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백연의 송환이 결정되고, 그가 한씨가에서 내준 수레를 타고 떠나던 날은 아침부터 여우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가유의 시린 겨울 공기에 빗방울마저 얼어붙은 것인지. 비를 막기 위해 옷 위에 둘러친 피풍의의 모자에는 고드름 같은 성에가 매달려 있었다.
“아침부터 웬 비님이시려나. 아직 봄비가 내릴 때도 아니거늘, 어찌 이렇게 이른 비가 온단 말인가.”
비가 그치면 출발하자는 한씨가 사병들의 말에 백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땅이 젖어 질척거릴 터였다. 그러니 지금 출발하는 편이 나았다.
“그냥 지금 출발하세. 자네들의 역할은 나를 사린현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아닌가. 비가 그쳐 길이 질척거리면 자네들이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도 만만치 않은 수고가 따를 것이지 않겠나. 그러니 그냥 지금 출발하세.”
비와 함께 모진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백연은 문득, 이것이 일각 정도도 지속되지 않을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카포.”
서란이 손에 보자기로 감싼 무언가를 들고 달려왔다. 무엇을 이리 꽁꽁 싸맨 것일까.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세 겹의 비단보로 감싸인 것은 백연이 두 손으로 들기에도 묵직했다.
“이게 무엇이냐?”
“찻잔이야.”
“찻잔?”
“응. 오스만에서 들어온 유리찻잔과 다구들이야. 나는 또 있으니까 아카포가 가져가. 가서 이 찻잔에 차 담아 마시면서 나 잊지 말아야해. 알겠지?”
서란의 마음 씀에 백연은 눈시울이 붉어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차를 즐기는 부상국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은 찻잔이었다. 찻잔이야말로 늘 곁에 두고 보며 상대방을 그릴 수 있으니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청명이 오면, 그 전에 수확한 용정으로 만든 말차를 보내주마. 용정은 청명 전에 수확한 것이 가장 향이 좋더구나. 그런데…….”
백연의 한쪽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 날씨에 옷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은 것인지 서란은 하얀 침의에 검정색 모직 포만 걸치고 있었고, 신발은 물론이고 버선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아카포가 떠난다기에. 아카포가 떠나는 것도 못 보게 될까봐…….”
서란의 뺨과 발가락은 추위에 발갛게 얼어 있었다. 이 추위에 맨발로 정신없이 달려온 탓인지 발갛게 언 조그만 발가락을 내려다보던 백연이 입고 있던 피풍의를 벗어 서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지금 헤어진다 해서 다시 못 만나는 것도 아닐진대, 무에가 급하다고 이 날씨에 이런 차임으로 신도 없이 맨발로 온 것이냐.”
“그래도…….”
“너는 내가 만난 벗들 중 가장 영특한 이이며, 아름다운 이다. 한데, 그런 네가 고뿔에라도 걸리면 내가 슬프지 않겠느냐.”
여우비에 젖은 서란의 머리카락이 얼어 있었다. 백연은 피풍의의 매듭을 단단히 묶어주고 모자를 씌워주었다. 검정색 피풍의를 묶는 매듭은 금색 실을 꼬아 만들어져 어딘지 모르게 화려하고 따뜻해보였다.
“날씨가 춥다. 이제 들어가거라.”
“아카포.”
백연이 수레에 오르려는 순간, 서란은 백연을 다시 불러 세웠다. 서란은 백연의 등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서신을 쓸게. 벗끼리는 서로 서신을 교환하잖아. 아카포는 내 친구니까 꼭 서신을 전할게. 그러니까 서신 받으면 꼭 답장해줘.”
백연이 수레에 오르고 휘장이 쳐졌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서란의 뒤에 서 있던 유흔이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서란을 안아 올려 모포로 감쌌다.
“애그, 우리 화야. 맨발로 나오고도 발 안 시려?”
“조금. 조금 시려, 유흔.”
“그래그래. 어서 들어가자.”
유흔의 품에 안겨 처소로 돌아온 서란은 이불 속에서, 유흔이 구워주는 경단을 받아먹었다. 유흔은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한다며 설탕물 대신, 간장을 발라 구워주었고, 서란은 간장경단도 맛있다며 잘 받아먹었다.
※
혹독했던 북해도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동안, 서란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이제 서란은 영어로 일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한 단어와 문장은 읽고 그 뜻을 앎은 물론, 직접 영어로 시나 소설을 쓸 수도 있었다.
“애그, 우리 화야 정말 똑똑하네.”
서란은 확실히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고, 유흔은 신이 나서 서란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병법을 가르치고, 군사에 대해 가르치는 동안, 서란은 눈에 이채가 어린 채로 유흔의 가르침을 들었고, 도교와 불교에 대해 가르치면 꿈꾸는 듯한 눈으로 유흔을 바라보고는 했다.
“우리 화야, 이제 경제가 뭔지도 가르쳐야겠다.”
서양에서도 비교적 최근 생겼다는 학문인 경제학은 부상국 같은 동방에서는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서란이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그 세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서란에게 경제학을 가르쳐야 했다. 고민하던 유흔은 결국, ‘그’가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서양 상인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서란을 데려갔다.
“혹시 이곳에서 경제학 서적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부상국말을 할 줄 아는 젊은 부인을 만난 유흔은 서점에 경제학 서적이 들어와 있는지를 물었다. 부인은 고개를 젓더니, 곧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데려왔다.
“이 사람은 피에드르라고 합니다. 저의 남편 되는 이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경제학에 일가견이 있지요. 경제학을 배우고자 한다면 이 사람만큼 좋은 선생이 없을 것입니다.”
부인의 소개에, 피에드르라고 불린 남자가 깃털 달린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유흔은 서란과 함께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피에드르 팰그램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음 글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