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의 폭력시위 엄벌 요구 서글프다

[편집위원장 칼럼] 출세를 위한 변절이라도 최소한의 금도는 지켜야.

임두만 | 기사입력 2015/12/06 [11:34]

김문수의 폭력시위 엄벌 요구 서글프다

[편집위원장 칼럼] 출세를 위한 변절이라도 최소한의 금도는 지켜야.

임두만 | 입력 : 2015/12/06 [11:34]
▲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신문고 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제2차 민중 총궐기대회가 열리는 12월 5일, 여러 걱정에 아침에 뉴스검색을 하다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관련기사 몇 개가 보여 읽었다.
 
특히 김 전 지사가 3일 국회에서 열린 제18기 새누리 정치대학원 수료식 특강에서 "대통령이 안 계시는데 거기 들어가겠다고 경찰차를 부수고 하는데, 야당은 이를 과잉진압이라고 하면서 살수차 예산을 깎는다고 한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있음을 보았다.
 
관련된 언급 중 대구 험지는 일단 그렇다 치고....김 전 지사가 말한 ‘거기’는 당연히 청와대다. 즉 김 전 지사는 시위대가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앞서 김문수는 지난 11월 16일 “서울도심 폭력시위로 경찰차량 50대가 부숴지고, 경찰관 113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불법폭력시위 주동단체에 대해서는, 공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앞으로 집회를 원천 불허해야 합니다. 폭력시위자는 엄중 처벌해야 합니다. 공공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착한 다수가 나서야 합니다”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썼다.

    

격세지감이다. 폭력시위를 말할 때 김문수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이상하다. 김문수는 5.3인천사태를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86년, 전국은 시위로 들끓었다. 30만이 운집한 광주 대회, 10만 명이 모인 대구 대회 등 민주화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시민 저항운동은 일부 과격한 운동단체에 의해 극렬한 폭력시위가 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시위탄압에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당시 야권의 두 지도자인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6년 4월 29일, 민추협 사무실에서 "일부 소수의 과격한 주장을 담은 시위는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다음 날인 30일 전두환과 여야 영수회담을 한 이민우 신민당 총재도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분개한 소수의 재야와 운동권 세력은 신한민주당을 극렬 비난했다.

 

그리고는 신한민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5월 3일, 대회 장소인 인천시민회관 앞에서 대회 시작 전부터 격렬한 시위를 벌여 경찰이 투입되었다. 이 시위로 결국 대회는 당 지도부가 대회장에 입장도 못하고 무산되었다.

    

이에 수만 명의 시위대는 도로를 장악하고 시위를 하다가 오후에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과 대치, 스크럼을 짜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충돌했다. 특히 이날 시위대는 신민당의 각성, 이원집정(二元執政) 개헌 반대, 국민헌법제정, 헌법제정민중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등 민중이 직접 정치에 개입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결과는 이 사태로 319명이 연행되었고 129명이 구속되었으며, 신민당과 재야의 공조가 깨졌다.  또 ‘폭력시위’라는 말이 이때부터 나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 사태의 주역이 김문수이기 때문이다.

    

김문수의 운동권 경력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서울대 사회대 재학 중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이후  김근태 등과 함께 구로공단 노동자로 위장취업한 후 노동운동에 뛰어든 뒤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1978년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85년 서노련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86년 5.3 인천사태를 주도했다.

 

그리고 인천사태 주도혐의로 체포 구금되었다가 재판에서 2년 6개월 실형을 받고 복역 중 87항쟁으로 민주화가 되면서 1988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된다.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민중당 사무총장, 구로갑지구당 위원장,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1994년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말을 남기고 김영삼이 이끄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따라서 그의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가 출세를 위해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했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다. 그가 극도로 칭찬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48년 여수 순천 주둔 29연대 반란사건 당시 군(軍)내 공산당원으로 체포되어 세포조직을 다 불고 전향하면서 출세길을 놓았으니 그것을 따라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자신이 주도했던 5.3 인천사태의 주역들인 심상정 정의당 대표, 이호웅 전 민주당 국회의원 등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것인데 지난 11월 14일 시위를 두고 “불법폭력시위 주동단체 시위불허, 주동자 엄중처벌” 운운하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의 민주화 운동가 처벌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날 대회에서 김문수는 대구 수성갑을 험지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텃밭이자 천국이라며 친박도 비박도 대구 공천을 획득하려고 당내외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데, 그곳이 험지라서 당이 자신을 차출했다고 말했다. 얼굴을 들고 그리 뻔뻔하게 말할 수 있으니 변절도 하는 것이다. 지금 누가 새누리당에게 대구를 험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얼굴 뻔뻔한 김문수니까 가능하다.

 

그러니 그가 어떤 일을 해도 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매우 차갑다. 경기도지사를 2회 연임한 여권 내의 중진이라지만 갤럽이 조사한 11월 둘째주 차기 지도자 조사 부분에서 전국 2% 지지율로 유승민의 3%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지율로 여권 내 4위에 그쳤다.

    

그래서다. 아무리 입장이 바뀌어서 권력이 탐이 난다고 사람이 생각까지 이렇게 바뀌는 것은 참 서글프다. 그는 1951년 생...한국전쟁이 50년에 발발했으니 그 시기 1~2년 차이 출생자들은 다들 전쟁세대로 부르므로 그와 나는 동년배다. 60대 중반을 넘겨 70줄로 들어가는 우리 나이에 아직도 권력에 탐심을 가지고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한다니 서글프지 않은가?

원본 기사 보기:신문고뉴스
  • 도배방지 이미지

김문수 폭력시위 엄벌 발언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