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유혹, 숲속 변혁을 마쳤어요”

[길거리통신] 연노랑 떨림 고혹한 자태에 행인은 숨 멎을 뻔...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9/03/23 [20:56]

“보랏빛 유혹, 숲속 변혁을 마쳤어요”

[길거리통신] 연노랑 떨림 고혹한 자태에 행인은 숨 멎을 뻔...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9/03/23 [20:56]
숲이 변혁을 시작했습니다. 봄바람이 산성의 긴 겨울을 걷어냅니다. 갯버들은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진달래는 선홍빛을 제법 뽑냅니다. 산수유는 칙칙한 계곡을 싱그럽게 합니다. 성곽 아래 양지녁엔 초록 생명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봄은 인고의 산등성이를 에워싸고서 마지막 공습을 감행합니다.

길고 긴 겨우내 주말이면 올랐던 산성입니다. 후배 녀석하고 버릇처럼 다녔지요. 잿빛 차디찬 냉기와 귀때기 후리는 칼바람이 스며드는 숲 어디에도 생명은 없었습니다. 천성이 푸른 소나무겠거니 했죠. 굳었다 풀리는 등산로가 조짐이었다면 모를까.
 
▲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목련이 마침내 하얀 속살을 내밀었습니다.     © 최방식 기자
▲ 보랏빛 전사는 능선을 타고 숲을 이미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 최방식
▲ 생강나무인지 산수유인지 고혹한 자태에 행인은 숨을 멎습니다.     © 최방식

숲에 오롯이 감춰뒀던 생명이 어디 있으랴 싶었습니다. 화사하게 피어날 거라는 맹세는 정말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만 짧았던 지난 영화를 기억케 할 뿐이었으니까요. 다람쥐들이 미처 못 가져간 밤톨과 도토리 몇 개는 봤던 거 같습니다.
 
오롯이 감춰둔 생명은 어디에?
 
왁자지껄 소음이 멀어지나 싶으면 입안에 단내가 번집니다. 바스러지는 흙덩이를 딛고 땀방울을 훔칠 때쯤 나타나는 갈림길 하나. 지구촌 남반구 어딘가에서 가져온 원두 향을 즐깁니다. 후배 녀석 덕에 누리는 호사지요. 아직 풀리지 않은 속을 달래면서요.

재잘거리는 침입자들의 발걸음, 등산지팡이의 가는 떨림, 가뿐 숨소리, 그리고 발길질을 거부하는 나뭇잎의 저항에 정신을 차리면 쩍 갈라진 고목의 뿌리들이 널따랗게 둘러앉았습니다. 행인은 그늘이 그리 달갑잖습니다. 가슴이 무거워오지만 앉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 쫄쫄쫄 타는 목을 축이고 나면 210미리 망원렌즈에 흐릿하게 잡힌 작은 꽃들이 먼저 긴 탄성을 지릅니다.     © 최방식

▲ 봄의 향연은 길고 깁니다. 보랏빛 진달래가 유혹의 조막손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하나, 둘, 셋 셀 수조차 없습니다. 토요일 오후 남한산성 숲 속엔 혁명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 최방식

▲ 흐릿하게 잡혔다 사라지는 노란 생명들은 환영이 되어 행인의 정수리 깊이 퍼져갑니다.     © 최방식


행인의 머릿속엔 늘 오솔길 땀 냄새가 흥건합니다. 가파른 계단, 차오르는 바위 턱, 긴 갈라섬 끝에 다시 마주하는 곳, 그리고 인절미·쑥떡을 늘어놓고 길게 구부려 앉은 할머니를 발견하면 차디찬 산성의 안팎을 잇는 쪽문밖입니다.

행인은 늘 안쪽에 다다라서야 말문을 엽니다. 한 시간여 쏟아낸 단내를 씻으려는 듯 찹쌀 동동주를 벌컥벌컥 들이키지요. 좌판 아주머니의 불그레한 얼굴엔 반가움이 묻어납니다. 그리곤 제법 긴 수다가 시작됩니다. 고추장을 찍은 마늘종을 씹으면서요.
 
고추장 찍은 마늘종을 씹으며...
 
남은 모카향으로 손을 녹이곤 행인은 210미리 망원렌즈를 꺼냅니다. 숲의 긴 겨울잠을 깨우려는 겁니다. 아니, 깨어난 무언가를 보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색감도, 떨림도, 냄새도 늘 그대롭니다. 잿빛 하늘, 갈색 숲, 흐릿한 세상사 모두가 언제나 그렇듯이...

▲ 막걸리 희뿌연 취기가 목을 타고 넘어갈 즈음, 여염집 담장 너머 하얀 매화가 행인을 유혹합니다.  © 최방식

▲겨우내 움추리고 버텨냈던 나뭇잎 하나는 긴 안식의 여행을 앞두고 마지막 일광욕을 즐깁니다.    © 최방식

▲등산로 초입 실개천 가 홀로선 갯버들, 제법 통통하게 물이 올랐습니다.    © 최방식

살아 있음에 안도하는 순간입니다. 망원렌즈 초점이 흐려지면 다시 후회가 시작됩니다. 새 생명은 언제나 움트나? 긴 절망이 다시금 엄습하는 순간이지요. 하지만 어디선가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져 옵니다. 초록의 장도가 시작된 신호겠지요?

행인의 걸음걸이가 느려집니다. 숲 속을 살펴야 하니까요. 생명을 찾아야 하니까요. 쫄쫄쫄  목을 축이다 움막 어딘가에서 찾아냈습니다. 셔터가 열리고 연노랑 빛이 스쳤지요. 산수유인지, 생강나무 꽃인지는... 고혹한 자태에 숨이 멎을 뻔 했습니다.

봄의 향연은 길고 깁니다. 보랏빛 진달래가 유혹의 조막손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하나, 둘, 셋 셀 수조차 없습니다. 토요일 오후 산성 숲 속엔 혁명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보랏빛 전선은 산등성이를 넘었습니다.

▲산성 밖 양지녁 어딘가에선 초록 생명이 두꺼운 장망을 뚫고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 최방식

▲이름 모를 초록 풀꽃도 망원렌즈를 향해 제법 멋들어지게 봄인사를 건넵니다.      © 최방식

▲산성 안 어느 집 마당 한쪽에서 마주한 붉으레한 끌림은 행인의 숨을 멎게 합니다.  © 최방식


흐릿하게 잡혔다 사라지는 노랑, 초록, 그리고 보랏빛 생명들은 환영이 되어 행인의 홍체와 각막, 그리고 정수리에 그림자 여럿을 각인시킵니다. 4기가 메모리는 이미 차고 넘칩니다. 그 끝, 희미한 불빛, 그 아래 깜깜한 그림자에 미명이 스쳤습니다.
 
절망 끝에 가느다란 손 떨림
 
왜 이리 험한 숲까지 찾아나섰는 지 모를 일입니다. 막걸리 희뿌연 취기가 목을 타고 넘어갈 즈음, 노란 개나리 몇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버스 종점 뒤 여염집 울타리에선 매화의 자리다툼이 한창입니다. 그러고 보니 행인의 아파트 정원엔 벌써 백목련까지 화사하더이다.

봄이 더디다고 조바심에 주말이면 집을 박차고 마중 나갔는데... 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망원렌즈까지 들쳐 메고 숲 속으로 줄달음질 쳤는데. 거짓말이었나 봅니다. 한낱 핑계였나 봅니다. 숲은 행인이 찾아오기 전 변혁을 이미 마쳤으니까요.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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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사랑 2009/03/27 [21:50] 수정 | 삭제
  • 룰루랄라...
  • 자미 2009/03/27 [10:13] 수정 | 삭제
  • 지하철 5호선 마천역 1번출구에서 뵙는 걸로 하구요.
    시간은 오전 10시...너무 이른가요?(1시간 늦춰도 괜찮아요.^^)
    변동사항 있으면 문자 날려주셔요. 낼 뵙겠습니다. 룰루랄라~♬


  • 평화사랑 2009/03/25 [22:03] 수정 | 삭제
  • 이런 영광이... 당근 환영이지유. 몇시에 뵈올까요?
  • 자미 2009/03/25 [17:22] 수정 | 삭제
  • 혁명의 기운이 가득한 남한산성 아랫마을에 사는 아낙,
    긴긴 은둔의 동면에서 막 깨어나 기지개를 켭니다. 으랏차차차~^^
    최국땅님, 이번 주 토욜 망원렌즈 메고서리 출사 번개 어떠신지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상춘객 2009/03/24 [13:06] 수정 | 삭제
  • 정말 좋습니다. 어느새 봄인가? 이제야 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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