섟삭잖은 절망과 위장 녹색패러다임

[녹색칼럼] 이명박 정권의 ‘저탄소 녹색성장정책’ 총론비판(1)

정미경 | 기사입력 2009/05/20 [00:52]

섟삭잖은 절망과 위장 녹색패러다임

[녹색칼럼] 이명박 정권의 ‘저탄소 녹색성장정책’ 총론비판(1)

정미경 | 입력 : 2009/05/20 [00:52]
섟삭지 않는 서민들의 절망은, 이제 이명박 정부의 남은 임기가 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대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농락당하고 우롱당한 것만 해도 하늘을 찌를 터인데 후안무치한 이 정부가 내놓는 것마다 하나같이 사기와 기만으로 점철되어있으니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이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임기가 끝나면 녹색운동가가 되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까지 되어버렸으니, 이 전대미문의 폭언으로 볼 때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가 자못 궁금할 뿐입니다. 오죽했으면 단군 이래 최악의 대통령을 만났다고 일갈하는 선승까지 나타났을까.

쏟아내는 정책마다, 제정하는 법안마다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자아내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것은 단연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위장된 패러다임입니다. 자신이 걸어온 내력도 그렇거니와 자신의 기반인 집권당의 역사로 비추어보더라도 전혀 걸맞지 않는 패러다임이지요. 온 산하를 파헤치면서도 녹색성장이고 부자들의 놀이터를 만들면서도 녹색뉴딜을 갖다 붙일 정도로 이 패러다임은 말장난의 극치를 이루고도 남습니다.
 
"최악의 대통령, 말장난 지나쳐"
 
단순히 말장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환경, 반녹색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어요. 이것은 십수년전 리우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채택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패러다임이 결국은 지속가능한 환경파괴에 이용당한 국제적 교훈까지도 깡그리 무시한 그야말로 녹색위장의 대명사로 될 뿐입니다.

▲ 물길 잇기 사업이라 우기는 대운하의 전초기지인 경인운하사업 건설현장.     ©녹색연합


녹색사회라는 것은 산업사회의 대칭점에 있는 새로운 사회의 패러다임을 말합니다. 산업사회가 성장과 팽창을 내세우고 자연과 인간을 무제한으로 착취하면서 질주한 결과 지구환경과 인류공동체를 절멸 위험 앞에 빠뜨린 과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문명전환을 시도하려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곧 녹색사회입니다. 회색사회의 대안으로서 말입니다.

따라서 녹색사회는 붕괴하고 있는 산업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총체적인 전망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는 사유방식이자 생활방식이며, 문명사적으로는 일대변혁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녹색사회는 기본적으로 비자본주의의 길에서 자신의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상품경제 혹은 화폐 경제를 지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주저 없이 내세우지요. 자본주의가 국제화하면서 제국주의 세계체제로 이행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녹색사회는 국제관계에서 그 어떤 동맹도 찬성하지 않으며 도리어 비동맹을 지지합니다. 반세계화 투쟁대오에 언제나 앞장서는 것은 예외 없이 녹색시민단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파헤치고 부수는 반녹색 극치”

 
그렇다고 녹색사회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현존하거나 현존했던 사회주의는 자본 대신에 국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이른바 국가자본주의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자연까지도 착취대상으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현존하는 산업문명의 쌍두마차는 필연적으로 군비증강에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 패권을 확대하려는 국가적 이유에서도 그렇고 시장을 확대하려는 자본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패권으로부터 방어하려는 국가적 목표와 시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토착자본의 욕구로부터도 이 군비증강은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녹색사회는 군비축소를 한결같이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 비용을 평화롭게 사용하기를 추구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공생함으로써 더불어 공유하려는 관계를 평화로 파악하는 녹색사회의 평화관은 전투를 멈춘 일시적인 휴전기를 평화로 규정짓는 산업사회의 평화관과는 차원을 달리하지요.

나아가 녹색사회는 그 비용을 자연환경의 생태적 복원과 사회관계의 유기적 재편에 사용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특별히 토착적인 다양성에 주목하고 소규모 분산성에 깊은 주의를 돌리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역자립과 토지이용의 다핵화를 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불가피한 거래는 유무통상의 원칙에 입각해 진행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녹색사회, 나눔·순환의 시스템”
 
녹색사회가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데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도 이 자연스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녹색사회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치에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자신의 본성상 획일화와 계층화를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입니다. 본질적으로 녹색사회는 국가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독점과 무절제한 사용을 추구하는 산업사회의 생활방식은 자원과 에너지의 무한성이라는 잘못된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것을 애써 외면합니다. 하지만 녹색사회는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을 순환가능한 생명의 주기와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따라서 나눔과 순환을 위한 저소비형 생활방식은 필연적이지요. 순환에너지 소비시스템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불가피한 의무로 여기고 있습니다. 내구성을 회피하는 상품경제는 순환경제가 될 수 없기에 가급적 그것을 지양하고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상 상품경제를 지양하고 순환경제 즉 생태경제를 지향하고자하는 노력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여기에 걸 맞는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원심성의 팽창에너지를 추구하는 기존의 과학과 기술로서는 이러한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에 녹색사회가 구심성의 순환에너지를 추구하는 신과학에 주목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지요. 신과학에 의거한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적정기술 그리고 이러한 과학을 대중화하기 위한 과학상점운동을 조직화 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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