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이불문[聽而不聞]의 대가, '남자 박근혜'

[심종기 칼럼] 들어도 안 들리거나 못들은 체 하는 소통을 거부하는...

심종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11/18 [08:33]

청이불문[聽而不聞]의 대가, '남자 박근혜'

[심종기 칼럼] 들어도 안 들리거나 못들은 체 하는 소통을 거부하는...

심종기 칼럼니스트 | 입력 : 2017/11/18 [08:33]
▲  칼럼니스트 심종기

[신문고뉴스] 심종기 칼럼니스트 = 성철스님 말씀이 생각난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선문답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대체적인, 공통적인 해석은 “관념의 얽매임에서 탈피해야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는 가르침이라 한다. 아무튼 이 말이 성철스님을 대표하는〈法語>가 되었다.

    

이런 선문답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주로 사회 지도층이다.

 

사회지도층이 주로 사용하는 화어(話語 : 화술의 언어) 는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 이다. “보기는 보는데 보이지 않고, 듣기는 듣는데 들리지 않는다” 생각 없이 들으면 멋진 선문답 같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詩句 같기도 하다.

    

《聽》 이라는 한자가 있다. 음과 훈은 “들을 청” 이다. 《聽》을 낱낱이 분해하면 이렇다. 귀(耳)+짊어짐(壬) + 곧음(直)+ 마음(心)이 합쳐져 “들을 청”이 되었다. “들을 청(廳)” 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 곧은 마음과 귀로 듣는 것을 짊어져야 한다” 는 책임성을 부여한 한자다.

    

들을 청(聽)에 들어간 壬(짊어질 임, 아일밸 임)자가 재미있다.

 

생김새를 보면 가운데 한일자(一)가 상하보다 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인이 아이를 배면 배가 가장 큰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여인이 아이를 밴 것은 짊어져야 하는 무게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건강하게 생산해야 한다는 책임의 의미도 담긴 것이다.

    

그 의미 속에는 곧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곧은 마음으로 잘 듣는 것은 아이를 밴 여인이 어린 생명을 신성하게 지켜야 하듯 바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들을 청(廳)이다. 올바른 마음으로 올바로 듣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을 불통이라 한다. 바람 골을 막으면 마을도 답답해진다. 방문을 열고 가끔씩 바람과 소통시켜주지 않으면 방은 얼마가지 못해 쾌쾌한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기고, 곰팡이가 피고, 썩어간다.

    

오래 전 제주를 처음 여행하면서 진정한 소통(疏通)의 의미를 깨달았다. 제주에는 바람이 많고 강하다. 또한 돌담도 많다. 필자는 〈돌담〉을 보면서 위대한 소통을 깨달았다. 제주의 돌담은 강한 태풍과 비바람에도 당당하게 서 있다.

    

아름드리나무는 태풍에 뿌리 채 뽑혀 민망스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지붕도 날아가고, 옹벽도 무너져 내리고, 농작물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독 돌담만은 훼손이 안 되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돌담에 다가가서 살펴 본 후 그 의문이 금세 풀어졌다. 돌담은 바람과 기막히게 소통을 하고 있었다. 돌담은 바람과 소통하는 여백이 있다. 돌과 돌이 마주한 곳엔 바람과 소통하는 여백의 공간이 존재한 거다. 바람과 소통하지 못하는 거대한 담벼락은 무너져 내렸지만 돌과 돌 사이 바람 골이 있는 돌담은 강한 태풍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거다.

    

소통이란 의미가 그만큼 중요한 거다. 소통이 되면 강한 태풍에도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소통이 되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썩는다. 그건 인간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소통이 되지 못하면 세상은 썩는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듯이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다.

    

인간사회에서의 소통은 잘 보고 잘 듣는 것이다. 그것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바람이다. 너나없이 소통하자고 외치고, 소통하겠다고 말을 한다. 소통이 무엇인지 제대로 의미도 모르면서 犬과 牛들이 소통을 외쳐댄다. “소통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청이불문 [聽而不聞] 이란 말이 있다. 들어도 들리지 않고, 들어도 못들은 체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듣는다는 의미는 지도층의 책임성이다. 짊어지어야 할 의무이다. 〈廳〉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겠다는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지도자가 되겠다면 듣는 것부터 걸음마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벽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입만 열면 소통이 어쩌네 저쩌네 한다. 상대는 국어로 말하는데 그는 수학으로 대답하는 꼴이다. 이런 유형의 화법을 <유체이탈화법>이라 국민들은 말한다. 남자 박근혜라고도 한다. 청이불문의 대가인 그가 민주니, 국민이니, 자유니, 소통이니 말을 하니 우와 견이 웃을 일이다.

    

(칼럼니스트 심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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