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인이 미쳤군, 아직 노망들 나이도 아닌데"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16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6-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2/17 [08:34]

"김서인이 미쳤군, 아직 노망들 나이도 아닌데"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16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6-1)

이슬비 | 입력 : 2018/02/17 [08:34]

<지난 글에 이어>

제16장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16-1)


서란이 열한 살이 되고 맞이한 1월은 여느 해의 1월보다 급격하게 돌아갔다.
 
1.
천렵과 채집을 생업으로 삼는 제화족에게 있어서 1월은 카무이신의 축복이 내린 계절이 아닐 수 없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폭설이 내리고, 온 땅이 얼어붙으면 눈표범이나 물범, 순록, , 호랑이 같은 수많은 겨울동물들을 잡아 한 해 동안의 비상식량을 마련하고, 옷과 신발을 지을 가죽을 마련할 수 있으니 1월이야말로 제화족에게는 가장 축복어린 계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제화족은 1월을 가장 신성한 계절로 여기고, 해마다 1월 초순이 되면 곰을 잡아 제사를 지냈으며, 이 기간 동안에는 불필요한 살육과 전쟁을 삼갔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옛말에 불과했다. 목협막부에 의해 양소막부가 무너지고, 자신의 영지를 가진 독립영주가문들의 세력이 크게 팽창하면서 시작된 작금의 시대는 모든 것을 혼란의 도가니로 바꾸어놓았다.


예부터 이어내려오던 신성한 전통들은 차츰차츰 사라져가고, 오직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그런 세상. 이제 세상은 그런 혼란의 시대가 도래한지 오래였고, 각 영지의 독립영주가문들은 서로의 영지를 침범하고, 다른 가문을 멸망시키며 천하의 패자(霸 者)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사소한 차이로 인해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문들의 사이가 철천지원수지간이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부상국의 끝, 차가운 북해 바다에 떠있는 섬 북해도의 네 독립영주가문 중, 각각 최북단에 위치한 영지 가유와 추연의 주인인 두 가문, 한씨가와 김씨가 또한 그러하였다.
 
본래, 두 가문은 사이가 매우 안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는 한씨가의 시조인 무녀 훌란이, 김씨가의 시조인 카사르의 아버지 샤쿠샤인을 죽이고, 제화족과 삼백족의 7년 전쟁을 이끌었던 일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여, 전쟁이 끝나고 삼백족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은 제화족의 귀족들은 저마다 일가를 창시하였는데, 한씨가를 창시한 훌란은 키야트 아이누의 여성우월주의적 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였고, 김씨가를 창시한 카사르는 이에 대한 반발로, 키야트 아이누의 여성우월주의적 문화를 버리고 삼백족의 남성우월주의적 문화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두 가문의 문화적 차이는 세월이 지나도 전혀 좁혀지지 않았고, 두 가문이 사소한 일로 분쟁을 거듭하게 되는 가장 강력한 빌미를 제공하고는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상하리만치 계속된 두 가문의 평화에 다른 가문들은 모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고, 이는 공가와, 막부, 황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것이 제1후계 자여가 소학 정도나 뗄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주자는 정옥의 자식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이들은 한씨가의 일원들뿐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막아둔 둑은 언젠가는 터지게 마련. 서란에 비해 서책을 이해하는 속도가 더딘 자여가 소학의 맨 마지막 장을 남겨두었을 무렵, 한씨가의 본성인 가라고루성에는 전시상황임을 알리는 흑색 전서가 날아들었다.
 
아무르강 유역 전투 중. 설야성, 청화현, 나로성으로 이어지는 가유의 제1방어선, 분전(奮 戰) . 정화현, 설지성, 호국성, 호연성으로 이어지는 추연의 제1방어선으로 인근 성들에서 지원 병력 출진. 속히 중앙에서 원군을 출병시켜주기를 요청함.’
 
전서의 발신지는 설야성, 청화현, 나로성으로 이어지는 가유의 제1방어선 중, 설야성. 발신자는 설야성의 차기 성주인 도화란이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설야성의 도화란이 흑색 전서를 보내왔다는 소식과 함께 내려온 가주의 소집령에 유흔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으드득, 하는 소리를 냈다. 한씨가의 일원으로서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가문이 전쟁에 휘말린 이 상황이 오히려 서란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서란은 이제 겨우 열한 살이었다. 부상국에서 성년이 되는 공식적인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삼백족의 기준이요, 제화족의 기준으로 성년이 되는 나이는 열여섯이라 하나, 서란의 나이는 삼백족을 기준으로 삼든, 제화족을 기준으로 삼든 아주 어렸다.


하여, 서란은 공식적인 회의 자리나 석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흔은 서란을 가내회의가 열리는 가주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한씨가의 방계, 한씨가 전대 가주의 제4후계였던 유흔, 한씨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왔는가, 동생? 이리 앉게.”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한 남매의 다정한 안부인사와 함께, 정옥이 유흔에게 자신과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는 의자 중 하나를 권했다. 유흔은 고개를 숙여 정옥에게 목례를 올리고, 주어진 자리에 앉았다.
 
한데, 너는 어인 일이냐?”
 
정옥의 눈길이 유흔의 뒤에 서 있는 서란에게로 향했다. 서란은 얼른, 한쪽 무릎을 마룻바닥에 가까이 대고 굽히며, 한 손을 늘어뜨리고, 나머지 한 손을 세운 무릎 위에 올렸다.
 
한씨가의 제2후계 서란, 가주님을 뵙습니다.”


문안은 되었다. 그래, 내 너는 어인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속히 대답하거라. 네가 여기는 어인 일이더냐?”


제가 데려왔습니다, 가주님.”
 
유흔이 얼른, 서란을 감쌌다. 서란은 마룻바닥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유흔의 뒤에 섰다.
 
동생은 조카에게 벌써부터 전술, 전략에 관한 교육을 시키나보군그래.”
 
회의는 가장 먼저, 1방어선에서 말을 달려 도착한 전령을 불러와 현재 상황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상황은 전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의 급박함만은 전서를 통해 본 것 이상이었는데, 훌륭한 어장 겸 식수원이 되어주는 아무르강을 온전히 차기하기 위한, 김씨가의 가주 서인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김씨가의 본성인 카이성에서까지 군사를 차출해 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서인이 드디어 미쳤군. 내가 알기로, 그자가 아직 노망이 들 나이가 아닌 것으로 아는데. 동생, 내가 무얼 잘못 알고 있었는가?”


아닙니다, 가주님. 김서인 그자가 아직 노망이 들 나이는 아니지요.”


그래? 한데, 어찌 노망도 들지 않은 자가 그리 분별없는 짓을 한단 말인가.”
 
정옥이 서인의 행태를 두고 노망 운운하는 것은, 상대가 이 자리에 없다 해도 큰 결례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옥이 서인의 노망을 거론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무르강 유역이 유씨가의 성지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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