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선생 (2/4부)

전 재산을 팔아 독립군 양성 학교를 세워 광복에 이바지

편집부 | 기사입력 2013/02/04 [11:40]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선생 (2/4부)

전 재산을 팔아 독립군 양성 학교를 세워 광복에 이바지

편집부 | 입력 : 2013/02/04 [11:40]
 
신흥무관학교
 
1911년 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로 출발하여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학교 명칭은 이외에도 시기에 따라서 대동중학교(大東中學校)·신흥중학교·양성중학교(養成中學校) 등으로 불렸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1910년 7월경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의 6형제와 이동녕(李東寧) 등이 남만주의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쩌우자가[鄒家街] 지역을 사들여 망명 근거지로 삼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의 흥자를 붙여 신흥강습소를 조직했고, 동시에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조직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그러나 1911년 가을의 큰 흉작으로 경학사가 해체되고 1912년 가을에 새로운 한인자치조직으로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자, 신흥강습소는 퉁화현[通化縣] 하니강[哈泥河]으로 이전했고, 1913년 5월에는 학교명칭을 신흥중학으로 개칭했다.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오고 일본육사 출신의 이청천(李靑天)·김경천(金擎天)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가하면서 번창했다.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고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韓族會) 산하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강습소에서는 일반 중학과정인 본과 외에 무관양성을 위한 속성과를 두었으며, 신흥중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을 두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면서 류허현 고산자(孤山子)에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하고자 했다. 또한 퉁화현 하니강, 치다오거우[七道溝]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 등에는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편성하여 3개월간의 일반훈련과 6개월간의 후보훈련을 시켰다. 1920년 폐교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 100년만에 열린 신흥무관학교 설립 기념식     © 편집부
 

독립운동가 이회영 [李會榮, 1867~ 1932) 

▲ 우당 이회영 선생     © 편집부
신민회(新民會) 중앙위원으로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해외항일투쟁을 계속했으며, 1920년대 이후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아버지는 판서 유승이다. 족친인 이상설과 절친했고 여준·이강연·남궁억·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접촉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듬해 안창호·이갑·전덕기·양기탁·안태국·이동녕·이동휘·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만주에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을 책임자로 삼아 동지획득과 교포교육에 주력하게 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조약 체결의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고,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만주로 파견했다. 
1908년 이상설과 운동방책을 협의하여 이상설은 국외에서 활동하고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는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 등 각 학교에 파견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1909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이동녕·주진수·안태국·이승훈·김도희 등과 신민회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현 싼위안푸 추가가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같은 해 겨울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이상룡·김동삼 등과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1년 최초의 재만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에는 퉁화현 합니하반(哈泥河畔)으로 옮겨 경학사를 모체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했다. 이해 흉작으로 경학사를 해산하고 국내로 들어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진력했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한용운·이상재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 시종(侍從) 이교영을 통해 고종에게 승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는 정부와 독립운동의 본부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반영되지 않자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에 체류했다. 이때부터 민족주의에서 점차 무정부주의로 선회하기 시작, 이을규·이정규·조소앙·신채호·김창숙 등과 자주 접촉했고, 독립 뒤에 건설될 사회는 국가간 민족자결의 원칙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에서도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이를 위한 사회개혁의 원리로서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했다.
 
1923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한수이현[漢水縣]에서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에 힘썼다. 1924년 4월에는 유자명(柳子明)·이을규·이정규·정현섭·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정의공보 正義公報〉를 간행했다.
 
1928년 7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이 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1931년 정해리·김광주·원심창·박기성·이용준·유산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 의장에 추대되어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같은 해 11월 만주의 연락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다롄[大連]으로 가던 도중 밀정 연충렬과 이규서의 밀고로 다롄의 일본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옥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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