아놓기도 합니다. 어디에 있든 쓸모가 참 많지요. 크나 작으나, 기나 짧으나...     © 최방식 기자
▲ 녹색 전사와 함께 이른바 '1번국도'를 1시간 30여분 오르니 연주봉 옹성이 떡 버티고 섰습니다. 산성 혁명군을 지키는 방책이지요.     © 최방식 기자

동문(좌익문), 서문(우익문), 남문(지화문), 북문(전승문)으로 총 9.05km 내성이 있고, 동장대에서 2km 남짓 외성을 두른 도성 남쪽 산성입니다. 청 태종에 쫓긴 인조는 1636년 12월 14일 지화문을 통과해 피신했다가 이듬해 1월 30일 우익문으로 항복하러 나섰습니다.

20여분 올랐을까요. 작은 둠벙 하나가 생명을 잉태하느라 마지막 산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한껏 부풀어 오른 올챙이와 도롱뇽 알이 벌써부터 새날을 열어젖히고 있습니다. 조그만 습지인데, 청량산의 자궁입니다. 겨우내 품어왔던 새 생명을 곧 잉태할 겁니다.

나무뿌리 사이에선 벌겋게 달아오른 도토리가 땅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섭니다. 머지않아 수만 개의 대리자를 만들어 내며 숲 생명체를 지키는 수비대 전사로 자라나겠지요? 그 곁 풀잎들도 햇볕을 앞 다퉈 차지하려고 경주를 막 시작했습니다. <다음에 계속>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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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미 2009/04/02 [15:17] 수정 | 삭제
  • ㅎㅎㅎ 열공하신 최국땅님께 선물을 드려야겠어요.^^
    4월 18일 오전엔 청량산의 좌익코스인 1번국도에서
    환경동아리 여고생들과 뒹굴 예정이고 오후1시면 수업을 마칠꺼예요.
    오후부터 녹색전사와 함께하는 숲기행에 동행할 수 있습니다.
    아싸! 기대만땅~★
  • 평화사랑 2009/04/01 [21:10] 수정 | 삭제
  • 자미님.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이 4월 18일쯤 모시고 숲기행을 하고 싶다고 하네요. 남한산성에서 산성 혁명군들을 보고 싶다며... 독자님 중에서도 원하시면 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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