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장악 6·25발발 당시 군수뇌부

일왕에 충성맹세 친일파 장군들에 의해 무너지고만 대한민국

편집부 | 기사입력 2011/06/25 [01:57]

친일파 장악 6·25발발 당시 군수뇌부

일왕에 충성맹세 친일파 장군들에 의해 무너지고만 대한민국

편집부 | 입력 : 2011/06/25 [01:57]
올해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일어난 지 61년 되는 해이다.
 
당시 우리 국군은 전혀 전쟁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북한의 기습공격에 밀려,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당하고 낙동강전선까지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무슨 이유 때문일까? 우리는 북한군의 탱크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탱크부대를 저지할 장비가 없어 수류탄으로 육탄 방어했다고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다. 인민군은 남침 준비를 철저히 했고, 우리는 전혀 전쟁을 대비 안 했다보니, 초기 전투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6.25 전쟁을 상세한 해설한 책이 출간되어 화제를 끈 적이 있다. 전 원광대 정치학과 소진철교수가 쓴 책으로 한국학술정보(주)가 출간한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이다. 이 책에는 6.25 전쟁과 관계되어 해방 이후 전개된 주변국들과 남.북간의 정치.외교 등 모든 사항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거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전쟁에 대한 많은 비화와 진실들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선 남북학 간의 군사력 비교와 장비 비교가 눈길을 끈다. 물론 전쟁 발발 1년 전 자료이기는 하지만 이 표에 따르면, 남과 북은 거의 대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래 도표에 따르면, 인민군은 T-34 전차를 64대 보유하였고, 국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합쳐 6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전쟁 발발 시, 인민군은 150대의 T-34 탱크로 무장한 1개 기갑사단이 참전하였고, 국군은 탱크는 없었고 약간의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라 한다.

조선일보 1987년 5월 20일에 ‘역사는 흐른다’에 기고된 것은 “한국군에 탱크가 배치되지 않은 것은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W.Robert 준장의 정책 오판의 결과이다. 그는 평소에 한반도에서는 탱크전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도로는 협소하고, 여기저기에 있는 논 때문에 지반은 약하고, 또한 산이 많아 북한군은 도저히 탱크전을 시도하지 못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한다.”즉 한국의 지형에는 탱크가 거의 무용지물이란 얘기다. 

여하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국군이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단지 탱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불과 1년 전에 대등했던 전력이 아무리 소련의 군사지원이 있었다 하더라도 1년 사이에 확 뒤집어 질 수는 없다. 6.25 초기 작전의 실패는 장비의 열세도 있기는 했지만, 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정신전력의 부재가 가장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6.25 발발 1년 전의 남.북한 군사력 비교.  거의 대등한 전력이다.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에 수록자료
▲   6.25 발발 1년 전의 남.북한 군사장비 비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비슷하다.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에 수록된 자료

 우선 “국군은 북한 측의 위장평화공세인 ‘정치협상제의’가 강화되자 수일 전에 해제한 비상경계태세를 다시 내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소장은 6월 11일 16시를 기해 전 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나, 이 경계는 적의 이동배치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23일 24시에 해제했다고 한국홍보협회의 전게서는 밝히고 있다. 그리고는 6.25 전쟁 발발 당일 많은 장.사병들이 근무지를 이탈해 휴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비상해제 후 이틀만의 불의의 기습은 북한이 준비한 것이기도 하지만, 국군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행동을 한 국군의 수뇌부는 누구였기에 이런 기도 안 막히는 명령을 내린 것일까!
 

당시 국군의 수뇌부는 거의 일본군 출신 

이승만정부는 친일청산은 커녕 오히려 친일파를 중용해 국가정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군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치하에서 일본군에서 간부를 지낸 친일파들이 한국군의 수뇌가 되었던 것이다. 6.25 발발 당시 국군의 수뇌부들은 다음과 같다. 전쟁 발발 직전인 6.10일 자로 참모총장 채병덕소장은 사단장의 전면교체를 단행하는 군 수뇌 인사를 하여 내부의 혼란을 이미 야기시킨 상태였다.

제2사단장 : 이형근 준장                     제7사단장 : 유재흥 준장
제6사단장 : 김종오 대령                     제8사단장 : 이성가 대령
수도경비사령관 : 이종찬 대령             작전국장 : 장창국 대령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소장과 각 사단장들의 이력을 보면 아래와 같다  

국방부장관 신성모 (1891 ~ 1960.)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마친 후 중국 난징해양대학[南京海洋大學]과 영국 런던항해대학을 졸업하고, 1등 항해사 자격을 취득한 이후 영국 상선의 선장으로 일했다. 
8·15해방 후 귀국하여 
1948년 9월 결성된 이승만 계열의 우익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초대 단장을 지냈다. 
이후 제2대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1949년 3월 국방부장관에 취임하여 6·25전쟁을 맞이했다. 
1950년 4~11월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기도 했으나,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국사건으로 국방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위 경력에서 보듯이 신성모장관은 군하고는 아무 인연이 없었으나, 영어를 잘하고 이승만에게 잘 보여 일약 국방부장관에 기용된다. 군대에 문외한인 국방장관이 지휘하는 나라가 어떻게 전쟁에 이길 수 있었겠는가! 질라고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인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싸우기도 전에 전쟁에서 진 상태였다. 
 
 
▲  부산 태종대에 서있는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흉상. 우리나라 해양 발전에 공로가 크단다(?)


채병덕(蔡秉德, 일본식 이름: 大島秉徳, 1914년 ~ 1950년)

 
▲  6.25 당시 육균 참모총장 채병덕소장
평안남도 평양에서 채관수(蔡觀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종로공립보통학교와 평양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6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49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그 뒤 일본군 포공학교를 졸업, 병기장교가 되었다. 

해방 후 장사를 하다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1946년 1월 15일 졸업 후 바로 정위(正尉: 현재의 대위)로 임관, 같은 날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장을 맡았다. 또한 1 보급 부대장·병기 부대 사령관·후방 부대 사령관·제4 여단장 등을 지냈다.

1948년 8월 통위부 참모총장, 1948년 8월 16일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48년 12월 육군준장으로 승진하였다. 1949년 2월에는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49년 5월 국방부의 기구간소화로 종래의 육·해군을 통합 지휘하던 국방부 참모총장제가 폐지되고 국방부장관이 통할하게 됨에 따라 1949년 5월 9일 제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

총참모장 재직 중 전력 증강을 위한 부대 증설, 교육 강화를 위한 각종 군사학교의 신설, 북한 대남유격대의 토벌 작전 수행 등의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49년 10월 남북한간의 물자교역과정에서 발생한 남북교역사건 및 제1사단장 김석원과의 갈등으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 예편되었다가 1949년 12월 14일 국방부 병기 행정 본부장으로 복귀하였고 1950년 4월 말에 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 시, 야전군 지휘 경험이 없는 병기 장교 출신으로서 참모총장으로서는 문제가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 정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38선에서의 무력 침공 사건이 발생하거나 대남유격대가 준동할 때마다 비상경계의 형식으로 대처하였고, 또한 그것으로 실효를 거두었다. 이에 정보국의 정보 분석과 북한 남침 경고를 무시하였다가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오후 국무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결국 한국전쟁 초기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1950년 6월 30일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어 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이란 직책으로 좌천되었다. 맥아더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쿄에서 날아와 잠시 이승만을 만났을 때 채병덕의 해임을 건의했다고 한다. 사태 수습책을 묻는 맥아더의 질문에 채병덕이 “200만 남한 청년들을 동원해 훈련시켜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답하자, 맥아더는 그 자리에선 칭찬한 뒤 이승만과 단둘이 있게 되자 바로 “채병덕을 다른 사람으로 갈아치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1950년 7월 23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채병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 이 명령으로 채병덕은 남해안을 돌아 공격하여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인민군 6사단의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전사했다.(하동전투) 훗날 채병덕 살해 음모가 제기되기도 했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채병덕이 전사하자 1계급 특진시켜 중장을 추서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있는 육균참모총장 채병덕의 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올린 인물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인물이다???  뭔가 정부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지.....


신성모, 채병덕과 함께 대한민국을 망하게 할 뻔한 국군 수뇌부 6인방 중 4명이 일본 육사 출신이고, 일본군 징병장교 출신이 1명이다. 그리고 1명만이 독립군의 후예일 뿐이다. 6.25 때 6사단(김종오대령)과 8사단(이성가대령)은 초기 작전에 실패하지 않았다. 6사단장 김종오대령은 징병으로 일본군 소위로 근무하였고, 8사단장 이성가대령은 독립군의 후예로 중국 군벌 장교로 복무했다. 동부전선의 이 두 사단의 선방으로 인민군은 초기 작전에서 많은 지장을 받았다.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은 것도 바로 이 두 사단 덕분이었다. 만일 유엔군이 상륙하기 전에 부산까지 함락되었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이 땅에 없었을 것이다. 6사단장 김종오대령과 독립군의 후예인 8사단장 이성가대령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인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 육사 출신이면 모두 일왕에게 충성 맹세를 했던 사람들이다. 사관생도로서 충성맹세라 함은 자신의 영혼을 일왕에게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인으로의 영혼은 없어진 이런 인간들이 해방이 되어 일제가 물러가자 숨어 지내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이승만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물고기가 다시 물을 만난 듯이 제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국군의 핵심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들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일본육사 출신들은 조선일보와 같이 일본왕에게 충성맹세를 하여 영혼을 바쳤다.


2 사단장 이형근(李亨根, 일본식 이름: 松山武雄)

1920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나,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의 사위이다.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 포병 대위로 복무하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월 15일 1기로 임관하고, 국방경비대 제2연대장을 맡았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의 군번 "1번"인데, 당시 군번은 조선경비대 입소 선착순 1번을 의미하였다. 이어서 1946년 5월 1일에 초대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을 맡았고, 1946년 9월에는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겸 육사 교장, 1948년 2월에는 통위부 참모총장, 1949년 6월에는 제8사단장을 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에는 제2사단장, 1950년 10월에는 제3군단장, 1951년 8월에는 교육총장을 맡았으며, 1951년 9월에 휴전회담 대표이었고 1952년 1월에는 제1군단장을 맡았다. 종전 후에는 1954년 2월 합참의장, 1956년 6월에는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8월에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2002년 사망하여 대전현충원에 묻혀있다. 
 
사후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
 
 
▲  영혼을 일왕에게 바친 이형근의 묘.  국립현충원에 갈 자격이 없음에도 나라가 제정신이 아니라.....

이형근의 장인인 이응준(李應俊)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국군창설의 원로이다. 1906년 상경하여 1907년 보성중학교를 1회로 입학했고, 1908년 구한국 무관학교에 편입했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에 배속되어 1941년 대좌로 진급했다. 

1947년 국방경비대 제1여단장을, 정부수립 후인 1949년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6·25전쟁 중에는 수원지구방위사령관, 전라남도병사구사령관 및 전라남도계엄민사부장, 육군대학 총장, 제1훈련소 소장 등을 지냈다. 
 
1955년 중장으로 예편하고 체신부장관, 1967년 반공연맹 이사장,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1970년 상무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고, 같은 해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총력안보중앙협의회 고문, 1980년 국정자문위원 및 국방정책 자문위원장 등을 지냈다. 태극 무공훈장, 1등 보국훈장, 인촌문화상 등을 받았다.  

 
▲  장인과 사위 간에 일본육사 선.후배 간이구만..... 역시 현충원에 묻힘.


7 사단장 유재흥(劉載興)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군인. 일본군 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로,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8.15 광복에 이은 미군정 당시 제도권 안에 있던 행정,군사인력들을 그대로 차용하려는 미군정의 정책에 힘입어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활용되었다.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등을 지냈고,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 때 민간인 학살을 명령 또는 관여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제7사단장으로서 참전하였고 패전을 거듭, 결과적으로 7사단은 해체되었고, 이후 제2군단장이 되었다. 이후 덕천 전투에서 지휘실수로 중국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이 사실상 전멸되어 해체케 하였으며,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을 해체케 하는 등 한국 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전에서 일어난 영천 탈환전과 이후 한국 전쟁 후반부의 수도고지 전투의 공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전술,지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UN군에 패퇴한 북한군의 전술적 퇴각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인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 

또한 오마치에서 유재흥은 군단을 버리고 항공기편으로 도주하였다.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의 136페이지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이 도주행각으로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 하게 되었고 결국 현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포위당하여 3군단은 해체되었다. 
 
▲ 유재흥은 영혼과 능력은 없었으나,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실력은 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박정희 독재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전쟁 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1개 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 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인명(?)을 죽인 전공으로 1951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대에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전시작통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세력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수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  매번 지기만 했던 유재흥이 나중엔(받정희대통령 때) 국방장관까지 된다.

 
유재흥의 아버지인 유승렬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했다. 신태영, 이응준, 홍사익 등과 함께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진학했다.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유승렬은 조선군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일본군 보병 대좌에 올랐다. 현재의 서울 용산구에 있던 제79연대에서 복무했으며, 1934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후인 1949년에 군 경력자로 다시 육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제8기 특별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었고, 일본육사 후배인 아들 유재흥과 함께 복무했다. 한국 전쟁 발발 전 제102여단장과 제1사단장을 역임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계급이 높았다) 

한국 전쟁 때는 육군 대령으로 참전하였다. 전쟁 발발 직후 조선인민군 낙동강 북쪽을 점령했을 때,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는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시수도가 있는 부산의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으로 모병 업무를 주관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들 유재흥과 함께 선정되었다.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49기로 졸업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소좌였다. 
8·15해방 이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한 후 1949년 국방부 정훈국장 겸 제1국장을 지냈고, 1950년 수도경비사령관, 1951년 보병학교장, 1952년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했다. 1953년 미국참모대학을 졸업한 후 육군대학총장을 역임했다. 

1960년 국방부장관, 1961년 이탈리아 대사, 1976년 국회의원(유정회 소속), 1979년 유신정우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파병요청을 거부했고, 5·16군사정변의 사전모의 과정에서 혁명최고지도자를 권유받기도 했으나 거부하는 등, 군 재직 당시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지녔던 인물이다.
  
 
▲  영혼이 없는 이종찬장군을 우리는 참군인으로 알고 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안된다는 아주 평범한 말(?)을 했다고 인정받는 나라는 대한민국 뿐일 것이다.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194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미국 참모대학을 졸업했다. 
6.25 당시 육군작전교육국장, 5사단장을 역임하고 휴전 후 육사교장, 참모차장, 1.2군 사령관, 합참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장으로 예편 주 미국 대사관 무관, 수자원개발공사 사장, 주 브라질 대사,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을 역임했다.

 
▲   채병덕 참모총장을 바로 밑에서 작전참모로 보좌한  당시 장창국대령. 초기 작전 실패에 큰 책임이 있다. 장창국도 영혼이 없기는 매한가지. 대한민국은 영혼이 없어 작전에 실패한 장군들에게 큰 상을 주는 우리나라 좋은나라..... 친일파들이 살기 좋은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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