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전책 ‘요코이야기’가 무서운 이유

전쟁 배경으로 일 군국주의를 간과한 ‘이분법적 평화논리’

미디어몹 | 기사입력 2007/01/25 [17:57]

일본 반전책 ‘요코이야기’가 무서운 이유

전쟁 배경으로 일 군국주의를 간과한 ‘이분법적 평화논리’

미디어몹 | 입력 : 2007/01/25 [17:57]
일본의 반전스토리가 무서운 건 전쟁 안 일어났으면 세계가 평화로웠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게 식민지 한국과의 필연적인 차이인데, 한국 작품은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논하면서도 전쟁 이전의 시기를 결코 평화로웠던 시기로 묘사하지 않는다. 식민지 인민들은 전쟁 통에 총 맞아 죽으나 평화롭게 굶어 죽으나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 일본의 군국주의를 간과한 '요코이야기'    © 인터넷저널
<반딧불의 묘>에서는 공습 전과 공습 이후를 물과 불로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요코 이야기>는 한술 더 뜬다. '패전 이전'의 요코네 가족은 '평화로웠다'는 것.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을 겪어야 했지만, 그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게 전쟁 이전의 '평화'와 전쟁은 인과관계에 있다.

무엇이 전쟁을 불렀는가.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른 것이다. 군국주의는 전쟁 직전에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전쟁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세이타와 요코네 가족의 '평화'를 지켜주던 체제에서 탄생했다.

두 작품은 모두 전쟁 통에 개인이 겪는 고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주인공의 부모를 군인으로 설정하면서도, '군인 아버지' 밑에서 지켜졌던 평화의 속살을 드러내는데 인색하다. 세이타 남매와 요코의 아버지가 세상에 없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이타 남매는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었으면서, 왜 그 전쟁을 부른 것이 그들의 아버지임을 말하지 않나. 불타는 고베시에서 덴노 간바이를 외치던 군인은 세이타 남매의 아버지다.

작가는 불의 세계를 냉소하면서, 물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동심이란 미명아래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물과 불은 동전의 양면이다. '군인 집안이라 없는 게 없었던' 체제 덕택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요코는 전쟁을 반대하고 민간인과 군인은 다르다면서, 왜 자신을 강간위협에 시달리게 한 사람이 아버지임을 인정하지 않는가. 일본정부는 중국과 한국에게 사과해야 된다면서 왜 '패전 이전'은 누군가에게 전쟁보다 더 끔찍했다고 말하지 않나.

미국이 침략해 오기 전만해도 왕궁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후세인 딸내미가 있다고 치자. 그녀가 전쟁 통에 쿠르드족에게 강간당했다고 자신이 시대의 피해자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이라크전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감동적이겠지만 미국인들이 보면 ‘쉣따빡’일 것이다.

전쟁 이전을 '평화롭던'시기로 여기는 그녀와 이라크 인민의 반전(反戰)이 같은 의미일 수 없다. 그녀가 후세인이 전쟁을 불렀다고 말하기 전까지 이라크 인민과의 인간 대 인간으로의 대화는 요원한 것이다.

전쟁을 부른 체제의 수혜자가, 전쟁 때문에 그 체제가 무너졌다고 '똑같은 피해자'라니. 전쟁을 부른 체제에서 억압받았고, 전쟁 때문에 다시 한 번 피해를 본 한국 인민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다.

무엇이 전쟁을 불렀는지를 성찰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무슨 놈의 반전이고 세계평화인가. 한국인들은 왜 입으로는 전쟁을 반대한다면서 전쟁을 부른 체제의 수혜자로서의 삶을 미화(명백하게)하는 그들을, 단순히 여성과 애들이라는 이유로 맞먹게 내버려두는가. 이분법적 논리라는 건 딴 게 아니고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의의지(http://www.mediamob.co.kr/Basc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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