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란은 이제 유흔이 들기에 벅찰만큼 무거웠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2장 폐월수화(閉月羞花)(22-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9/17 [10:06]

서란은 이제 유흔이 들기에 벅찰만큼 무거웠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2장 폐월수화(閉月羞花)(22-1)

이슬비 | 입력 : 2018/09/17 [10:06]

<지난 글에 이어서>

나고현성에서의 승리를 발판 삼아, 유흔의 5천 군대는 아무르강 유역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며칠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유씨가의 성지를 지켜낸 5천의 군사들은 너도나도 무릎을 꿇고, 한씨가의 시조 훌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내 피를 제물로 바쳤다.


네 덕분이야, 화야.”
 
전투가 끝난 날 저녁에 열린 조촐한 승전연에서 유흔은 서란을 자신보다 상석에 앉히고 술을 따라주었다. 서란이 어린아이인 점을 감안해 유흔은 가장 순한 술을 골라 딱 한 잔만을 주었고, 서란은 자귀나무 꽃술로 만든 향긋한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더 줘.”
 
서란이 유흔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유흔이 서란은 아직 나이가 어려 이 이상 마시면 안 된다고 달랬으나, 서란은 유흔의 앞에 있는 술병을 낚아채 입에 대고 들이켰다.
 
화야!”
 
서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유흔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란을 불렀고, 승전연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서란의 행동을 두고 설마?’ 하는 눈초리로 유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는 승전연이었다. 서란의 행동은 평소라면 무슨 짓이냐고 질책을 들어 마땅했지만, 지금은 고작 어린아이의 치기로 인해 잔치를 망칠 수 없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유흔은 이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탁자에 엎어진 서란을 바라보았다. 유흔은 서란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 조금 전까지 서란이 앉았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유흔.”
 
서란이 유흔의 무릎에 앉아 목에 팔을 감아왔다. 유흔은 그런 서란의 볼을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언제나 창백하리만치 하얗던 서란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유흔은 손가락을 위로 올려 서란의 눈 옆에 자리한 흉터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위쪽을 찔렀으면 실명했을 위치에 자리 잡은 흉터는, 흉하다기보다 처연해 보이는 느낌을 더해주었다.
 
애그, 우리 화야,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말만 해. 다 사줄게.”


…….”


? 은장도? 노리개? 귀고리? 비녀? 뒤꽂이? 떨잠? 아니면 뭐 사줄까? , 말만 해. 다 사줄게, .”


가락지.”


?”


나 가락지 사줘, 유흔.”
 
서란의 말에 순간, 유흔은 헙, 하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락지라니! 가락지는 기혼녀가 주로 끼는 것으로, 혼인 전에 신랑이나 정인이 예물로 주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가락지라니.
 
화야?”


으응…….”

유흔은 서란을 불렀다. 그러나 서란은 술에 취해 잠든 것인지, 눈을 감고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보겠소.”
 
유흔은 서란을 안아들고 배정받은 처소로 걸어갔다. 언제 이리 자란 것일까. 서란의 몸은 어느새 유흔이 들기에도 벅찰 만큼 무거워져 있었다.
 
애구, 그래도 아직 애야, .”
 
아마 가락지를 사달라고 한 것도 아침에 눈을 뜨면 잊어버리리라. 유흔은 잠시 가만히 멈추어 서서 서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서서히 태가 나기 시작하는 얼굴은 며칠 전보다 예뻐져 있었다.
 

 
이번 전쟁은 한씨가와 유흔, 그리고 서란에게 예상치 못한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번 전쟁의 패배로 인해 신씨가와 김씨가는 서로 간에 맺은 동맹을 파기했으며, 김씨가는 유씨가의 성지를 침략한 것에 대한 사과문과 함께 아무르강 너머의 성 중 2개 현을 할양해왔다.

무엇보다 괄목할 만한 성과는 방계인 서란이 한씨가의 차기 가주로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서란을 제 사촌동생의 죽음으로 운 좋게 금족령에서 벗어난 방계 후계’, ‘제 자식을 죽이려한 광인의 딸정도로만 여겨왔던 천하의 모든 이들이, ‘장차 한씨가를 이끌어도 좋을 재목이라며 서란의 자질을 입을 모아 칭송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나고현성에서의 서란의 활약상까지 입에서 입으로, 꼬리를 물고 더욱더 부풀려 전해지니 서란은 무녀 훌란의 현신이 아니냐하는 평가까지 듣게 되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밤새 편안히 침수 드셨는지요?”
 
이제 권속들 중에도 서란의 편에 서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여가 아닌 서란에게 명운을 걸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한씨가 방계의 인물들 중 몇몇은 서란을 찾아와 공주님이라고 부르며, 유구국에서 들어온 조후, 오스만이라는 곳에서 들어온 각종 보석류와 향료 등 귀한 선물을 바쳤다.
 
기쁘게 받겠습니다.”
 
서란은 선물을 가지고 온 이들에게 말차를 내려주었다. 두 손으로 공손히 찻잔을 받은 이들이 자여의 처소에 있는 명나라산 청화백자 다완과는 달리, 서란의 처소에서는 유럽산 유리 찻잔을 쓰는 것으로 보아, 투명한 유리를 통과하는 빛의 오묘한 색을 즐기는 것 같다며 다완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운을 띄웠다.
 
오스만을 알고 계십니까?”
 
나이가 지긋한 남성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하윤이 후계혈전을 치를 때 갓난아기였던 덕분에 살아남은 하윤의 막내여동생 화인의 기생첩 나선으로,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준수한 용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란은 빙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서란의 태도에 그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시다시피, 방계에서는 어린 딸을 제 손으로 죽이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사촌자매들을 위한 혈전의 제물이 되어 비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부모의 손에 죽는 것이 나으니까요.”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어머니의 비통한 눈동자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제 자식들도 그리 보냈지요. 제 손으로 딸들의 목을 졸랐습니다.”


…….”


그러니 이제는 저도 끝내고 싶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방계의 운명을요,”
 
서란은 유흔의 손에 손가락을 걸었다. 아무리 강해보여야 한다고는 하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강한 모습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죽는 게 낫겠어.’
 
다섯 살 어린 서란에게 독을 먹이던 날, 서란의 어머니 유란은 그렇게 말했다. 어미에게 맞아 발갛게 부어오른 뺨을 한 서란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끊임없이 울고 또 울었다.
 
왜 반박을 하지 않니? 왜 대들지도 않아?’

그날, 서란 자신이 울었던가. 아니면, 울지 않았던가. 그날, 서란은 어머니의 말에 뭐라 대꾸할 힘조차 잃은 채, 그저 텅 빈 눈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왜 내가 죽어야 하냐고 반박을 해, 아가야. 차라리 죽기 싫다고 대들기라도 해. 차라리……, 차라리 살고 싶다고 말해. ?’


…….’


아가야, 샤르휘나, 내 딸아. 차라리 살려 달라고 빌어보렴. ? 차라리 살려달라고, 죽기 싫다고 빌어봐, 내 딸아.’
 
처소 안을 가득 메운 어머니의 울음에 서란은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길이 자신의 뺨을 쓸어주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의 경대에서 나오던 자그마한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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