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줄 독학 등단 ‘국전’ 3연속 수상, “여행에서 영감 얻었죠”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4) 노재영 목조각 예술가 인터뷰“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제가 쉰 넘은 나이에 국전에 출품한다니 비웃더군요. 아무나 가는 곳 아니라면서요. 하지만 세 번 도전해 두 번의 특선과 한 번의 우수상을 받았죠. 경쟁에 찌든 50대의 아픔을 위로하는 등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었어요. 여행에서 영감을 얻었지요. ‘역마살'이 제 예술의 생명력이 된 셈이네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네 번째 주인공 노재영(60) 목조각가의 말이다. 17일 오후 양평 문호리에 있는 그의 갤러리 ‘우필’에서 만났다.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고 어떤 탁월한 스승에게도 배우지 않았던 그는 50대에 목조각을 시작해 10여년만에 국전에서 3번의 상을 탔다. 아울러 예술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국전 초대작가’로 등극했다. 그 동력을 그는 끊임없이 보고 체험하며 배우는 여행과 이를 통해 얻은 예리한 사회통찰에서 찾았다.
“제가 목조각을 시작한 건 10년 됐어요. 물론 그보다 20여년 더 전부터 혼자 그림이며 예술을 가까이하고 공부했죠. 고교시절 ‘미대 보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 재능이 있었거든요. 여튼, ‘안 가본 데 없다’할 정도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다녔죠.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현지 역사와 미술을 공부하고 박물관을 들릅니다. 그렇게 그곳 색과 스토리를 얻었고요.”
정인이(아동폭력 살인) 사건을 묘사한 작품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도 그 중 하나. 소설 ‘폭풍의 언덕’ 배경이 됐던 영국 북동부 요크셔 벌판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절망과 회한을 모티브로 아동학대를 비판하고 그 아픔을 치유하려는 작가의 몸부림이었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여행 그 문화적 충격이 그의 작품에 배어있는 것이다.
요즘 속도를 내는 십이지신상도 마찬가지.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담아볼까 고민하다 인간을 12유형으로 분류하는 전통 음양오행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닭, 개, 돼지, 쥐, 소까지 마쳤다. 1년에 하나 할까 말까 정도. 최근 마친 소(띠)는 자유를 열망하는 염원, 그리고 해방(노동으로부터)을 승무(불교)로 표현했다. 좀 더 발전시켜 ‘500군상’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요즘 들어 그가 폭을 넓히는 쪽은 사회성 짙은 작품들. 대학 다닐 때부터 가졌던 시선을 이제 작품에 담고 있다. 학생·노동·사회 운동 일선을 뛰지는 않았지만, 독재를 싫어하고 민주주주를 염원하며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지지해왔듯 이제 그 정신을 작품에 담으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그는 현재 문호리에 임대해 쓰고 있는 ‘우필공방’(遇必은 어머니 이름, 그의 작가 이름이기도 하다)을 양평문화예술인네트워크(그가 참여해 조직하고 키워온 지역 문화예술단체, 강성봉 대표)의 ‘예술터’로 내놓을 예정이다. 동호인들이 하는 노인·아동·여성·노숙자·기후변화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높이는 작품을 전시하려는 것. 손자들이 잘 사는 사회·지구촌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려고 예술가 몇이 모여 기획한 것이다.
여행을 좋아해 거기서 얻은 영감으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써 ‘미국의 현대문학은 이 작품에서 시작됐다’(헤밍웨이)는 평을 들은 마크 트웨인. 19세기 노예제도와 가난한 자를 약탈하는 기업 등 미국사회의 부조리를 잘 묘사했던 그는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리는 증기선 여행 중 항해기술을 배워 4년간 그 일을 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
50대에 목조각을 시작한 노작가가 처음 예술계에 던진 출사표 역시 사회성 짙은 작품. 경쟁에 지친 50대의 모습을 ‘가진자와 못가진자’에 담았다. 출발도 종착도 같지만 이승에서 엇갈린 중년의 운명을 그려 ‘특선’을 거머쥔 것. 이듬해 두 번째 작품 ‘농악’을 다시 국전에 출품, “국전이 아무나 가는 곳이냐”는 세간의 비웃음을 잠재웠다. 세 번째 작품 ‘용’으로 다시 도전, ‘우수상’을 타며 예술 ‘명장’이랄 수 있는 ‘국전 초대작가’가 됐다. 목조각계의 전설이 된 것이다.
그의 이런 늦깎이 도전이 큰 성취를 이룬 데는 로맨틱한 성격, 그리고 좌절하지 않는 성정이 한몫했다. 남이 1번 할 때 100번 넘게 시도하는 실험정신이 밑바탕이 됐다. 전통기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게 어찌 보면 창의적 작품을 만들어내는 지름길이 되기도 했다.
“어떤 나무든 작품에 다 사용할 수 있게 됐죠. 다 시도해봐 목재의 특성을 알게 됐으니까요. 땔감으로 쓸 오동나무로도 하고, 갈라져 버린 나무조각도 매니큐어를 활용해 작품으로 만들었죠. 제 실험정신은 ‘인디언 기우제’ 같다고 할까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금융업을 했던 남편도 정년퇴임 뒤 정배리에 살며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있다. 생계를 해결할 뿐 아니라 그의 든든한 경제적 정신적 후원을 하고 있다. 우필갤러리도 남편의 안목과 결단이 낳은 열매. 같이 점심 먹으러 외출했다가 ‘그 자리 좋다’며 바로 계약했던 것. 자신의 프랜차이즈 사업장도 갤러리 길 건너편에 차렸다.
“남편이 하는 프랜차이즈 사업장에도 문화적 개념이 농후하게 배어있어요. 처음엔 사업성이 없다고 하더니 갤러리를 차리고 바로 계약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맥주를 140종, 커피를 70여종 들여놓는 등 나름 전문성을 키워 어려움을 극복했지요. 이젠 인정받아 찾는 이들이 꽤 된답니다. 정배리 집도 탐탁찮게 여기더니 작업에 도움 된다고 하자 바로 구입했거든요.”
‘K-목조각품’ 세계무대에 알리고파
또 한명의 후원자는 대학 교수이면서 동생의 작품 활동을 전심전력 돕는 한 살 많은 친언니. 어머니 같고 친구 같은 존재다. 그가 30대 후반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언니의 도움이 컸다. 같이 다니기도 하고, 혼자 갈 때도 언니가 여러모로 도왔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내서 자리 잡은 아들과 딸 역시 든든한 후원자.
그에게 남은 꿈이 하나 더 있다. 한국 목조각을 세계에 알리는 일. 그의 작품 12지신상 등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작품들을 해외에 알려 이른바 ‘K-목조각품’을 또 하나의 대세로 만드는 데 작으나마 도움을 주고 싶은 것. “쉽지 않겠지만 한 번 해보려고요.”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댓글
노재영 목조각가 여주양평 문화예술인 관련기사목록
|
인기기사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