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 의원 아내 목혜정 "남영동 아직도 못봐"에필로그에 남편출현 영화 기피하는 사연, "새시대 물꼬튼 사람들..."새벽이 오기 전 어둠의 색은 87년 1월에 가장 짙었다. 박종철 열사가 세상을 떠난 87년 1월 14일 전후에 남산 중앙정보부, 남영동 대공분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87년 1월 부부혁명가라고 우리 부부의 이름이 신문에 실린 것을 나중에 알았다. 부부였고 민주혁명에 몸 바쳤던 시기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결혼 이후 우리는 노동운동, 조직운동을 같이 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잡혀가고 우리는 도바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능한 운동하는 사람처럼 안 보이려고 나는 짙은 화장을 하고 야한 파마머리를 했고 남편도 영어글자가 여기저기 새겨진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그 생활이 길지는 못했다. 86년 12월 우리는 얼굴에 천이 둘러진 상태로 남산에 끌려갔다.
나는 먼저 풀려나와 남편 옥바라지를 하며 민가협 활동을 하고 각종 시위와 행사에 참여했다. 재판정에서 공안검사들에게 계란 던지고 민가협 시위 중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에 버려지기는 일상이었다. 그래도 나는 역사의 한 복판을 활보하고 다녔는데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쌓아놓은 토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음이 얼마나 슬펐을까, 그 당시 나는 역사의 현장에 대해 감옥 속에서 말로만 들어야하는 남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면회 때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87년 초부터 고문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다음 행선지는 구치소다. 87년 봄 서대문 구치소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엄청 많았고 구치소 마당을 가득 채운 면회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삼삼오오 시국에 대해 재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사건은 몇 년 구형을 받았다, 구치소 안 단식 투쟁으로 건강이 걱정이다. 누구 엄마가 교도관에게 항의하다 쓰러졌다.오늘은 몇 시에 민가협 행사가 있다. 등등이 가족들의 대화 내용이었다.
갇힌 사람이 너무 많아 면회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고 잠깐의 면회에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었다. 87년 봄 시위가 확산되면서 가족 소식, 재판 관련 이야기 등의 비중은 점차 줄었다. 남편은 박종철 열사에 관한 사실이 밝혀진 후 거리 시위의 분위기 등을 더 듣고 싶어 했다.
어제 시위는 어느 정도의 인원이 참여했다. 넥타이부대도 나섰다. 시민들이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을지로 뒷골목에서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셔터를 내리는 상인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남편의 눈에서는 빛이 반짝이면서도 그 현장을 목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득 서려있었다.
영화 <동주>의 엔딩 부분 ‘서시’를 읊는 장면이 떠오른다. 감옥의 창살 밖에서 각혈하는 윤동주를 잡던 카메라는 윤동주의 시선이 되어 창살 밖 별을 화면에 싣는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낭송 소리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감옥이나 구치소의 밤, 창살 밖 공기나 별빛은 수감자에게 그리움과 회한과 결의로 범벅된 감정을 일으킨다.
87년 봄 면회 온 가족들에게만 걸러 듣던 함성이 가슴에 울려퍼지던 밤. 당시 감옥에 갇혀있던 남편 민병두, 그와 함께 수감되었던 동지들, 학생들, 고 김근태 의장님. 그들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거리에서 목청껏 구호를 외칠 수는 없었고, 뒷모습조차 찍힌 사진도 당연히 없고, 당당하게 두 손 불끈 지고 행진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87년을 만들어낸 주춧돌이라는 자긍심을 충분히 가졌어야했다.
그런데 그 단어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30년이 흐른 지금 온전한 자긍심을 내가 이 글로나마 채워주고 싶다. 겨울의 고문 끝에 87년을 감옥에서 보낸 당신들이 새 시대의 물꼬를 터준 사람들이라고! 원본 기사 보기:서울의소리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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