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주몽·연개소문 제발 보지말아요”

[참교육이야기]‘힘의 논리’ 왜곡된 가치관 길들이는 ‘나쁜 드라마’

바이러스 | 기사입력 2007/01/25 [17:40]

“사극 주몽·연개소문 제발 보지말아요”

[참교육이야기]‘힘의 논리’ 왜곡된 가치관 길들이는 ‘나쁜 드라마’

바이러스 | 입력 : 2007/01/25 [17:40]
“사극을 보지 마라.”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 한 분의 지론이다. 사극이 역사적인 사실(史實)만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픽션을 사실(事實)로 보는 시청자의 수준 때문이 아니다. 사극이라면 하나같이 사랑타령이나 왕이나 귀족의 업적중심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사극이라는 것 자체가 민중사는 없고 왕의 이야기나 귀족, 양반 중심의 이야기만 전개하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서민대중인 민초들이 사극을 보며 역사의식은커녕 영웅사관에 의한 역사관만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

사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잘생기고 멋진 탤런트이고, 노비나 서민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못생기고 추하고 굽실거리는 비굴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사극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주인이 민중이 아니라 왕이나 잘난 귀족이라는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가난과 어려움이 못 배우고 못난 자신의 탓 때문이라는 운명론적 가치관을 학습하게 된다.
▲사극이라는 것 자체가 민중사는 없고 왕의 이야기나 귀족, 양반 중심의 이야기만 전개하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인터넷저널

“못생기고 가난뱅이는 가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착시현상이 진리일 수는 없다. 그러나 외모가 준수하고 걸친 의복이 고급스러우면 일단은 한 수 위로 보이게 마련이다. 속으로야 아무리 육도삼략이 들어 있다하더라도 겉보기가 꾀죄죄하고 추하게 보이면 한 점수 깎인다. 나중에야 실력이 드러나고 본질이 보이겠지만 선입견이란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첫 인상이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렇잖아도 상업주의문화가 만들어 놓은 착시현상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회양극화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경쟁이나 효율이 살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분배나 기회균등 같은 공공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매도당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막가파식 상업중의가 판을 치고 있다. 결혼상대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사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잘 생긴 사람’, ‘돈 많은 사람’,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을 선호한다. 잘 생긴 사람과 잘 생긴 사람이 결혼하면 더 잘생긴 2세가 태어난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제대로 된 태교에서 친환경적인 음식을 먹고 자라면 어떤 모습으로 사람으로 자랄까? 사회 양극화는 이래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일까?

잘 생기지도 못한 사람,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어 그만그만한 사람이 결혼해  2세가 태어나고 어려운 여건에서 제대로 먹을 것도 못 먹고 자라면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생김새는 제쳐두고라도 건강문제 하나만 보자. 산모가 출산에 관련된 지식이 있고 정기적인 검진을 받고 태어나 오염되지 않은 친환경농산물을 먹으면서 주치의의 진단을 받으면서 자라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누가 건강하게 자랄까?

 “개천에선 용 안난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느니 ‘가난한 집 아이가 공부를 더 잘 한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신문을 장식하곤 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어쩌다 구두닦이를 해가며 주경야독한 학생이 고시에 합격했다는 입지전적 얘기조차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개천에서는 절대 용이 나지 않는다’는 류(類)의 기사가 종종 보인다.

공정하지 못한 경기는 게임이 아니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건, 머리가 좋건, 아니면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번다는 얘기를 문제 삼자는 게 아니다. 어차피 자본주의 체제니까 자본의 논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육과 의료와 같은 부분은 다르다. ‘사회계약설’과 이념에 따라 성립된 자본주의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본적 가치를 전제로 성립한 것이 사회다. 모든 경쟁이 선이라는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사회란 존재해서도 안 되지만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기회균등이나 공공성이니 하는 가치를 근본이념으로 하는 ‘공화국’에서 출발하고 있다.

승패가 결정된 게임은 게임으로서 가치도 없거니와 그런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나 다름없다. 교육 분야를 보자.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양극화가 한계상황에 도달한 나라에서 교육이 수월성을 바탕으로 한 경쟁논리로 가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다 모든 경쟁구조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유리한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면 결과는 뻔하다. 국영수중심의 교육과정편성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방학이 되면 언어연수를 하면서 자란 아이와 학원에도 다녀보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과 경쟁이 되겠는가? 의대에 다닐 정도의 머리가 있어도 가정에서 뒷바라지를 해 주지 못한다면 의사가 되기는 쉽지 않다. 고시도 마찬가지다. 대학에 다니면서 고시에 합격할 정도가 안 된다면 일 년에 수백, 수천만원 이상 들어가야 가능한 준비를 1~20년간 할 수는 없다.

 “약자 각성 없인 안된다”
교육뿐만 아니다. 의료분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가치로 설정한 체제에서 돈이 없이 치료를 못 받거나 살릴 수 있는데도 돈이 없어 죽어간다면 이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살인이다. 능력이 있어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나 돈이 없어 고통스럽게 생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방치한다는 것은 ‘사회’라 할 수 없다. 사회라는 틀이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가치가 ‘공공성’이다. 이러한 공공성을 포기하고 ‘경쟁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체제 부정세력이다. 이제 기만적인 '공화국시대'는 마감해야 한다. 사회양극화는 제도가 낳은 결과다. 소득 재분배나 공공성을 실현할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힘의 논리가 선이라는 강자의 힘에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정의나 공공성의 실현은 약자의 각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김용택(합포고 교사)
(바이러스 뉴스 보시려면 클릭)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