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리 온 마을이 갤러리, 예술인으로 이장으로 마음만은 부자”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22) 강성봉 조각가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24/06/28 [01:44]

“세월리 온 마을이 갤러리, 예술인으로 이장으로 마음만은 부자”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22) 강성봉 조각가

최방식 기자 | 입력 : 2024/06/28 [01:44]

대학 때부터 중년까지 민중미술에 꽂혀 살았죠. 아픈 세월에 파란만장한 날들이었어요. ‘예술 따로, 삶 따로에 지쳐갈 때 고향 양평으로 도망왔죠. 예술을 하려고 학원에 석공에 무척 힘들었거든요. 근데, 새 세상이 열린 거예요. 지역문화공동체 사업을 하다 보니 마을이 작업실이 되고 캔버스·갤러리가 된 거죠. 제가 사는 세월리의 물리적 공간은 우물안이지만, 정신적으론 세계라 봐요. 이젠 우물 밖 공간여행도 좀 해보려고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스물두 번째 주인공 강성봉(63·) 조각가의 말이다. 27일 양평 세월2리 집에서 마주한 그가 털어놓은 삶이다. 그는 2년째 이 동네 이장을 맡고 있다. 예술에 마을공동체 가꾸기에 지쳤을 법한데 씽씽하다 못해 신바람이 나 있다.

 

대학 다닐 땐 정치적으로 엄혹한 시절이었잖아요. 공부보단 사회활동이 먼저였고요. 늘 예술을 어찌할까, 걱정이 컸죠. 그러다 결국 고향마을로 도피한 건데, 고민이 이렇게 해결될 줄 몰랐어요. 지역사회에 예술 자산이 널려 있으니까요. 작품활동 그냥 하면 돼요. 생활이 곧 예술이 됐다고 할까. 예술인으로서든 이장으로서든, 마음만은 부자예요.”

 

▲ 강성봉 조각가.  © 최방식


달강마을달인과 함께 향기로운 문화체험

 

무엇이 그리 즐거울까 궁금했는데, 세월리 마을공동체 활동을 자랑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가 앞장섰던 달강마을’(달이 머무는 강 마을) 프로젝트가 잘 진척돼 발효, 음식, 농사, 도자기, 천연비누, 벌꿀, 민화 등 이른바 마을 문화체험 프로그램이 꽤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4년전 달강세월협동조합이 건립되고, 이듬해 경기도가 지원하는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공모에 뽑혔다. ‘정미소커뮤니티센터 계획이 선정되며 리모델링비 5억원과 운영비 3(매년 1억씩)원을 받아 골안계곡 탐방, 달인과 함께하는 체험, 원예치유 등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달강마을 가꾸기는 제가 오기 전부터 이어져 왔어요. 제가 새마을지도자로 참여하며 협동조합 결성과 경기도 지원프로젝트를 주도했고 초대 이사장 대행(초대 이사장 중도 사퇴)2대 이사장(올해부터)을 맡고 있죠. 코로나19로 주춤했는데, 작년부터 조금씩 회복되고 있어요. 저도 민화교실(무료)을 지난해 8월부터 매월 3차례 열고 있죠.”

 

그의 청장년기가 궁금했는데, 예술사회운동에 헌신한 삶이었다. 폭압정권에 저항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삶을 표현하는 문화예술운동을 해온 것. 대학 땐 동아리 쪽빛을 만들어 대학건물이나 농촌마을(농활) 벽화 그리기를 주도했다. 선배의 권유로 연극반을 하며 황톳불’(동학 주제) 등을 공연해 경찰의 감시와 눈총을 받기도 했다.

 

대학 3학년 때 유홍준 교수의 강의를 우연히 들었는데, 그 뒤 민미협(한국민족미술인협회) 조소분과에 가입했죠. 계기로 전국 청년미술인 교류 등을 통해 예술사회운동을 하는 이들과 교류가 넓어졌죠. ‘작은 조각전’, ‘조국산하전등에 10여 차례 참여했어요. 서울민미협 대표가 개인적 사정으로 사퇴해 2년간 대행을 맡기도 했죠.”

 

문화예술운동을 하며 지쳐갈 즈음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구리였다. 97년부터는 구리미술협회에 가입해 매년 1~2회 회원전에 참여했다. 그러다 고향 양평으로 최종 이주한다. 양평민예총 설립을 주도하다 내부 갈등으로 포기하고 양평문화예술인네트워크’(양평문예넷, 회원 49)2018년 결성했다.

 

양평문예넷 주도로 5·18사진전(2020년 양평역 로비), 4·16추모전(양평역사 앞, 2020), 양평문예넷 정기전(2019년 가을, 양평시장 쉼터 옆 도서관), 아이전(정인이 추모, 서종 청란교회 2021) 등의 지역 문화예술활동을 했다.

 

우분투라는 아프리카 말이 있다. 과자 열 개를 혼자 먹지 않고, 열 명이 나눠먹는 사회연대를 의미한다. 만델라가 집권하고 내세운 통합 사상이기도 하다. 리눅스 오픈소스 무료 운영체계(OS)도 그 이름을 땄다. 자기 생계보다 이웃의 아픔을 우선한 조각가. 쉬려고 고향마을로 왔지만 지역공동체 사업에 나서야만 했던 강 작가. 그가 전파하려던 게 이런 정신 아닐까.

 

▲ 세월2리에 있는 작가의 정원에 전시된 작품들. 왼쪽은 4·16추모제 때 전시한 ‘나비’.  © 최방식


중장년까지 민중미술, 지쳐 고향 양평으로 

 

문화예술인으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늘 절감하고 있다고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대학 졸업하고 10여년은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살림을 꾸렸다. 그 뒤엔 돌공장 석공으로 취업해 6년여 돈벌이를 했다. 돌공예는 조각가에겐 중요한 기술이고 동떨어진 일은 아니지만, 힘든 건 사실이라 했다.

 

조각으로 먹고사는 건 쉽지 않죠. 길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지만요. 간간이 상업조형을 했어요. 구리 인창동 어울림아파트 건축조형물, 인천버스터미널 환경조형물 등 10여개는 되나 봐요. 학교 등 창업자 동상도 6~7개 만들었어요. 하지만 상업조형은 너무 싫었어요. 내 창의가 아니다 보니.”

 

상업조형이긴 하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이른바 사법살인을 당한 8명 중 한 명인 이수병 선생(당시 일어학원 강사) 기념비(동상, 실물 크기)를 모교인 경희대 민주동문회 주문으로 제작해 대학원 건물 앞 동산에 설치한 건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예술 재능은 초등학교 때부터. 서예 시간에 붓글씨를 잘 쓴다고 해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미술 재능이 뛰어난 것이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너 미술 해라는 칭찬을 받은 게, 그가 미술세계로 빠져든 계기였다. 부모도 반대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미술부 활동이란 게 뭐 있겠어요. 어린 시절인데, 방과후 그림은 안 그리고 맨날 공 차고 놀았죠. 당시 축구 꿈도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중학교 3학년 때 다들 예고 입시 준비한다고 난리들인 데, 난 축구에 빠져 예고도 못 가고 말았죠.”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경희대 미술교육학과(서양화 전공)에 입학한 것. 당시 이 학교엔 미대가 없었다. 잘 다니던 학교를 3학년 때 자퇴했다, 다시 생각이 바뀌어 재입학(2학년)한다. 이땐 미대가 생겨 조소과로 복학시켜 줬고, 결국 그는 미대 학사 학위를 받은 것.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 간 그가 고향 양평으로 다시 내려온 건 몸도 마음도 지쳐 좀 쉬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고향은 지평(일신초교 때 전학)인데, 세월리로 온 건 부인의 고향이 근처이고, 처형이 세월리에 살았기 때문.

 

천신만고 끝에 피난 온 기분이었죠. 처음 컨테이너 1개 놓고 살았는데, 달이 휘영청 한 날 밤하늘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어요. 멀리 추읍산, 가까이 개군산이 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세월2. 고향이라서 그런지 더 포근히 다가왔죠.”

 

문화예술과 사회운동을 사십여년 해온 포스일까. 고향에 와 지역공동체 사업을 하고 있어 그럴까. 세월리 안, 달강마을 사업을 둘러싼 논란과 마을이 1·2리로 나뉘며 자산을 둘러싼 갈등 등을 이야기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다.

 

문화예술인들이 지역사회로 더 많이 내려가면 좋을 듯 해요. 예술이 동시대인의 삶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들의 아픔,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를 알아야 그럴 수 있거든요. 지역사회로 내려가 거기 함께 살아봐야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 서울민미협이 주관한 4·16 세월호참사 2주기 추모제 때 서울시민청 갤러리에 전시했던 ‘악어의 눈물’.  © 최방식


그의 민화 조각품들 민중 희망 담은 미소

 

계획을 묻자, 예술에 정답이 없듯 구상도 별거 없다고 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실험하는 작가정신을 잃지 않겠다고 했다. 모두가 스승이란 성현 말씀까지 곁들이며, 사회에서 늘 배우고 이를 예술로 표현하는 노력을 기울일 거란다. 그간 못했던 여행은 좀 더 하겠다고 했다.

 

저는 요즘 세월리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죠. 예술작업도 하고 지역사회 활동도 하고요. 누군가는 저를 보고 우물안 개구리라 할지 모르지만, 전 우리 마을이 곧 세계라고 생각해요. 세월리에 내려와 이장을 하는 제 삶이 예술이 되듯이요.”


아케익 스마일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품의 미소를 일컫는다. 절대권력을 표현한 이집트미술에서 인간적 생기를 가미한 얼굴묘사. 직접민주주의 시행착오를 하던 시절 공동체의 보편적 이상을 지혜롭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으려 한 것. 한국의 민화가 민중의 희망과 이상을 해학적으로 담았듯이. 엄혹한 시절을 뚫고 나온 강 작가의 민화나 조각품이 그런 미소나 희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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