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6-1) "시간 사려고"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9/08 [11:26]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6-1) "시간 사려고"

이슬비 | 입력 : 2020/09/08 [11:26]

 <지난 글에 이어서>

 

저는 시간을 사고자 합니다.”

 

서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진이 '하' 하고 긴 한숨을 쉬며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받침 위에 내려놓았다. 알 수 없는 대답에 심기가 거슬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대체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생각하느라 예법 따위는 잠시 잊기라도 한 것일까. 유진이 찻잔을 받침 위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달캉, 하고 잠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사고자 하신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잠시 동안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유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말에 서란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서란은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자의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스며들었다. 서란은 찻잔을 집어 들고 받침으로 받치며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찻잔 받침으로 찻잔을 받치며 차를 마시는 것은 한씨가의 예법이었다.

 

한씨가의 예법인가 봅니다.”

 

대답이 없는 서란을 바라보며 유진이 말을 이었다. 서란은 찻잔을 내려놓고 유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기색을 살피듯, 아니, 그가 앞으로 무슨 태도를 보일지 가늠하기라도 하듯 서란은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한 사람의 이름을 입 밖에 내었다.

 

훌란 한정.”

 

?”

 

후예씨가의 가주님께서 저희 한씨가의 시조이신 무녀 훌란을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후예씨가는 본래, 김씨가의 3대 가주이신 세죽님의 셋째 아드님이셨던 단야님을 시조로 하는 김씨가의 방계가문. 한데 어찌 한씨가의 시조이신 무녀 훌란을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무녀 훌란의 현신이라는 명칭이 저희 한씨가에서 가지는 의미 또한 잘 아시겠지요.”

 

유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서란은 삼 년 전, 나고현성에서 전세를 역전시켜 한씨가에 승리를 가져온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후예씨가의 가주 앞에서 김씨가의 패배를 상기시켜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란은 굳이 삼 년 전 김씨가의 패배를 상기시키며 유진을 자극하고 있었다.

 

잘 알다마다요. 그리고 삼 년 전의 승리 이후 아가씨께서 후계혈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아가씨께서 지금 말씀하신 무녀 훌란의 현신이라는 명칭을 차지하고 계시다는 것도요.”

 

근래에 들어, 저희 한씨가와 신씨가의 충돌이 잦아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한데요?”

 

접경지역에서의 충돌은 늘 있는 일이니 평소처럼 그런가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접경지역에서의 충돌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천호 이상의 군대가 접경에서의 사소한 분쟁에 개입하는 일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

 

유진이 얼른 자세를 다시 바로잡고 앉았다. 서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유진의 기색을 살폈다.

 

물론, 신다희가 도발을 한다 여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신씨가는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삼 년 전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와 저희 한씨가에 대한 배상금으로 한동안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지요. 물론, 저희 한씨가에 지불한 배상금만큼의 피해복구도 이제 겨우 끝마친 상태이고요.”

 

…….”

 

신다희가 호전적이라는 것을 고려한다 해도 그녀는 북해도의 숨은 용을 이끄는 군주. 그런 그녀가 앞 뒤 재보지도 않고 또 전쟁을 하자고 덤벼들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번 일의 배후에는 분명히 저희 한씨가의 가주님이 계시다고요.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고 자여를 지지하는 세력의 기반을 다지려는 것이 저희 한씨가 가주님의 계획이라고요. 그러니 만약 이번에 신씨가와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희 한씨가 가주님은 저를 보호하고 있는 유흔이 전쟁에 개입할 기회를 박탈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야 제가 전장에서 무녀 훌란의 현신으로서의 모습을 보일 기회를 없앨 수 있을 테니까요.”

 

서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유진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유진의 두 눈은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어느새 평온해져 있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을 사려 합니다. 정확히는 제가 가주가 될 수 있는 시간을, 제가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을 사려 합니다.”

 

대체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유진이 물었다. 서란은 한 마디 한 마디 끊어내듯이 말에 힘을 주었다.

 

저는. 전쟁의. 방향을. 돌리고자. 합니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동북입니다.”

 

유진의 표정에 어느덧 호기심이 어리고 있었다. 서란은 그런 유진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그를 위해 김씨가의 가주님과 동맹을 맺으려 합니다.”

 

저희 김씨가의 가주님과 동맹을요?”

 

본도의 동북지방은 북해도와 마찬가지로 겨울이 추운 곳이지요. 그러나 겨울이 길며 땅이 척박한 북해도와는 달리 겨울이 길지 않고, 화산지대가 많아 토지가 비옥하기에 서늘한 여름기후를 이용해 온갖 신선한 채소를 재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농경이 가능한 토양의 특성 상 겨울의 눈이 녹으면 그 모두가 신선한 농업용수가 되기 때문에 그를 이용해 벼농사까지 짓고 있으니 동북지방이야말로 천하의 보배나 다름이 없지요.”

 

해서요?”

 

저는 김씨가의 가주님과 동맹을 맺어 전쟁의 방향을 동북으로 돌리고, 차지한 영토를 김씨가와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동북은 부상국의 최대 곡창지대 중 하나에 해당하는 천하의 보배. 그러니 동북의 영토를 어느 정도 차지한다면 김씨가는 저희 한씨가에 할양한 아무르강 너머의 성 두 개가 거두어들이던 이득보다 몇 배 더 많은 이득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김씨가가 얻는 이득이 아가씨께서 사려는 시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유진이 서란이 사려는 시간에 대해 물었다. 서란은 찻물을 다시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목으로 넘겼다.

 

제가 김씨가 가주님께만 이런 제안을 드리려는 것 같습니까?”

 

설마 신씨가 가주님께도 이런 제안을 드리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전쟁의 방향을 돌리려면 규모도 키우는 것이 낫겠지요. 신 세 가문의 연합과 동북지방의 가문들이 전쟁을 벌이는 것이 훨씬 그림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하하하!”

 

유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을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어찌 보면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제안에 이리 웃음으로 답하다니.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 된다면 애초에 제가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를 위해서라도 저를, 그리고 저를 보호하고 있는 유흔을 전쟁에서 제외시킬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 전쟁을 통해 무녀 훌란의 현신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터이고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겠지요.”

 

…….”

 

,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서란이 마치 은밀한 모의를 꾸미려는 사람처럼 유진의 곁으로 다가와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제가 사려 하는 시간은 제가 가주가 될 수 있는 시간,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하면요?”

 

저는 제가 가주가 될 시간,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시간만이 아니라 천하의 패권을 두고 김씨가와 겨룰 시간 또한 사고자 합니다.”

 

……?”

 

저희 한씨가와 김씨가는 천하의 패권을 두고 끊임없이 다퉈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지요. 또한 저희 한씨가가 키야트 아이누의 여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라면, 김씨가는 특이하게도 삼백족의 남성우월주의적 문화를 받아들인 남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 하니, 천하의 패권을 두고도, 각자가 수호하는 문화의 가치를 위해서도 저희 한씨가와 김씨가 두 가문은 끝없이 다퉈야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물론, 병가(兵家)에서는 적이 강해지기 전에 치는 것이 승리의 기본이라 하지요. 그러나 저는 약한 적과 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저는 강한 적과 싸워 이겨 천하의 그 누가 보기에도 강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름을 날리는 것을 좋아하지 약한 적과 싸워 이겨 운이 좋아 이긴 것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그러니 저는 김씨가가 지금보다 강해질 시간 또한 사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강해진 김씨가와 싸워 이겨 천하의 그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무녀 훌란의 현신이 되고자 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유진이 또다시 목젖을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서란은 그런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한동안 가만히 유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서란이 유진을 불렀다.

 

가주님.”

 

?”

 

서란의 표정은 이제 장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란은 다시 유진을 불렀다.

 

가주님.”

 

말씀하십시오.”

 

이거 아무래도 제 앞에 계신 분이 후예씨가의 가주님이 아니신 듯합니다만.”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슬비 오컬트무협소설 연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