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 청계산 가을, 어울려 곱다”

[포토에세이] 생강나무와 당단풍처럼, 오바마와 미국처럼...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8/11/11 [15:09]

“울긋불긋 청계산 가을, 어울려 곱다”

[포토에세이] 생강나무와 당단풍처럼, 오바마와 미국처럼...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8/11/11 [15:09]
청계산 가을 곱디고운 빛깔에 물들었습니다. 건들바람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울긋 느티나무 불긋 당단풍에 늦바람이 난 게지요. 꼭 마네의 ‘가을’ 화폭 어디엔가 묻어난 화사한 모습입니다. 어울려 예쁜 세상에 푹 빠질 밖에요. 오매 ‘잡종세상’, 참 아름답기도 합니다.

“8일 오전 8시 반, 양재역 7번 출구. 청계산 등산. 조모아.” 하늬바람이 메시지 하나를 건네 왔습니다. 가을여행으로의 초댑니다. 노랗게 단장한 생강나무가 보고 싶었습니다. 황금 들녘, 재잘대는 참새가 그리웠나 봅니다. “그래, 모아야 나도 간다.”

부천에 아주 특별한 친구들이 삽니다. 버마에서 온 맘씨 고운 청년들이지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조국을 등진 이들입니다. 아웅산 수지의 친구이자 NLD(민족민주동맹)한국지부 회원들이죠. 가을바람이 든 모양입니다. 사내더러 나들이를 가자고 하는 걸 보니까요.
 
▲ 울긋불긋 청계산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건들바람의 초대로 사내는 화려한 외출을 시작했습니다.     © 최방식 기자
▲ 불긋한 당단풍도 울긋한 생강나무도 이렇게 서로 얽히고설켜야 고운 빛깔을 뽐낼 수가 있습니다.     © 최방식 기자
▲ 모퉁이를 막 돌아서 저만치 내닫는 버스를 줄달음질 쳐 붙든 사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청계의 고운 자태를 한 아름 안아올 수 있었습니다.     © 최방식 기자

사실 몇 주 전부터 사내는 맘속 굳게 다져왔습니다. 곱디고운 가을을 가슴 속에 꼭 담아오겠다고요. 일에 지쳐, 술에 취해 하마터면 놓칠 뻔 했습니다. 길모퉁이 돌아 버스가 저만치 내달을 때야 정신 차린 늦깎이 가을사내는 달음박질 쳐 간신히 버스를 붙들었습니다.
 
하늬바람이 건넨 메시지 하나
 
해마다 추석이면 꼭 떠오르는 시구가 하나 있습니다. 영랑의 영롱한 절창이죠. “오매, 단풍들겄네.” 꼭 마네의 화폭 어디엔가 묻어나는 ‘밝음’입니다. 유럽의 이색적 ‘가을’ 냄새를 풍기는 곱게 단장한 이, 영락없는 시(詩) 속의 ‘누이’입니다. “놀란 듯이 치어다보는...”

사내의 일요일은 늘 틀에 박혔습니다. 침대와 식탁을 오가는 굼벵이 신세죠. 아님 그리 멀지 않은 어머니 집에 들르거나. 아, 교회에도 가곤 합니다. 거의 대부분 조는 게 일이죠. 일탈은 그래서 언제나 특별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 그리고 만물과 어울리니 열락이고요.

그렇게 세월을 좀먹던 사내가 외출을 하는 참이니 딴에는 화려한 겁니다.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제법 단장도 했습니다. 버스에 전철을 갈아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허전하다 싶었더니 아침을 거른 겁니다. 걱정스럽긴 했지만 이내 맘을 고쳐먹었습니다.

▲ 민주주의를 외치다 조국을 등진 버마인들이 있습니다. 이땅에서 망명자 신분으로 외롭게 살지만 그들이 있어 지구촌 사회는 울긋불긋 아름답습니다. 민족민주동맹(NLD)한국지부 임직원들. 오른쪽 세번째 모자쓴 이가 의장.     © 최방식 기자

▲ 능선에 다가서보니 굴참나무는 벌써 이별준비를 마쳤습니다.     © 최방식 기자

▲ 버마, 그리고 NLD 깃발을 들고 선 NLD한국지부 회원들.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손꼽아 기다리며 길고긴 망명투쟁을 벌이는 이들입니다. 멀리 뒤에 보이는 게 관악산.     © 최방식 기자

▲ 청계산 숲속 한 가운데는 이처럼 곱디고운 빛깔의 천국입니다. 줄기는 또 다른 예쁜 잎을 피우고, 잎은 줄기의 자양분이 되기에 이들 '상생의 이별'은 더욱 아름다운 모양입니다.     © 최방식 기자


사내가 동행할 이들은 버마에서 온 망명자들입니다.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가두고 고문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등 독재정권의 박해를 받다 국경을 넘은 투사들이지요.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외롭고 배고프게 사는 이들을 생각하며 좀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청계산 들머리. 등산로로 들어서는 데 사람이 많기도 합니다. 사내 같은 게으름뱅이가 제법 되는 모양입니다. 아님 사내만 빼고 늘 산천을 즐기는 이들이거나. 초입은 늘 웅성거리게 마련이라 생각하며 인파를 해치며 나아가는데, 오이를 공짜로 나눠주는 이가 있습니다.
 
늦깎이 가을사내의 달음박질
 
웬 떡입니까? 배고프던 차인데. 농협 직원이랍니다. 토종 오이 홍보차 나왔다는군요. 하여튼 고마운 분들입니다. 오이를 뜯으며 한 600여미터 올랐을까요. 잠시 쉬어가잡니다. 쉼터 의자에 앉아있는데, 버마인들이 바쁘게 배낭 속에서 뭔가를 꺼냅니다.

버마산 위스키랍니다. 스카치 종류인데 아마 수입 희석양주인 모양입니다. 자기네 고향에선 꽤 고급이라며 한 잔 권합니다.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마다할 수야 없죠.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참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연거푸 마신게 3잔이나 됩니다.

▲ 초록, 노랑, 빨강 빛깔의 향연은 마치 마네의 '가을' 화폭과도 같습니다. 영랑이 노래한 놀란 '누이'와 붉은 감잎 같기도 하고요.     © 최방식 기자

▲ 애기단풍이 막 단장을 시작했습니다. 노란지 빨간지 분간할 길이 없습니다. 하여, 시인은 불긋불긋하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 최방식 기자

▲ 숲 속 단풍은 이렇게 제각각 입니다. 노랑, 빨강, 초록. 이제 곧 이들 모두는 곤한 여정을 마치고 긴 안식에 들어갈 겁니다. 새롭게 태어나려고...     © 최방식 기자


버마인들이 일곱이 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요리사랍니다. 닭똥집을 버마식으로 요리해 싸왔는데, 맛이 좋습니다. 허기진 배를 술과 안주로 채우고, 기분도 알딸딸하니 발걸음이 상쾌합니다. 다들 두어 잔씩 마셨을 겁니다. 나이 어린 한 꼬마는 곁에서 입맛만 다시고 앉았고요.

정상에 다가서니 놀라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능선 넘어 산봉우리, 숲속 곳곳이 울긋불긋 불타오릅니다. 청계산이 마지막 자태를 뽐내며 이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줄기와 나뭇잎이 제 갈 길로 가는 것이지요. 줄기는 가혹한 세월을 버텨야 하고, 나뭇잎은 일을 마쳤으니 안식을 취한 뒤 줄기의 자양분이 돼야 할 때이니까요.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상생의 이별을 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니 사내가 이 화려하고 즐거운 이별잔치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의 성대한 의식을 축하해야 하니 한 잔 안마시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얽히고설킨, 나처럼 잡종...”
 
낮은 봉우리까지만 오르고 거기서 일행은 또 의식을 치렀습니다. NLD회원들은 세계 어디에 모이든 조국의 깃발과 아웅산 수지 여사가 대표로 있는 NLD당 깃발을 꺼내듭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쏠립니다. 효과 만점인 셈이죠. 한데, 딱한 이들입니다.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이가 없습니다.

▲ 저 길을 벗어나면 다시 일상입니다. 잠깐의 일탈은 그래서 더 짜릿한 맛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슴 한 가득 기쁨과 아름다움을 담아 내려갑니다.     © 최방식 기자

▲ 청계골 당산 느티나무입니다. 수백년을 곧추서 그대들의 형형색색 화려한 자태를 지켜봤습니다. 내 몸은 아직 단장을 마치지 못한 걸 보니, 미련이 남았나 봅니다.     © 최방식 기자

▲ 울긋불긋한 아름다움은 꼭 세상사를 벗어나야 있는 건 아닙니다. 삶의 도처에 얽히고설킨 질서가 존재합니다. 사내가 오래전 살던 아파트의 아름다운 풍경.     © 최방식 기자


하기야, 꼭 말해 뭘 합니까? 그냥 느끼면 되는 거죠. 버마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웃하고 살듯이 말이죠. 말이 안통해도 손짓 발짓 해가며 대화를 하 듯이요. 붉은 당단풍과 노란 싸리나무가 섞여 울긋불긋 아름다움을 연출해 내 듯이요.

그러고 보니, 요즘 한창 세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언행이 생각납니다. 아이 둘이 개 한 마리씩을 데리고 백악관으로 들어갈 건데 버림받은 유기견을 선택하겠다며 이렇게 언급했다죠? “나처럼 잡종으로...”

멋진 사람입니다. 미국 정치인을 이렇게 칭송해본 적이 없는데, 나도 몰래 그리 되는 군요. 사실 잡종 아닌 생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울긋불긋, 빨강노랑, 백인흑인, 동서양이 다 모여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얽히고설켜야 아름다우니까요. 이곳 청계산의 자연처럼. 오바마와 미국처럼. 그리고 이들 버마인들과 우리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 도배방지 이미지

  • 자미 2008/11/15 [23:48] 수정 | 삭제
  • 얽히고설킴이 있는 아름다운 동행에
    저도 잠시 낑겨봅니당~^^
길거리통신, 울긋불긋, 가을여행, 단풍, 청계산, 오바마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