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유관순 누나’가 돼버린 ‘박종철’

“그를 죽인 독재자가 살아있는데... 일해기념공원 만들겠다고?”

박세열 <뉴스툰> 기자 | 기사입력 2007/01/30 [16:11]

벌써 ‘유관순 누나’가 돼버린 ‘박종철’

“그를 죽인 독재자가 살아있는데... 일해기념공원 만들겠다고?”

박세열 <뉴스툰> 기자 | 입력 : 2007/01/30 [16:11]
어렸을 때 일이다. 당시 필자가 살던 곳은 시골이었는데, 그 조용한 곳이 그 해 유난히 시끄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이 무척 춥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읍내 외곽에 자리 잡은 ‘사진 전시회’에 가셨다. 사진을 둘러보던 나는 왜 그런 끔찍한 사진을 전시해야 하는지 몰랐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가 왜 그 사진 앞에서 불같이 화를 내야 했는지도 몰랐었다.

어디에선가 들리는 소리 ‘기호 2번 김대중’, 그리고 어느 사진 속 펼침막의 주인공 ‘박종철’ 이름 세 글자. 그렇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은 광주와 인접한 전라도의 한 시골이었고, 그 날은 87년의 겨울쯤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그 끔찍한 사진은 80년 광주의 비참한 모습이 담긴 것이었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당시 정권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필자에게 있어 87년의 기억은 그런 식이었다. 지난 14일은 고 박종철이 떠난 지 20주기가 되는 날이었고, 전국에서 많은 추모행사가 있었다. 또한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기도 하다. 하지만 ‘군부독재’의 악몽을 벗어난 지금,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박종철에 대해 잘 모른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말은 박종철을 온전히 기억하려 애쓸 필요도 없고, 지금의 세대가 소위 ‘386세대’의 그런 치열한 기억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교과서에 등장할 것이고, 먼 후세대에게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마치 ‘유관순 누나’처럼.

그러나 지금, 박종철을 대하는, 87년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박종철은 벌써 ‘유관순 누나’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가 ‘유관순 누나’가 될 수 있을 만큼 이 사회가 추악한 권력의 허물을 씻어 냈느냐 하는 것이다. 아니다. 아직 괴롭게 살아있을 그를 사람들은 민첩하게 잊어버린 것이다.

29만원으로 꿋꿋이 생을 일궈 나가는 분의 아호인 ‘일해’(日海)를 공원 이름으로 하자는 정신 나간 군수가 있는가 하면,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한 한 유력 정치인은 그 앞에서 오체투지를 감행해 한 해 들을 욕을 연초에 몰아서 듣기도 했다.

20년이나 지나, 이제 교과서에 실릴 한 정의로운 젊은이의 죽음이 이제 와서 요란하게 들춰지는, 혹은 들춰져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죽음을 불러일으킨 추악한 역사를 제대로 심판한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 죽음에 자체와 관련된 많은 사실들 역시 역사의 장막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시사만화가들은 87년을 온전히 경험한 소위 ‘386세대’들이다. 많은 작가들이 박종철 사망 20주기를 맞아 박종철의 얼굴을 신문지면에 소개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마치 87년 민주화 운동을 박제로 만들어버린 주역들의 자괴감처럼 보인다. 그 것은 이제 권력의 중심에 자리하고도 역사의 죄인에게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린 적 없는 ‘마흔 두 살’ 박종철의 친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 손문상 화백 1월 15일자 만평     ©

손문상 화백의 부산일보 15일자 만평은 단연 돋보인다. 손문상 화백의 만평은 뻔득이는 유머감각이 탁월하기도 하지만, 가끔 진지한 주제를 다룰 땐, 감상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작년 지율스님이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손 화백은 땅과 일체되어가는 지율의 모습을 네모 칸 안에 담아냈다. ‘마흔 두 살, 종철아’, 이 한 마디와 군중 사이에 끼어 있는 온화한 표정의 ‘중년 박종철’의 얼굴은 앞서 말한 동시대인의 자괴감과, ‘살아 있을’ 박종철에 대한 연민을 탁월한 필치로 표현해냈다.
▲<한국일보> 배계규 화백 1월 15일자 만평    

경향신문 박순찬 화백의 15일자 ‘장도리’ 역시 불과 20년 만에 ‘유관순 누나’가 된 박종철, 이한열을 생각한다. 그리고 네 컷 만화의 장점인 ‘반전’으로 마무리했다. 한국일보 배계규 화백의 15일자 만평 역시 불편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불편한가? 당신? 물론 불편하다.
▲<경향신문> 박순찬 화백 1월 15일자 4단 만화     © 박병윤

결국 어린 시절, 전두환의 단짝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보아야 했던 나는, 당연히 떨어질 줄 알고, 그 인자해 보이는 눈매와 둥그런 코, 그리고 입가의 웃음을 살인자의 가식이라 마음껏 비난했던 일에 불안해한 기억이 난다. 이것은 권선징악이 아니었다. 후세대는 박종철을 유관순 누나처럼 교과서에서 만나길 바란다. 물론 합리적이지 못한 권력을 쥐었던 군부독재의 추억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역사의 심판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보였다는 평가와 함께 말이다. 30주기, 40주기가 지난 후에는 후세대들이 박종철을 ‘역사속 인물’로 마음껏 생각하도록 놓아 둘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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