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야만, 게르니카 이후 70년

70년전 4월 26일 이 도시는 독일군의 소이탄공격으로 폐허

여름씨 | 기사입력 2007/04/26 [09:06]

파시즘의 야만, 게르니카 이후 70년

70년전 4월 26일 이 도시는 독일군의 소이탄공격으로 폐허

여름씨 | 입력 : 2007/04/26 [09:06]
게르니카 폭격이 있은 지 오늘로 꼭 70년이다. 1937년 4월26일 스페인 북부 도시 게르니카는 폐허로 변했다. 볼프람 프라이헤르 폰 리히트호펜 중령이 이끄는 독일 공군의 ‘콘도르 군단’이 이 도시를 소이탄으로 도배한 지 몇 시간 만이었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그 전해 일으킨 반란으로 내전이 한창이었고,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동료 프랑코의 뒷배를 보아주고 있었다.


▲     © 운영자

그 해 3월 말, 공화주의 정부를 지지하던 게르니카 둘레 바스크 지역에 대해 프랑코의 측근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대대적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콘도르 군단의 게르니카 폭격은 반란군의 이 바스크 점령을 거드는 한편, “독일 공군력을 기술적 차원에서 시험해보기 위한 것”(당시 독일 공군 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의 뉘른베르크 재판 진술)이었다.
 
이 폭격으로 6천여 게르니카 주민 가운데 1천 명 이상이 죽었다.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두세 해 전, 유럽은 이미 피 냄새로 비렸다.

게르니카 폭격은 스페인 내전이 목격한 무수한 학살극의 한 장면에 불과했다. 그러니, 게으른 역사가의 기록에서라면 그것은 누락될 수도 있었다. 게르니카의 명예와 거기서 죽은 이들의 진혼을 위해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게르니카 폭격은 스페인 내전 시기 파시스트 측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거기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더 타임스> 기자 조지 스티어와 화가 파블로 피카소일 테다.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던 스티어 기자는 게르니카를 다룬 첫 기사에서부터 이 폭격에 독일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또렷이 했다.
 
그의 기사들은 게르니카 참사가 “붉은 군대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는 반란군 쪽의 선전을 무력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미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던 피카소는 그 해 파리엑스포의 스페인관을 장식한 자신의 벽화에 <게르니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그 뒤 어떤 역사가도 게르니카 폭격을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교과서적 이해는 그것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싸움이라는 틀로 바라보고 그 싸움에서 민주주의가 패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진 것이 파시스트들의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진영도 애초부터 넉넉히 민주적이지 못했다. 그 ‘민주주의’ 진영 안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에게 크게 뒤지지 않을 만큼 비민주적이고 잔혹했다. 그 잔혹함은 때로 진영 안의 ‘동지’들을 겨누기도 했다. 아무리 아리따운 이름을 지닌 이념도 인간의 잔혹함을 제어하지 못했다. 절제를 잃는 순간, 이념의 손에는 피가 묻었다.

게르니카 이전에도 그랬듯, 게르니카 이후 70년 동안 이 행성에는 무수한 게르니카가, 동류살해(同類殺害)가 있었다. 지표 대부분을 피로 적신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서, 인도차이나에서, 루안다에서, 보스니아에서, 소말리아에서, 이라크에서 게르니카는 쉼 없이 되풀이됐다.
 
그리고 이 동류살해는 흔히 정의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다. 게르니카를 낳은 것이 이성의 냉혹함만이 아니라 광기의 사악함이기도 하다면, 콜럼바인이나 버지니아테크 역시 또 다른 게르니카다.
 
70년 전 게르니카에서든 8년 전 리틀턴에서든 지난주 블랙스버그에서든, 그 유혈의 발원은 진화의 현단계에 얽매인 인류의 생물적 불구성(不具性)이었거나 그 생물적 불구의 거푸집에서 주조된 사회정치적 불구성이었을 게다.

인류가 집단적 돌연변이를 겪지 않는 한 이 불구는 치유되지 않을 테고, 그 불구가 치유되지 않는 한 게르니카는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삼가는 마음으로 그 불구를 늘 곱씹으며  절제를 실천하는 것은 적어도 게르니카를 줄이는 데 보탬이 될지 모른다.
 
인류가 서로 사랑으로 밀착하는 대신 존중으로 거리를 두는 것은 그런 절제의 소박한 실천 방식 가운데 하나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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