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모를 가을들꽃을 꺾어 서란 머리에 꽂았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17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7-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3/14 [10:17]

"이름모를 가을들꽃을 꺾어 서란 머리에 꽂았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17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7-1)

이슬비 | 입력 : 2018/03/14 [10:17]

<지난 글에 이어서>

 

제17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2)-1


떠나기 직전까지 유흔은 병장기와, 군사들의 훈련, 그리고 전술과, 가유 제1방어선의 지리와 지형지물을 점검했다. 서란은 그런 유흔을 따라 가라고루성 곳곳의 군사시설들을 돌아다녔다. 관리창에서, 훈련장으로, 또 지휘소로 유흔을 따라다니는 내내 서란은 검을 들고 있었다.


머리장식도 간소한 것만 몇 개 꽂은 것이, 영락없는 전투에 나서는 무인의 행색이었지만 서란은 아직 열한 살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유흔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것은 왜 이런 것이냐, 저것은 왜 저런 것이냐를 묻는 서란의 모습은 또래의 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서란이 유흔의 뒤를 따라 관리창의 무기고로 들어서자, 군졸들이 일제히 예를 갖추며 길을 비켜섰다.
 
이곳입니다, 도련님, 아가씨.”


내 그 정도도 모르지는 않네만.”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유흔이 뒤에 따라온 군졸 하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유흔의 눈길을 받은 군졸이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유흔은 아무 말도 없이 군졸에게 다가갔다. 군졸의 숙인 고개가 마치 땅바닥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더욱 더 깊이 숙여졌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유흔의 목소리는 마치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군졸의 모습은 온몸이 심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쥐와 같았다.
 
, 한씨가……, 37대 제4후계이셨던……, 한씨가 방계의……, , 유흔 도련님을 뵙습니다. 소인의 이름은…….”
 
유흔이 손으로 턱을 들어 올려 군졸의 눈이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감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애써 시선을 피하는 군졸을 바라보던 유흔이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무얼 그리 겁을 내느냐? 그리 큰 일로 너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닐진대.”

 

……?”


옷솔기가 터졌구나.”
 
유흔은 군졸의 턱에서 손을 떼고, 바느질이 뜯겨져나간 군졸의 옷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옷솔기가 터진 일로 너를 질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하지만 이왕에 사람이 옷을 입는 거, 조금이라도 단정하게 입으면 훨씬 보기 좋지 않겠느냐? 네 기분도 좋고 말이다.”
 
황송해하는 군졸을 뒤로 하고, 유흔은 무기고를 관리하는 교위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서란은 그런 유흔의 옷자락을 꼭 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다.
 
……?”


조금 전에는 왜 그런 거야?”


화야?”


뭘 그렇게 신경 써? 남의 옷솔기가 터지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샘이 난 것일까. 서란이 보통 아이들과 같은 성장과정을 거쳤다면, 유흔 또한 그리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서란은 결코, 보통 아이들과 같은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서란의 정서를 보통 아이들이 서란의 나이에 확립하게 되는 정서와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서란의 말은, 말 그대로 왜 남의 일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유흔은 서란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서란, 오기 알지?”


오기?”


, 동방에서 태어나 동방 출신의 부인을 얻고 서쪽으로 향한 사나이 오기. 그 유명한 오자병법의 주인공 오기 말이야.”


그런데?”


그 오기가 그랬어. 무릇, 지휘관 된 자는 장졸(將 卒)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자식처럼, 가족처럼 여기며 진심을 다해 돌보아주어야 한다고. 그러면 지휘관과 장졸들 사이에 믿음이 생기고, 그 군대는 천하의 그 어떤 패자(霸 者)라 할지라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군대가 된다고.”
 
말을 이어가던 유흔은 심각해진 서란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하는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서란은 가족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니, 가족이라는 것을 경험해봤으되, 결코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가족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친어미는 다섯 살 어린 딸에게 독을 먹여 숨을 끊으려 하고, 이모이며 양어미라는 자는 조카이며 수양딸을 자신의 친딸들을 위해 죽을 도구로 삼고, 이모부라는 자는 자신의 친딸들보다 똑똑하고 잘나 보이는 조카를 죽이기 위해 시녀를 매수해 차에 독을 섞고. 이런 가족을 어찌 가족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식이라 하여도 내가 가슴으로 품고,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며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는 자들도 있는데, 서란의 주위를 둘러싼 가족이라는 이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모질기만 한지.
 
여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유흔은 애써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순간, 유흔의 머릿속에 나는 서란의 가족이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가족……?’
 
유흔은 고개를 저었다. 서란에게 유흔은 가족이 아니었고, 가족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가족이어서도 안 되었다. 지금 서란이 살아가는 시대는 전란의 시대였고, 이 시대 안에서는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서로 적이 되어 칼을 겨눌 수 있었다.


한데, 외숙부에 불과한 자신이, 정확히는, 양외숙부에 불과한 자신이 어떻게 서란의 가족이 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유흔은 갑자기 목에 단단한 무언가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목에 커다란 덩어리가 들어 있는 듯한, 단단한 이물감과 함께 유흔은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유흔은 얼른 목을 붙잡고,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려댔다. 그 모습에 서란이 유흔의 등 뒤로 다가와 주먹을 쥐고 팡팡 때리기 시작했다.
 
유흔,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한참만에야 진정이 된 유흔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서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작년에 비해 꽃이 핀 양 볼과 입술, 그리고 자신을 오롯이 담고 있는 두 눈동자가 유흔의 두 눈에 선명히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유흔은 무기고 안을 돌아다니며 창이나 활, , , 방패, 도끼, 망치 같은 여러 병장기와 공성무기들을 점검했다. 평소에도 늘 기름 먹인 천으로 닦고, 틈나는 대로 철저히 점검하는 까닭에 서란은 물론이고, 항상 무기고를 관리하는 교위들과 병졸들마저도 흠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유흔은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병장기의 각종 흠과 수리할 곳, 그리고 녹슨 부분을 찾아내고 시정을 명했다.
 
유흔, 수리해야할 병장기가 이렇게나 많아? 내가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던데?”
 
무기고를 지나 훈련원의 연무장으로 가는 내내 서란은 유흔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무기고에서의 일을 물었다. 유흔은 크고 투박한 손으로 서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잉. 머리 망가진단 말이야.”
 
서란은 흐트러져 내려온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유흔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가을들꽃을 꺾어 서란의 귀 뒤에 꽂아주었다.
 
화야.”


?”


우리 화야도 나중에 크면 알게 되겠지만, 화야, 원래 모든 것은 흠이 없을 때가 더 위험한 거야.”


    • 도배방지 이미지

    이슬비 오컬트무협소설 연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