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질서 도전하는 스케이트보드, 도시 콘크리트더미서 건진 내 예술”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7) 김준하 판화가“제가 대중 속에 섞이는 걸 꺼렸나봐요. 스케이트보드가 딱 그런 사람들의 스포츠였어요. 그 까닭이 궁금해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기성 질서와 콘트리트 도시에 저항하는 문화에 빠져든 겁니다. 거기서 팽개쳐뒀던 제 예술을 되찾았죠. 스케이트보드 판화가 그 것이에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일곱 번 째 주인공 김준하 판화가(34·남)의 말이다. 30일 오후 여주 즘골(북내면)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10여년 넘게 중단했던 작품 활동을 최근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1년여 준비 끝에 작년 10월 선아트스페이스(서울 삼청동)와 여주에 있는 그의 집 마당에서 두 번의 개인전 ‘하드코어 X게임 매니아’를 개최한 게 그 출발점.
“스케이트보더들은 예술가며 건축가죠. 옷을 직접 지어입고, 보드를 손수 만들며 그립테이프를 제멋대로 붙여 타거든요. 도시의 버려진 공간에 자신만의 놀이터를 만들고요. 창의적 아이디어를 활용해 독립적 문화를 즐기고 퍼뜨리면서요.”
그의 스케이트보드 판화는 딱 이거였다. 미국에서 시작됐고 국내에는 흔치 않은 격렬한(익스트림) 스포츠다 보니 시설이 거의 없고 관련제품 구입이 여의치 않은 게 현실. 그러니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자기들만의 놀이(스포츠)를 즐기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기물(지름 6미터 사발처럼 생긴, 작품명 ‘에그보울’)과 스케이트보도에 붙이는 스티커 및 옷 디자인 판화들이다. 대학에서 판화를 공부하고 10년 넘게 작품활동을 하지 않던 그가 자신의 예술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 미술(판화전공)을 공부했죠. 마침 그 때 스케이트보드에 빠져들었어요. 기성 질서를 거부하는 문화가 제 성향과 딱 맞았나 봐요. 창의적 예술을 공부해 그런지 몸동작 등을 새롭고 다양하게 구사하는 게 즐거웠어요. 친구들도 괜찮다고 수긍했고요.”
그는 길에서 만난 10여명의 엇비슷한 나이대 동호인과 늘 함께 다니며 놀았다. 예술적 감각을 살려 스포츠를 즐기는 영상작품(비디오, 스케이트보드 예술 장르 중 하나)을 다큐형태로 제작해 유튜브 등 SNS에 올리며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스케이트보드 비디오나 아트(디자인) 등의 장르에 관심을 가지니 제 예술본능이 살아났나봐요. 판화를 다시 떠올린 거예요. 스케이트보드 디자인에 민중판화를 활용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2022년 말인데 이듬해 9월까지 집중 작업을 해 작품을 만들었고 10월 개인전을 서울과 여주에서 두 번 열게 된 것이죠.”
밈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 모방)와 유전자(gene) 합성어다. 영국 생물학자 도킨스가 펴낸 ‘이기적 유전자’에 소개됐다. 문화는 비유전이지만 유전처럼 전파된다는 개념. 짤방(드립)이라 하면 쉽다. 중세 흑사병 죽음행렬을 수백년 뒤 예술(음악)로 표현한 생상스의 짤방이 교양시 ‘죽음의 무도’라면, 김 작가의 스케이트보드 저항정신을 담은 밈은 그의 판화 ‘핸드플랜트’(보드를 타며 한손으로 땅을 짚고 물구나무서기)인 셈.
민중판화를 생각해낸 걸 궁금해하니, 그는 둘의 비슷한 점을 들었다. 선이 굵고 투박한 예술이다 보니 격렬한 스포츠 스케이트보드를 표현하는 데 적합했단다. 노동자 등 저항정신을 민중판화가 담듯, 스케이트보드 역시 기존 질서와 거대한 콘크리트 도시를 거부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고 했다.
“스케이트보드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기성질서를 거부하는 마음을 잘 표현한다고 여겼으니까요. 대중적이기를 거부하는 성격도 그렇고요. 50~60년대 초기 활동들을 찾아보니 흥미진진하더라고요. 당시 예술 장르를 이뤘던 민중판화를 떠올린 게 어찌 보면 당연했는지 모르겠어요.”
스케이트보드 저항정신 뿌리를 그는 서핑보도 이야기로 풀었다. 도시와 사람에 지친 이들이 바다에 보드 하나 들고 뛰어드는 서핑보드. 그걸 도시에서 또는 파도가 없을 때 즐길 방안을 궁리한 끝에 고안한 게 스케이트보드. 하지만 훼방꾼이 많았다. 가정의 어른들과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당국자들. 기성질서에 거부감을 가질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다.
“공부 안하고 왜 그런 걸 타느냐는 타박부터, 도시에서 교통에 방해되고, 사고 낼 수 있고, 기물을 파손할 수 있다는 우려와 억압까지. 스케이트보더들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죠. 그 불편은 기성사회에 저항으로 굳어졌을 테고요. 록음악 저항정신과도 뿌리가 이어져 있지요.”
록음악 하위 장르로 ‘스케이트펑크’가 있다. 기성사회에 도전하는 50년대 록음악에서 분화한 70년대 ‘펑크록’(실직 권태 도시문제 비판)과 ‘하드코어(보다 격렬한)펑크’ 하위 장르다. 스케이트보드 관련 비디오, 타투, 뮤직이 그렇게 같이 발전했다. 스케이트비디오로 성장해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출한 스파이크 존즈(55)는 영화 ‘허’(her)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기도 했다.
김 작가의 미래구상은 독보적 장르만큼이나 분명했다. 새롭게 개척하고 있는 만큼 더 키우고 굳건히 해 일반인에게 친숙한 예술로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마니아들만의 방을 벗어나 도시예술가 그리고 대중에게 다가가겠다는 포부. 국내 미개척 스케이트보드 상업디자인도 시도해볼 생각이란다. 스케이트보드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건 또 하나의 희망.
“아트뿐 아니라 스케이트보드 스포츠 발전에도 좀 더 기여해야죠. 동호인들이 늘고 있는 만큼 그들이 도시의 유휴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연습시설(기물 등)을 확충해나가는 노력을 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이태원(목재 기물 훼손돼 철거), 동작대교(남단 노는 공간) 등 서울의 5군데에 기물(보울)을 제가 설치했어요. 더 늘리고, 조형 예술성도 더 키워야지요.”
미술은 그에게 꿈이었다. 중학교 때 결심했다. 아빠(김원주 도예), 엄마(장순복 서양화)의 문화유전자도 큰 몫을 했을 성 싶다. 여주에 터를 잡고 예술활동을 하는 부모의 작품을 보고 배우며 자랐기에. 무난히 미대(홍익대) 판화 공부도 마쳤다.
“대학 때 제가 공부를 게을리 한 건 아닌데, 작품활동은 별로 안했어요. 그 땐 판화가 나랑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차라리 사진을 하자는 생각에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풍경을 찍었어요. 졸업전도 ‘눈총’(판화 전공이다 보니)을 받으며 사진으로 했어요. 나같이 전공을 벗어난 작품을 택한 이들이 간간히 있거든요.”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은 ‘안타까움 반, 존경심 반’이었다. 자신을 뒷바라지 하느라 작품활동을 제대로 못했을 것이라여겨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어릴 적 엄마 아빠의 작품을 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도 커 미술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건 존경심 때문이었다.
‘스케이트펑크’ 정신, 작품에 가득 담아
대학 진학하며 도시에 나왔고, 그 낮선 도시에 빠진 그는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주 즘골에 살 때의 한가함과 여유는 찾아볼 길이 없었기에.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에 적응하는 게 그에겐 큰 고통이었다. 그런 그를 도시홍수에서 건진 게 스케이트보드였다. 그리 적응해가던 도시행활을 2년 전 정리하고 그는 걸음마를 땔 때부터 살았던 여주 즘골로 내려왔다.
대학 판화과 동기이자 아르바이트 하며 만난 여자친구(대마 줄기를 다져 만드는 건축재 햄프크리트 활용 예술)와 결혼을 약속했다. 그는 스케이트보드 판화 작품활동을 더 열심히 해보려고 혼인을 서두르지는 않겠다고 했다. 도시 스케이트보더로 살다 판화가로 즘골에 돌아온 김 작가. 이제 막 펼쳐지고 있는 그의 독특한 미술세계, 그 미래가 궁금하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댓글
김준하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판화가 관련기사목록
|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인기기사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