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연재] 홍매지숙명-북해도의 호랑이(37-1) "후회가 되십니까?"

이슬비 | 기사입력 2020/11/11 [11:02]

[무협 연재] 홍매지숙명-북해도의 호랑이(37-1) "후회가 되십니까?"

이슬비 | 입력 : 2020/11/11 [11:02]

<지난 글에 이어서>

연회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연회장으로 쓰이는 전각 안은 온갖 화려한 비단과 금은보화, 기화요초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탁자마다 귀한 술과 산해진미가 넘쳐흘렀다. 서란은 가주의 오른편에 자리한 상석에 앉아 가희들의 노래와 무희들의 춤을 바라보았다. 악공들이 느릿느릿하고 몽환적인 선율을 연주하는 가운데 가희들이 단가와 한시의 구절에 곡조를 붙인 노래를 부르고 무희들이 그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을 서란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며 술잔에 술을 한 잔 따랐다.

 

한씨가의 후계께서 술도 마실 줄 아셨소?”

 

서란은 자귀나무 꽃술로 만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삼 년 전, 승전연에서 처음 술을 접하게 된 이래로 유흔에게 조금씩 배워온 터라 이제 이 정도 술은 그저 달디 단 감주에 불과했다. 서란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편에 앉은 서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서인의 눈동자가 흥미로 물들어 있음을 서란은 애써 모른 채했다.

 

삼 년 전 나고현성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저희 한씨가의 군대가 아무르강 유역에서 대승을 거둔 일이 있었지요. 그때 승전연에서 처음 술을 마셨습니다. 그때부터는 가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후계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삶이 너무 팍팍해서 한 잔씩 기울이게 된 것이 이제는 이 정도 술은 감주 정도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고요.”

 

서란은 굳이 삼 년 전 김씨가의 패배를 언급하고 있었다. 연회라면 그저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이 몇 살 때의 일이었더라. 아마 그때가 다섯 살 이었던가, 일곱 살 이었던가.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많았던가. 서란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연회의 목적이 상대방을 초대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 그 기를 꺾어놓기 위함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서란은 연회를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연회라는 것이 단순히 좋은 일을 축하하자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이래로 서란에게 연회자리는 곧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당신 같은 사람이 내게 이리 화려한 연회를 베푼다는 건 내가 어느 정도의 화려함에 기가 꺾이는 인물인지 알고 싶어서이기도 하겠지.’

 

서란은 자귀나무 꽃술로 만든 술을 홀짝홀짝 들이켰다. 유흔이라도 있으면 마음껏 취할 수 있으련만. 유흔이 없으니 취하고 싶은 만큼 취하지도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서란은 자꾸만 술을 들이켰다.

 

황궁에 가본 적이 있으시오?”

 

서인이 자꾸만 말을 걸었다. 서란은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서인을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황궁은 어떤 곳입니까?”

 

새장과 같은 곳이오.”

 

새장이라

 

그곳에 계신 천자께서는 유폐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황궁 밖을 나설 수도 없이 그저 인형처럼 유폐되어 있을 뿐이니 좋게 말하면 새장이요, 나쁘게 말하면 감옥이 아니겠소.”

 

가주님께서는 참으로 담대하신 분 같습니다.”

 

그렇소?”

 

감히 천하의 그 누가 천자를 일컬어, 새장 속의 새이고 감옥에 갇힌 인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 누가 천자께서 계신 황궁을 새장이라 하고, 감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리 말했다는 것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즉시 반역죄로 참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을 텐데요.”

 

하하하하하!”

 

서인이 또다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서란은 그런 서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참으로 담대하고도 능구렁이 같은 자가 아닌가. 마치 속에 여우를 천 마리는 키우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며 서란은 또다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서란.”

 

서인이 서란의 이름을 불렀다. 서란은 술병을 기울이던 손을 멈추고 서인의 입을 바라보았다. 서란의 손에 들린 술병에서 흘러나온 술이 잔을 채우고 넘쳐 탁자를 적셨다.

 

우리 좀 솔직해집시다.”

 

무엇을 말입니까?”

 

서란은 얼른 술병을 바로 하고 찰랑찰랑하게 넘치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자라고 생각하며 서란은 오른쪽 귀에 걸린 백금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정녕 천자께서 이 나라의 주인이 맞소?”

 

대체 이 자가 무슨 속셈이란 말인가. 서란은 어느덧 취기가 돌기 시작하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물론, 양소막부가 들어선 이래로 황제들은 황제라 할 수 없었다. 이름뿐인 황제, 실질적인 권한은 없고 그저 만세일계의 황조의 주인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지키고 있는 자를 어찌 나라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아무리 황제가 막부와 영주들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다 하나 그는 삼백족에게 있어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취하셨나 봅니다.”

 

서란은 적당한 구실로 서인의 질문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서란의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서인이 서란의 잔에 잔을 부딪치며 쨍, 하고 맑은 소리를 냈다. 서란은 하아, 하고 한숨을 쉬고 서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다른 질문을 해봅시다. 막부란 무엇이오?”

 

무슨 의도로 제게 이러한 질문들을 하시는 겁니까?”

 

막부를 이끄는 최고의 관직인 상국의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이라고 하는 관직이오. 알다시피 정이대장군은 이 나라의 무관직 중 최고위직. 그러니 이 나라는 한낱 신하에게 제왕을 대신하여 나라의 모든 권력을 일임하고 있는 웃기지도 않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리 말할 수 있소.”

 

…….”

 

그러나 우리는 결국, 또다른 막부를 세우기 위해 이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막부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니 우리가 천하를 바로잡아 또다른 막부를 세워 이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

 

그러니 우리는 결국,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오. 신하 된 자가 제왕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라. 이런 우스운 일을 지금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하고 있소.”

 

후회가 되십니까?”

 

서란은 이제 술을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이 속을 알 수 없는 자의 장단에 계속 맞추어주느니 취해서 뻗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취해버렸을지도. 서란은 눈앞이 서서히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털어냈다.

 

무엇을 말이오?”

 

김씨가의 가주가 되신 것 말입니다. 후회하고 계십니까?”

 

…….”

 

그러나 아무리 후회한다 한들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또한 그저 시대라는 하나의 바둑판 위에 놓여 있는 바둑알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의미하게 상대에게 집어삼켜지는 흑돌, 백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하는 것일 수밖에요.”

 

…….”

 

그리고 그 최선은 곧 전쟁입니다. 전쟁을 통해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고 지금의 막부가 아닌 다른 막부를 세우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 그것이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

 

그러니 저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고 전장으로 향할 겁니다. 전장에서 기꺼이 무녀 훌란의 현신을 재현하며 삶과 죽음을 바꾸어낼 겁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서인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촉촉해지는 것을 서란은 애써 모른 채했다. 어느새 연회가 막바지에 다다른 것인지 가희들이 한시에 가락을 붙인 애절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장안에 한 조각 달 떠 있고

온 집에는 다듬이질소리 들리네

가을바람 다함없이 불어오니

모두 이것은 옥문관의 마음이다

어느 날에 오랑캐를 평정해서

남편이 원정을 마칠까

 

자야오가.”

 

서란은 가희들이 부른 한시의 제목을 입 밖에 내어보았다. 구하의 진나라에 살았던 자야라는 여인이 흉노족과의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지은 가곡을 그 후에 들어선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 문집에서 소개해 유명해졌다던가. 서란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가희들과 무희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흔!’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서란은 입 속으로 자꾸만 유흔을 불렀다. 아마 지금 이 순간 유흔은 자신이 김서인과 신다희를 설득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것이었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갑자기 유흔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서란은 서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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