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은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3장 폐월수화(閉月羞花)(23-2)

이슬비 | 기사입력 2018/12/16 [11:43]

"서란은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3장 폐월수화(閉月羞花)(23-2)

이슬비 | 입력 : 2018/12/16 [11:43]

<지난 글에 이어서>

톡톡.


서란은 자신의 뒤통수를 두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 손을 창살 밖으로 뻗은 백연이 머쓱한 표정으로 서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서란은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고 머리를 기댔다. 고작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기 위해 굶어죽겠다는 이런 바보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피곤해진 까닭이었다.
 
이런 곳에 온 것을 보아하니 한씨가 직계는 아닌 듯한데…….”


내 이름은 한서란이야.”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알려주었다. 보아하니 이 바보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해도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끝내 자신이 이름을 밝히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 한씨가 제2후계?”


그럼 한서란이 나 말고 또 있어?”

서란의 대답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마치 이제 궁금한 거 해결됐으면 조용히 하라는 듯한 서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백연이 저기……하며 입을 열었다.
 
또 왜?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어?”


미안하다.”
 
미안하다……? 백연의 말에 서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안하다니? 도대체 무엇이? 서란은 백연을 향해 몸을 돌리고 앉았다. 도대체 이 바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일단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거나 화가 났다면 미안하다.”


……?”


너는 이미 한 번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지 않느냐. 한데도 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정말 미안하다.”


…….”


그게 다야?”
 
고작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려고 자신을 돌려 앉혀놓았단 말인가. 그러나 서란은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여태 자신의 해묵은 기억과 아픔을 헤집어놓고도 그것이 또다른 아픔이 되었을 거라 여기지 않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달리, 이 남자는 그것이 자신의 또다른 아픔이 되었을 거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되었어. 그래도 아카포, 당신은 미안할 걸 아니까 되었어.”


……


좋아.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뭐 좀 먹어. 당신이 여기 있을 동안, 내가 당신의 친구가 되어줄 테니까.”
 
다음날부터 서란은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서책들을 지하감옥으로 들고 가 백연의 앞에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서책들은 병법서일 때도 있었고. 역사서일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한시집일 때도 있었는데, 백연이 가장 많은 호기심을 드러낸 서책은 다름 아닌 영어교습서였다.


그 책은 영어 알파벳과 함께 발음기호와 여러 단어들을 나열한 책이었는데, 맨 마지막의 두 꼭지를 할애해 부상국의 단가(短歌)와 한시를 영어로 번역해 실어놓고 있었다.
 
Unknown name that is caught at the end of the hand
If you pull it out, you sound like you can hear it.
"I want to live“
 
손 끝에 잡히는 이름 모를 풀
불쑥 뽑으면, 들릴 듯 말 듯 울먹이네
나 살고 싶어요라며
 
서란의 영어실력은 영어를 몇 달 간 공부한 것 치고는 꽤 유창한 실력이었다. 처음 보는 꼬부랑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건 이렇게 읽는 것이다 알려주는 서란의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영특해보였다. 백연은 손을 들어 서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정말 영리하구나.”


헤헤.”


나는 아무리 보아도 이게 무슨 꼬부랑글자인가 싶다.”


이건 영어야. 영길리국에서 쓰는 말이래.”


영길리?”


. 그 나라는 우리 부상국처럼 섬나라인데, 땅이 마치 토끼처럼 생겼대.”


그래?”
 
영리하다는 칭찬에 신이 난 서란이 영길리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그 나라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스라는 곳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미 웨일스는 잉글랜드령으로 병합되었고, 이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곳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느니, 지금은 그저 섬나라이지만 앞으로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라느니 하는 서란의 말에 백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제국?”


. 여러 종족을 힘으로 지배하고, 세계의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국가를 제국이라 한댔어.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직까지 진정한 제국은 없어.”


그래? 구하의 명이 있지 않니?”


명은 그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해. 세계는 우리 동양만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 명은 우리 동양만 있는 것처럼 군림하려 들고 있잖아.”
 

 
서란과 함께 어울리는 동안, 백연은 서란을 통해 더 많은 세상을 접하고, 여러 나라와 종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서란은 백연이 여태 접해보지 못했던 검은 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는데,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이 이룩한 뛰어난 문명과 아름다운 음악과 춤, 그리고 그들의 미적 감각에 대한 이야기들은 백연을 황홀경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머지않아, 백연은 서란에게 그런 신기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 유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도 서란은 말끝마다 유흔이 어쩌고하며 유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백연은 그런 서란을 귀엽다는 눈길로 바라보다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 검은 대륙에도 미인들이 많지 않을까?”


으응?”


본래 사내들은 말이다. 아주 단순해서 어떤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든 그곳에 있을 미녀들을 먼저 떠올린단다. 한데, 유흔도 사내가 아니냐. 그렇다면 당연히 그곳에 있을 미녀들을 먼저 떠올렸지 않겠느냐.”
 
말을 하다 말고, 백연은 아차 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저 반농담 삼아 한 이야기일 뿐인데, 서란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해져 있었다.

<다음 글에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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