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 동시다발집회 생중계 성공하고 보니...”

22일 ‘민중총궐기’ 전국생중계하는 ‘노동방송국’ 스튜디오엔 긴장감

이정미 기자 | 기사입력 2006/12/22 [20:13]

“8개 동시다발집회 생중계 성공하고 보니...”

22일 ‘민중총궐기’ 전국생중계하는 ‘노동방송국’ 스튜디오엔 긴장감

이정미 기자 | 입력 : 2006/12/22 [20:13]
“전화벨과 고함소리로 편성실은 시장 한복판 싸움판을 방불케”

8시간 생중계 마친 뒤엔 ‘뿌듯’
“민중의소립니다. 5분 후에 전화를 걸테니 현재 상황을 정리해주세요.”
“경기지역 5분 전 영상 올라왔습니다.”
“광주에서 경찰이 테이저건(전기충격)을 싸서 노동자가 맞았대요.”
“아나운서한테 속보 넘기고 광주에 영상 올리라고 전화해줘요.”
▲ <민중의소리> 노동방송국 식구들     © 인터넷저널

조종실과 스튜디오가 시장통 같다. 지역 주재 기자들에게 전화하는 이, 현장 영상을 확인하는 사람, 속보를 전하고 정리하는 아나운서. 스튜디오와 조종실에 있는 11명의 일꾼 이마엔 구슬땀이 흐른다. 뉴스 속보들이 긴박하게 쏟아져 들어오며 스튜디오도 마치 시위현장과 진배없는 모습이다. 1차 민중총궐기가 진행되던 지난달 22일 ‘민중의소리’ 노동방송 편성국의 모습이다.

진보진영 전체가 움직이는 민중총궐기를 생생하게 전달하자는 취지에서 민중의소리는 시위현장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기로 결정했다. 신속한 영상 속보로 인터넷언론의 특성인 속보성을 자랑해왔던 민중의소리 노동방송국은 한 발 더 나아가 전국 연결 인터넷 생중계에 도전했다.

그간 인터넷 생중계는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집회나 강연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거기서 한 발 나아간 것이 2002년 여중생사망사건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던 촛불대행진 중계였다.

당시 민중의소리는 10만이 모였던 시청 앞 촛불대행진뿐만 아니라 미대사관 행진을 생생하기 전달하기 위해 5분 늦은 현장생중계를 진행한 바 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미대사관을 향하는 행렬들을 쫒아 카메라 기자들이 촬영을 하고 기자들이 5분마다 테입을 나르고, 아나운서들은 현장 상황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카메라 기자들은 행진 대열의 맨 앞에 위치해 있었고, 기자들은 야외 스튜디오가 마련되어있던 시청 앞 광장까지 시위대와 전경을 뚫고 달려왔으며, 아나운서들은 대본 없이 즉석에서 멘트를 날려야했다. 10여명의 스텝들이 숨 가쁘게 뛴 결과 세계 12개국에서 100만명이 촛불대행진에 함께할 수 있었다.

올해의 민중총궐기 전국 동시 생중계는 한 발 더 나아간 시도였다. 2002년의 경험과 진보언론의 책임감으로 전국을 연결해 인터넷 생중계를 하자는 결의가 모아졌다. 형식은 2002년과 같은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즉, 스튜디오에서 아나운서가 전국 상황 설명을 하고 각 지역별 상황을 10여분 차이로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집회시위가 전국 8개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전국 각 집회장소로 민중의소리 기자들이 파견되었지만 영상 취재까지 담당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영상 생중계의 생명은 현장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다. 더군다나 집회보다는 시위가 중심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안정된 편집 장소와 다수의 인력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 미디어실천단이었다. 민주노총 미디어실천단은 노동방송국 아카데미를 수료한 노조 영상패를 중심으로 꾸려졌으며 그간 현장 영상 제작 활동을 해왔다. 22일 총궐기 생중계 계획을 제안하자 ‘다들 한 번 해보자’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인터넷 전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집회 장소 근처에 인터넷 회선을 신청하고 지역별로 사람을 배치했다. 미디어실천단이 없는 전북과 강원지역은 서울과 광주지역에 있는 실천단원이 파견을 가기로 했다.

인력 배치가 끝나고 교육이 진행되었다. 세부 콘티와 대본이 완성되었고 모두가 처음 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속보용 영상을 위한 촬영법, 인코딩, 서버 업로딩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었다. 물론 온라인을 통해서. 스튜디오 스텝 역시 마찬가지로 교육과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지리적 여건상 포기하고 있었던 제주 지역에서도 막바지에 실천단에 가입하겠다는 연락이 와서 말 그대로 전국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마침내 22일 아침. 민중총궐기는 1시부터 시작이었지만 오전부터 사무실은 바쁘게 움직였다. 다시 한 번 역할을 확인하고 오후 1시 인터넷 생중계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계획과 실제 상황은 달랐다. 머리에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손발이 척척 맞지 않아서 처음에는 스튜디오는 난장판 그 자체였다.

수신호가 맞지 않아 목소리가 커졌다. 애초에 써놓은 대본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아 즉각적인 대본을 써야했고 대본 없이 진행해야 되는 아나운서의 얼굴에는 긴장이 흘렀다. 전화 연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수도 없이 전화를 돌리고 촬영 지시를 하는 전화로 조종실도 정신없이 굴러갔다.

두시간정도 흘렀을까. 눈짓만으로도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하자 슬슬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현장에 있는 기자들과 실천단도 익숙해져서 예정대로 척척 진행되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경찰과 충돌이 생기면서 또 다시 스튜디오는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영상을 독촉하고 현장과 전화 연결을 하고 연달아 속보를 전달해야만 했기에 아나운서를 비롯한 모든 스텝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지막 촛불 집회를 보도하고 총정리 인터뷰를 진행할 때까지 긴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8시간동안의 인터넷 생중계가 끝났다. 다들 종일 김밥 몇 줄로 하루 끼니를 때웠지만 민중총궐기에 한 몫 했다는 자부심으로 뿌듯한 하루였다. 그 어떤 언론사도 할 수 없는 일을 35명의 실천단과 11명의 스텝이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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