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안에 구현된 공간·시간 ‘동시성’

6·10민주화운동 20년 차이를 대비(對比)하는 세 컷의 시사만평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07/06/22 [14:15]

네모 안에 구현된 공간·시간 ‘동시성’

6·10민주화운동 20년 차이를 대비(對比)하는 세 컷의 시사만평

박세열 기자 | 입력 : 2007/06/22 [14:15]
“권력을 자처한 언론 반성하지 않고...”

 통상 미술 등에서 쓰이는 용어인 대비(對比)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일단 대비라는 것은, ‘대(大) ·소(小), 빨강 ·파랑, 기쁨 ·슬픔 등과 같이 성질이 반대가 되는 것, 또는 성질이 서로 다른 것을 경험할 때 이들 성질의 차이가 더욱더 과장되어 느껴지는 현상’(네이버 사전)을 말한다. 그리고 대비는 ‘동시 대비’와 ‘계기 대비’를 포함한다. 동시 대비는 공간적인 의미로 한 공간에 두 가지 다른 성질의 이미지를 함께 두어 효과를 보는 것이고, 계기 대비는 시간 순으로 다른 성질의 것을 배열해 순차적으로 이미지를 두어 효과를 보는 것이다.

한 작품이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담아내기란 사실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가능한 경우가 있다. 작품에 인위적인 의미를 담아낼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그 의미를 성취하려는 의도는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당파 대비 강렬해”
▲<사진1>  노컷뉴스, 권범철. 6월 11일자.   © 인터넷저널

특히 ‘정치성’ 혹은 ‘당파성’을 띌 경우에 대비 효과는 더욱 강렬해진다. (일반적 의미의 정치성과 당파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시 대비이면서도, 그 두 대비되는 이미지는 시간성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성을 쟁취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 즉 다음과 같은 그림을 보면 두 종류, 공간과 시간의 대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사진1 참조>

이렇게 동시 대비와 계기 대비는 한 공간 안에 교묘하게 섞여 사람들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다른 성질을 가진 대비가 모순을 뛰어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공간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사만화다.

20년 전과 지금을 아무리 효과적으로 대비하는 칼럼이 있더라도 시사만화만큼 변화한 현실을 극적으로 나타내 주는 매체는 단연코 없다. 시사만화는 간혹 논리의 틀을 뛰어 넘는 의미 전달의 가능성을 보인다. 물론 풍자도 치밀한 논리와 계산이 필요한 것이지만, 이미지의 힘이라는 것은 언어가 메워줄 수 없는 사각지대를 채워주는 지점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계기 대비’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없는 매개체다. 당연하게도 언어는 의미 전달을 위해 ‘시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간은 기억이 없으며 결과를 남기지 않는 순수한 사건이다’라고 정의한다. 시간은 결과를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을 관통한 인간은 결과를 남긴다. 당연히 그 결과는 ‘언어’로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망각의 시간을 담아두는...

 즉 시간이라는 위태로운 외줄 위에서 의미는 부서지고 깎이고 덧붙여진다. 그 것을 보완하는 것이 ‘논리’의 틀이고, 바로 ‘글쓰기’의 ‘정형화’인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전달하려는 본래 의도를 벗어날 수 있고, 또 의미 전달이 잘 되었다 할지라도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시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사만화는 민주화 20년의 변화한 현실, 즉 원래 성취했던(혹은 성취했다고 느꼈거나, 원래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판단들의 기본에 깔려 있는 ‘민주주의’라는 추구점) 6·10항쟁의 의미와 현재 왜곡된 현상으로 구현된 모든 부조리들을 표현하기에 바빴다.
▲ <사진2>  미디어오늘 이용호. 6월 11일자.  © 인터넷저널

그리고 그렇게 구축된 시사만화의 이미지를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대비의 두 의미를 공존시키며, 언어가 할 수 없는 새로운 감상을 구현해 인물의 단순 대비를 넘어서 20년이라는 시간을 한 칸에 표현한다. 미디어오늘 이용호 화백의 6월 11일자 만평(사진2)이 그렇다.

언론은, 고종석씨가 표현한 바, ‘그 자신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혜택을 본’ 민주주의의 ‘무임승차자’다. 느끼하면서 단호한 말투로 ‘전두환 각하가 방미 길에 단비를 몰고 왔다’고 ‘선전’하던 그 방송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케케묵은 자료들을 뒤져 ‘그때 그 사람들’ 풍으로 당시 스스로의 행태를 비판한다. 자아 분열이다.

그게 왜 가능하겠는가? 독재자의 권력을 땅으로 끌어내린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양심적인 기자들이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 것을 너무 쉽게 잊은 언론들은 스스로 ‘권력’이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20년 무임승차와 자아분열

 노무현 정권의 최대 성과라 한다면(물론 평자마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기엔) 바로 언론의 활성화다. 그것이 안티조선 운동이든, 한겨레에 1000만원을 기탁한 행위든, 혹은 ‘입으로 하는 정치’든 (비록 누더기지만) 신문법을 통과시킨 것이든 언론의 자율성, 그리고 ‘권력화’가 가능하도록 판을 닦아 준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노무현 대통령이다. 이용호 화백은 노무현의 이런 공과(?)를 그의 묘한 표정을 통해 묘사해준다.
▲ <사진3> 경향신문 김용민. 6월 11일자.    © 인터넷저널

칸을 나누지 않아도 대비는 가능하다. 시사만화 작가들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과거의 인물을 현재에 배치할 수 있다. 이 때 시공간은 무너진다. 언어가 힘겹게 구축했어야 할 논리들을 단 한 순간에 표현해준다. 최병수와 무명의 미대생들이 그린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앞으로 ‘감히’ 전두환이 지나가는 이미지(사진3,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세상 6월 11일자)가 그렇다. 실제로 6.10 기념일을 맞은 연세대 교정에는 이 걸개그림이 걸렸다.

가끔은 상상해 본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가 지금, 현재, 2007년 서울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그들은 지금도 탱크를 동원해 쿠데타를 할 것이며, 전경들을 불러 시민들의 입을 막을 것이며, 언론사 통폐합을 하고, 직선제를 철폐하며, 공산당을 ‘북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고 정신병원이나 경찰서에 신고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비이성의 시대를 통과해왔다. 그리고 20년 이라는 숫자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재는 바로미터로 의미가 있든 없든, 독재자들의 만행만큼은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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