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느림보는 언제 돼 본답니까?”

[광화문연가] ‘슬로푸드’ 음식점인 정동 ‘아지오’서 맥주 한잔...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8/07/02 [09:25]

“달팽이 느림보는 언제 돼 본답니까?”

[광화문연가] ‘슬로푸드’ 음식점인 정동 ‘아지오’서 맥주 한잔...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8/07/02 [09:25]
촛불 몇 번 든 기억뿐인데 벌써 7월입니다. 나이 먹을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는 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뭐 그리 중대사도 바쁜 일도 없는데 허겁지겁한 기억뿐입니다. 누구를 이길 것도, 큰 호사를 누릴 것도 없는 데 아등바등 뿐이고요. 이거 달팽이 느림보는 언제나 돼 본답니까?

요즘 들어 자주 보는 친구 전홥니다. 신문로 어딘가 괜찮은 맥줏집이 하나 있다고 일주일 전 쯤 얘기했는데, 거길 가잡니다. 선약이 하나 있었는데 미안하다고 하고는 발길을 옮겼습니다. 광화문에서 천천히 걸어도 10분 거리. 날씨도 더우니 거북이마냥 가보겠다고 좀 일찍 출발했습니다.

늘 그렇듯 광화문 일대가 시끌벅적합니다. 촛불시위를 막으려고 골목마다 전투경찰이 진을 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가는 곳마다 버스와 중무장한 시위진압 경찰 때문에 왕짜증입니다. 툭하면 전철을 통과시켜버립니다. 광화문에서 서대문이나 종로3가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집회참석을 유도하는 꼴입니다.
 
▲ 슬로푸드 음식점인 ‘아지오’ 1층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장작 화덕입니다. 여기에 구운 피자가 일품이죠.     © 최방식 기자

▲ 2층 한 귀퉁이 자리에 앉으면 경희궁 뜰의 아름다운 숲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 최방식 기자


아등바등 삶, 세월은 빠르고...

광화문 일대의 자영업자들은 울상입니다. 제가 다니는 사무실 2층에 호프집이 하나 있는데 손님이 없다고 불평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초저녁에 좀 되다, 경찰이 골목길을 여기저기 막기 시작하면 손님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 텅 비곤 하니까요. 그 분들, 경찰뿐 아니라 촛불까지 미워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녁 7시 30분을 조금 넘겼는데 광화문 일대는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집회에 참여하려는 촛불,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모여드니까요. 청와대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하다 보니 뒷골목 어느 곳 하나 경찰에 점령당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새문안교회 앞을 지나는 데 벌써 골목골목 지켜서고 있습니다.

약속시간이 30여분 남아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지나다니는 사람과 차들을 물끄러미 쳐다봤습니다. 집회와 교통지옥이 두려웠는지 서두러 빠져나가려는 차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행인들은 그리 바빠 보이지 않습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밝은 표정입니다.

삼성병원 앞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10여분이 남았습니다. 사거리에 기념건축물이 있어 살펴보니 옛 돈의문 자리에 세운 나무 상징물입니다. 태조 때 한양성을 세웠는데, 세종 때 돈의문(敦義門)을 추가로 세웠다는 글귀가 눈에 띕니다. 20세기 초 일제가 헐어 흔적조차 없애버렸지만요.
 
▲ 고풍스런 2층 실내 장식품들입니다. 제법 정감을 자아내죠.     © 최방식 기자

▲ 음식을 먹고 나서는데 1층 현관까지 따라 나온 예쁜 종업원 아가씨.     © 최방식 기자


이 동네가 왜 신문로인지 궁금했는데, 이제 풀렸습니다. 돈의문이 추가로 축조되며 ‘새 문’(新門)이라 불렸다는 군요. 새문안교회 이름도 거기서 유래했고요. 가끔 동네이름 뜻이나 유래가 궁금할 때가 있으면 한문을 찾곤 합니다. 우리 이름을 보존했으면 구태여 한문을 찾을 필요가 없을 텐데 아쉽습니다. ‘신문’이 아닌 ‘새문’이 더 좋았을 것을요.

흔적조차 안남은 돈의문에서...

조금 있으니 친구가 나타나 가잡니다. 경희궁 뒤편 언덕 위 한 음식점을 찾아가는 겁니다. 아지오(Agio)라는 이탈리아 음식점인데, ‘편안’하다는 뜻을 가졌답니다. 서대문에 사무실이 있을 적에 몇 번 갔던 곳입니다. 분위기 좋고 맥주 맛 역시 괜찮아 찾곤 했었죠. 홍대 앞과 인사동 어디에도 분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자리는 2층 경희궁 쪽 창가 자리입니다. 궁궐의 아름다운 숲이 잘 보이는 곳이지요. 서울역사박물관 뒤뜰도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생맥주 한 잔, 아님 보르도산 와인 한잔을 마시는 기분은 정말 짜릿합니다. 이탈리아 피자 맛도 일품이죠. 전기 오븐이 아닌 장작불로 달군 화덕에 직접 굽는다는군요.

음식을 주문하려고 종업원을 부르니 예쁜 아가씨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옵니다. 메뉴판에도 그렇고 아가씨 옷에도 달팽이 그림이 선명합니다. 그 아래엔 ‘슬로푸드’라고 써있군요. 이 집을 좋아할 이유가 또 생겼습니다. 하여튼 제대로 찾아온 듯합니다. 느림보가 돼 보는 것이지요.
 
▲ ‘아지오’ 직원들입니다. 손사래를 치는 데 간신히 꼬드겨 촬영에 성공했죠.     © 최방식 기자

▲ 레스토랑 여기저기에 쌓아놓은 이탈리아 전통 요리도구들.     © 최방식 기자


메뉴판을 여니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986년 로마의 스페인광장에 맥도널드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충격 받은 이탈리아 인들이 패스트푸드를 반대하며 벌인 운동이 ‘슬로푸드’입니다. 유기농 야채, 신선한 고기재료, 전통 조리방법으로 정성껏 준비한 음식입니다. 아지오 대표는 세계 슬로푸드협회 회원이며 1992년부터 그렇게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느림보 철학자 피에르 상소가 생각납니다. 다 못 읽고 어딘가에 처박아버렸는데,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저자죠. ‘게으름의 즐거움’, ‘적은 것으로 살 줄 아는 사람들’ 등 재미있는 책을 펴낸 분인데 몇 마디가 생각났습니다. “느림은 우아하고 배려 깊은 것이다... 날 스쳐가는 모든 것들을 천천히 경건하게 느껴가며 살아야겠다.”

와인 한잔에 궁궐 숲 풍취까지

슬로푸드는 딱 이겁니다. 맛의 표준화와 효율화를 반대하는 거죠. 같은 맛, 같은 속도의 끔찍한 ‘정크푸드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겁니다. 종말을 향해 치닫는 브레이크 없는 문명에 제동을 걸고요. 권태와 따분함을 즐겨보는 거죠. 바람의 소리를 듣고, 땀 흘려 가꾸고, 정성들인 요리를 맛보는 거죠. 속도와 편리함의 끝은 맛없음, 비만, 파괴, 그리고 죽음이니까요.

슬로푸드는 즐거운 문화운동이죠. 후세에게 천연의 미각을 살려주는 교육을 중시한답니다. 유기농과 지역 특산물을 애용하죠. 각국 음식정보의 국제적 교류에 힘쓰고요. 표준화 산업문명이 파괴하는 고유의 음식문화를 보전합니다. 국제운동 본부(이탈리아 브라)가 결성돼 50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는 군요.
 
▲ 뜰 한 귀퉁이에 수북이 쌓아놓은 포도주 병.     © 최방식 기자

▲ 제법 자태를 뽐내는 ‘아지오’ 아치형 대문.     © 최방식 기자


독일산 수입 맥주 한 잔을 즐겼습니다. 닭고기 바비큐 요리도 한 접시 시켰죠. 재촉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아야 합니다. 달콤 쌉싸래한 호프의 맛을 혀에서 굴려봅니다. 상큼한 야채와 소스, 매콤하면서 고소한 바비큐, 그리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대화는 미각세포를 깨우고 더위에 지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웁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을 보낸 모양입니다. 옆자리가 하나 둘 비기 시작합니다. 종업원에게 물으니 걱정 말고 즐기랍니다. 맥주를 꽤 여러 잔 비웠습니다. 주의가 고요해 창밖을 보니 궁궐 뒤뜰 초록의 단풍이 살랑살랑 손을 흔듭니다. 단풍의 전송을 받으며 1층으로 내려오는 데 미소 짓고 서 있던 여성 한 분이 즐거웠냐고 묻습니다.

류지영씨라고 그랬을 겁니다. 매니저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희미합니다. 슬로푸드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눴습니다. 음식 값도 치르고요. 절대 안 된다는 걸 간신히 꼬드겨 사진도 몇 장 찍었습니다. 한가한 에세이 하나 쓰면 블로그에 올려놓겠다고 다짐하면서요.

‘정크푸드 제국주의’를 한탄하며

술기운을 이기며 걸어 나오는 데 마당 풍경이 제법 곱습니다. 한 귀퉁이 빈 포도주 병들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영롱합니다. 여름 밤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드는 데, 담장 위 담쟁이넝쿨의 조막만한 잎사귀가 앙증맞습니다. 하늘에선 작은 별들이 하나 둘 반짝이고요. 느린보 달팽이의 취한 눈 깊숙하게 비추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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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흔 2008/07/07 [15:19] 수정 | 삭제
  • 오전 아홉시 첫 시험을 끝내고, 온전히 혼자서 느림의 미학으로 시네큐브에서 를 봤습니다. 듬성듬성 자리한 뒷모습들에게 다가가 가만 어깨를 얹어도 될 것 같은 동지애... 그래서 조조의 영화관을 찾기도 하지요. 살로몬 소로비치의 마지막 대사처럼 "돈은 또 만들면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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