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사라지는 내 등이 보인다”

버마작가모임, 버마·한국 앤솔러지 출판기념회 22일 풍류마당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8/12/25 [20:15]

“멀리 사라지는 내 등이 보인다”

버마작가모임, 버마·한국 앤솔러지 출판기념회 22일 풍류마당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8/12/25 [20:15]
버마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집 한 권이 나왔습니다. 버마의 혁명시 34편과 버마를 사랑하는 한국 작가들의 시 30편이 실려 있는데,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임’이 펴낸 것이죠.

한국·버마 합동 앤솔러지인 시집 ‘멀리 사라지는 등이 보인다’ 출판기념회’가 지난 22일 늦은 7시 서울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인 풍류마당에서 열렸습니다.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임’(이하 작가모임)이 주최한 것인데, 회원 20여명과 한국에 거주하는 민족민주동맹(NLD,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정치조직) 한국지부 회원 10여명이 참여했습니다.

▲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이 지난 22일 인사동 풍류마당에서 양국 시 60여편을 엮어 만든 '멀리 사라지는 등이 보인다'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 최방식 기자

▲ 출판기념회에 축하차 나온 이신우 총장(농수산물시장 중도매인연합회)과 그의 친구 파파야.     © 최방식 기자


올해로 창립 1년을 조금 넘긴 작가모임은 그간 버마 혁명시 낭송회, 버마 민주화를 호소하는 집회, 버마 혁명시인 초청 강연회 등을 주최했습니다. 게다가 한국NLD가 주관한 ‘송크란 축제’(전통 물축제) 등 각종 행사에도 참여해왔죠.
 
“버마 민주화 기원” 양국합동 시집
 
시집 ‘멀리 사라지는...’은 작가모임이 작년 말부터 사업계획으로 잡아놓고 추진해 온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버마의 혁명시인인 마웅 소 챙으로부터 영역된 버마시를 넘겨받아 번역작업을 해왔고, 아울러 작가모임 회원들에게 창작시 한편씩을 받아 엮은 것입니다.

이날 행사 이름을 앤솔러지 출판기념회라고 했는데, 조금은 민망한 느낌이 없잖았습니다. 앤솔러지(Anthology)는 ‘꽃을 따 모은 것’으로 ‘명시를 모아놓은 책’을 말하니까요. 버마 작품들은 문제없습니다. 한국 작품도 대부분 그렇지만, 제 작품을 스스로 그리 부르는 게 좀 그렇지요?

▲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나온 이들. 마침 날리는 하얀 송이눈에 막걸리 흥이 넘쳐 길 한귀퉁이를 가로막고 섰다.     ©최방식 기자

▲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나와 본 인사동 거리. 함박눈이 곱게 내려 차가운 보도위에 드러눕고, 그 위로 지나는 이들은 '2차'를 외쳐된다. 작가모임 회원들도 '노래방으로'를 외쳤다.     © 최방식 기자


시집을 내는 데 크게 기여한 마웅 소 챙 시인의 말을 들어봅시다. “버마엔 인권이나 민주주의, 그리고 언론자유가 없습니다. 모든 출판물은 검열 당국에 제출해야 합니다. 수많은 작가, 시인, 언론인이 체포되고 고문 받아 왔습니다. 신념 때문에 형을 받고 수감된 형편입니다.”

시인은 이어 “한국 시인들로부터 요청을 받고 친구 시인인 마웅 타 노에가 선정·번역한 시 뭉치에서 몇 십 편의 시를 선정해 보냈다”며 “이 시집이 한국인과 버마인을 보다 가깝게 만드는 데 큰 연결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습니다.
 
“한국과 버마를 가깝게 만드는 연결자”
 
작가모임 임동확 회장은 발간사에서 “가혹한 정치적 탄압과 검열 속에서도 최소한의 진실을 지키고자 고투하는 버마 시인들의 영혼의 언어 속엔 우리가 잃어버린 이웃과 타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식이 고스란히 스며있다”며 “이 시를 통해 버마인들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 네온 등 아래로 내리는 눈은 따뜻하다. 그 온기에 전염돼 금새 노랗게 세상을 덮는다. 쉐다곤 황금사원에도 눈이 내린다면 아마 노란 눈이 내릴 것이다.     © 최방식 기자

▲ 언젠가 봤던 그 집앞 그 풍경. 하늘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모자를 벗고서 하얀 눈을 맞고 있다. 더운 가슴과 머리을 식혀달라며.     © 최방식 기자


임 회장은 특히 “시는 타자와 가장 근본적이고 적나라하게 소통할 수 있을 때 탄생한다”며 “우리에게 버마인들은 낯설고 새로운 타자가 아니라 유한하며 제한된 인간 또는 한국인으로서 한계를 벗어나 순수한 준재의 빛 속에서 영접하고 모셔야 할 절대적 타자로, 책임과 의무를 나눠야 할 소중한 존재”라고 언급했죠.

이제 시를 한번 감상해볼까요. 먼저 버마의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마웅 처 네(Maung Chaw Nwe)의 ‘물고기’입니다. 고기 한 마리 잡다가 인생이 통째로 낚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물고기(마웅 처 네)
 
내 인생 전부
난 결코 한 마리 물고기도 잡아본 적 없다
그런데 보라구
내가 한 마리 잡았을 때

 
그건 거대한 우주 그 자체였다
그걸 끌어올리면서
내 낚싯대는
무지개처럼 휘어지고
이번에 내가
낚이고 만다

 
▲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이 버마와 한국의 시 60여편을 모아 펴낸 앤솔러지 '멀리 사라지는 등이 보인다'.     © 최방식
버마 시를 하나 더 맛보겠습니다. 찌 마웅 딴(Kyiy Maung Than)의 ‘세대들’이지요. 세대별 문화, 그리고 동시대인들의 변혁 정신을 담은 작품입니다.
 
세대들(찌 마웅 딴)
 
비틀즈의 노래를 듣고
나팔바지를 입었던
장발의 사람들이 그래도
베트남전을 반대했다네.
지구상의 문제를 새로운
노래로 만들어 다루었다네
....

 
머리를 염색한 채
힙합송을 들어왔던
이 사람들이 그래도
컴퓨터를 다루고
게임을 하면서,
이기는 것을 즐긴다네.
이런 사람들이 굽이치는 강을
곧게 펼 수는 있을까요?

 
“아들 하나는 빨지산이었음을...”
 
한국 시인들의 작품도 음미해보겠습니다. 원로선배인 서정춘 시인이 옥고를 한 편 내놨죠. “어떻게 함부로 시를 쓴다요. 좋은 시 다섯 편만 남길라요”라던 시인이 백년 걸려야 한 번 핀다는 ‘대 꽃’을 선보였을까요?
 
화음(和音, 서정춘)
 
햇볕이 질화로처럼 따뜻한 봄날이다
 
일전 쑥밭골 미나리꽝에서는 새순 돋아 일어나는 미나리의 연약한 힘에 받혀 살얼음 바스러지는 소리가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다가 홰를 치는 장닭울음 소리에 채여 지리산 화개철쭉으로 사라지는 화음이 멀기도 하였다
 
낡은 집 돌담각에 등을 대고 오돌오돌 앉아서 실성한 듯 투덜거리는 저 홀할머니의 아들 하나는 빨치산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뽑힌 시도 한 번 들여다봅시다. 문단의 중견 김이하 시인의 삶의 언어가 담긴 ‘눈물에 금이 갔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집 표지 사진도 김 시인의 작품이라는 군요. 그는 눈으로도 시를 쓰는 작가인 셈입니다.
 
눈물에 금이 갔다(김이하)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십수년을 살면서
이게 어디냐고
가끔은 걸레질 비질도 했는데
....

 
술에 치여 보낸 밤도 많았고
화가 나서 뜬눈으로 보낸 날도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놈이 참 듬직한 걸
보았다, 거미란 놈
...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사는
내 삶의 한켠에 번듯하게 제 집을 짓는 저놈
흐릿한 거미줄 틈으로
멀리 사라지는 내 등이 보인다
더 이상 걷어 낼 거미줄은 아닌 것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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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사랑 2008/12/30 [00:31] 수정 | 삭제
  • 그 사진...
  • 자흔 2008/12/29 [09:42] 수정 | 삭제
  • 세 번째 사진의 키 작은 女人만 '줌 아웃'해서 메일로 보내주시면... (wkgms513@hanmail.net)

    이렇게 또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주셨군요!!
  • 평화사랑 2008/12/26 [15:37] 수정 | 삭제
  • 담배 여전히 맞좋으신가요?
    번지없는 주막 글씨를 넣으려니 구도가 좀 그렇더라고요.
    그건 개인적으로 보내드리리다.
  • 검은소 2008/12/26 [14:01] 수정 | 삭제
  • 최국장님, 기사 잘 읽었소. 최국장님 덕분에 버마모임의 역사가 이렇게 기록으로 차곡차곡 남게 되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을 최국장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건필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랍비 2008/12/26 [10:27] 수정 | 삭제
  • 평소에 관심있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답니다.
  • 평화사랑 2008/12/26 [09:01] 수정 | 삭제
  • 그러고 보니 보아돌이한테 연락 안했네...
    미안타. 내도 바빠 늦게 도착했거든.
    서00 이놈시키 연락도 안하고...
  • 보아돌이 2008/12/26 [02:14] 수정 | 삭제
  • 저만 빼놓고... ㅠ_ㅠ 다들 너무해요!!! 흑흑...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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