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의 거짓말 은폐, 탄핵 앞에 결국 물러나

소정현기자 | 기사입력 2016/11/26 [11:20]

닉슨의 거짓말 은폐, 탄핵 앞에 결국 물러나

소정현기자 | 입력 : 2016/11/26 [11:20]
박근혜 대통령 하야할까 탄핵수치 감당할까

1974년 8월 8일 닉슨하야 ‘미국 이익 우선’

 

민의폭발 ‘언론 맹활약 의회 결정적’ 수훈감

브라질 여성대통령 국민에 저항에 무릅끓어

 

 
▲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2016년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야한 사건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워터게이트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헌정 사상 전대미문의 국정농락 완결판인 최순실 게이트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공범으로 적나라하게 지목된다. 박 대통령의 설명과는 딴판으로 최씨가 소유한 PC에서 ‘정부 조직과 관료 임명안 기업들 협박과 같은 국정 운영이나 경제 정책, 인사 등의 공무와 관련된 자료들이 나와 최순실 국정 개입 의혹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국정농락은 전방위에 뻗쳐 있다.

 

이제 최순실 게이트의 비등점은 스스로 물러나는 하야와 법질서에 순복하는 탄핵에 온 관심이 쏠려있다.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는 ‘탄핵’과 ‘하야’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리고 있다. 탄핵은 대통령·국무총리 등 고위공무원의 위법 행위에 대해 법적 절차를 통해 파면되는 것이고, 하야는 스스로 사임 의사를 밝히고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박근해 대통령에 대한 탄핵 또는 하야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전 세계 대통령의 사례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2016년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야한 사건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미합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1913~1994)에 대한 탄핵소추로 지금부터 40년이 넘는 1974년 8월 9일 아침 11시에 전격 하야했다.주인공은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M. 닉슨이다.

 

그는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서 탄핵결의안이 가결된(3월 1일) 직후에 포드 부통령에게 자신의 특사를 보장받고 사임 형식을 택했다. 미 국민 전체의 비통한 국치로 충격을 받은 날이다.게이트라는 용어도 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시작된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 정치권의 대형 비리나 스캔들을 말할 때 사용되고 있다.

 
▲ 1974년 8월 8일 닉슨은 하야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박근혜 스캔들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보다 심각한 사건”이라는 평을 내놨다. 이는 현직 대통령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사를 외면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다 결국 하야한 사건이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워터게이트호텔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도청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72년 6월 17일이다. 많은 사람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돼 곧바로 하야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1974년 8월 9일이다. 약 2년2개월 동안 그는 자리를 고수했다.

 
▲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박근혜 스캔들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보다 심각한 사건”이라는 평을 내놨다. 이는 현직 대통령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려다 결국 하야한 사건이다. 

 

 

 

● 의회와 언론의 책무가 결정적 수훈감

 

닉슨은 1960년 대선에서 총 득표수 0.17%6 차이로 케네디에게 석패했고, 처음 당선된 1968년 대선에서도 겨우 0.7% 앞섰을 뿐이었다. 그러하기에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조지 맥거번(1922~2012)이 민주당 후보로 나서자, 닉슨은 재선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72년 11월 7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538명 선거인단 표 중 520표를 얻으며 압도적으로 재선됐다.

 

미국에서 대통령 탄핵 논의가 실제로 진행된 경우는 앤드루 존슨(1868)과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1974)과 지퍼게이트로 위기에 몰렸던 빌 클린턴(1998) 등 3명이었다. 자세히 알아본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닉슨 대통령 재선을 위해 가동된 조직이 1972년 6월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게 발각되면서 시작됐다.

 

백악관 참모들은 1972년 6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비열한 음모를 꾸몄다. 전직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총지휘를 맡고 정보 요원들이 배관공으로 위장해 도청 장치를 설치했지만, 이 장비가 호텔 경비원에게 발각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3년 5월 상원이 워터게이트 위원회를 만들어 청문회를 하고, 그 내용이 TV로 생중계되면서부터다. 그해 7월 13일 청문회에 출석한 알렉산더 버터필드 닉슨 부보좌관이 “1971년부터 닉슨은 집무실에서 이뤄진 모든 대화를 녹음했다”고 폭로하면서 사건의 폭발력이 커졌다.

 

그리고 새로 제출된 테이프에서 닉슨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통났다! 닉슨은 계속해서 워터게이트 사건 및 사건은폐 공작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테이프에는 CIA국장에게 직접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녹음돼 있었던 것이다. 그외에도 주변 측근들과 사건에 관해 논의하는 내용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에 닉슨은 사건 수사 담당 검사(아치볼드 콕스)를 해임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법무장관(엘리엇 리처드슨)이 이에 반발해 사임하면서 급기야 ‘닉슨 탄핵’ 여론까지 번졌다.

 

닉슨은 진실을 밝히려는 검찰 및 의회에 맞서면서 여론이 악화, 의회 탄핵에 직면하면서 결국 불명예 퇴진하기에 이르렀다. 주목할 점은 닉슨이 검찰 수사에 직면해서도 ‘대통령 면책 특권’을 내세우며 검찰 및 의회와 힘겨루기를 거듭한 점이다.

 

그래도 닉슨은 버티려 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탄핵되려면 하원 전체 과반수 찬성 뒤 상원에서 재적의원 3분의 2의 유죄 판정을 받아야 한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이었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이 닉슨의 탄핵 심판에서 유죄표를 던지겠다고 경고했다.

 

상원 법사위는 1974년 닉슨 탄핵안을 상정하기로 했고, 탄핵안 상원 통과가 명료해지자 닉슨은 사건 발생 2년여 만인 8월 9일 대통령직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 주목할 점은 닉슨이 검찰 수사에 직면해서도 ‘대통령 면책 특권’을 내세우며 검찰 및 의회와 힘겨루기를 거듭한 점이다.     
1974년 8월 8일 닉슨은 하야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은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대통령과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의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 문제에 직면한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변론을 위해 몇 달씩 싸움을 계속하게 되면 대통령과 의회 모두의 시간과 관심이 거의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일 낮 12시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뇌물수수 문제로 이미 사임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연방법상 대통령 계승 순위 3위는 하원의장이나 공화당은 소수파여서 하원의장은 민주당이었다. 그래서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포드가 부통령으로 지명 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전에 민주, 공화 양당간에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닉슨이 먼저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제럴드 포드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의회의 인준을 받은 뒤에 사임하였고, 포드가 자리를 승계해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닉슨은 탄핵된다면 형사소추까지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닉슨은 사임 요구를 받아들였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은 그해 9월 여론 반대를 무릅쓰고 닉슨을 사면했다. 닉슨은 사면으로 처벌은 면했지만, 평생을 국민의 따가운 눈총 속에 살아야만 했다.

 

다만 닉슨은 스스로 하야하면서 ‘탄핵 대통령’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탄핵 당했다면 감옥행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퇴임 후 닉슨은 저술 및 외교사절단 역할에 전념해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닉슨을 옹호했던 공화당도 역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닉슨 사임 이후 부통령 대행 체제를 거쳐 진행된 1976년 선거에서 무명의 땅콩 농장주인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대가를 치렀다.

 

대통령 사임까지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선 승리를 위해 도청이라는 비도덕적인 수단을 쓴 점도 문제였지만, 사건의 중심에 있던 닉슨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검찰과 맞서면서 불명예 퇴진까지 자초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는 했지만, 전문가들은 의회와 사법부가 직책을 제대로 완수해 민주주의가 수호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 닉슨은 스스로 하야하면서 ‘탄핵 대통령’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탄핵 당했다면 감옥행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 미국은 3명의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받아

 

미국은 지금까지 3명의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받았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 소추를 받았던 인물은 앤드류 존슨 전 대통령이다.미국의 17대 대통령인 그는 1868년 ‘공무원 임기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상원에서 부결돼 탄핵을 모면했다.

 

24년 뒤인 1998년 민주당 소속의 제42대 빌 클린턴 대통령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렸다. 클린턴은 스캔들 초기 다른 재판에서 “르윈스키와 성적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는 르윈스키가 백악관 동료에게 ‘클린턴과 성적 관계가 있었다’고 말한 녹음테이프를 입수해 클린턴의 거짓말을 밝혀냈다. 당시 의회도 닉슨 때처럼 여소야대였지만 야당이 상원 3분의 2까지 차지하진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하원에선 공화당 주도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지만 상원에선 민주당 의원들이 클린턴에 무죄표를 던져 탄핵안은 가결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민 사이에서도 클린턴에 대한 비판 여론은 있었지만, 닉슨 때와는 달리 ‘탄핵 사유’라는 의견은 적었다.

 
▲ 호세프(68)는 지지자들을 모아 탄핵 반대 시위까지 벌이며 국민에 저항하다 결국 의회에 의해 지난 8월 탄핵됐다     

 

 

●‘브라질 최초 여성 대통령 ‘호세프’도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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