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거라고, 살아서 반드시 가주가 될 거라고"

[연재무협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꽃이 시들어도'(12-1)

이슬비 | 기사입력 2017/10/03 [10:21]

"살 거라고, 살아서 반드시 가주가 될 거라고"

[연재무협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꽃이 시들어도'(12-1)

이슬비 | 입력 : 2017/10/03 [10:21]

 제12장 그대를 잊은 적 없다(1)

 

저는 요리를 할 줄 알고, 빨래를 할 줄 알아요. 저는 좋은 시종이 될 수 있어요.’

저는 비단을 잘 짜고, 요리를 잘 할 수 있어요. 저는 좋은 시종이 될 수 있어요.’

저는 청소를 잘 하고, 자수 솜씨가 뛰어납니다. 저는 좋은 시종이 될 수 있어요.’

저는 아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젖이 흘러넘칩니다. 양도 많고, 색도 냄새도 모두 좋아요. 그러니 저는 아기씨들에게 좋은 젖어멈이 되어줄 수 있답니다.’

 

일전에 유흔과 함께 고도에 갔을 때, 서란은 고도의 유명한 저잣거리에서 열리는 노예경매시장에 갈 기회가 있었다. 보통의 어른들은, ‘그런 곳은 애들이 갈 만한 곳이 못 된다며 자신의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지만, 유흔은 너도 언젠가는 직접 노예와 시종들을 사고 관리해야 할 터이니, 시험 삼아 미리 해보라며 서란의 등을 떠밀어 노예경매시장으로 보냈다.

 

노예경매시장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쇠사슬이나 오랏줄에 묶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개중에는 죄를 지어 노예로 팔린 이들도 있었고, 주인집에서 다른 곳으로 팔려가기 위해 시장에 나온 이들도 있었고,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기 위해 시장에 나온 사람, 가족들에 의해 시장에 팔려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서란의 관심을 끈 것은 시종이나 유모, 보모가 되기 위해 시장에 나온 이들이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후계 경쟁에서 밀려나 시종으로 팔리게 되었거나, 동기(童妓)였으나 기생의 자질이 없다 여겨져 시장에 나온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하나같이 깔끔한 비단옷을 멋지게 차려 입고, 값비싼 장신구를 달고,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문장을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할 줄 알았기에, 하나같이 자신들이 좋은 시종이나 유모, 보모가 될 수 있음을 적은 팻말을 목에 걸고, 지나가는 손님들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서란은 그 중 한 소년의 앞으로 다가갔다. 소년의 앞에는 이미 공가의 여식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부채를 얼굴 앞에 활짝 펴 들고, 소년의 행색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미천한 소인이 읍루씨가의 아가씨를 뵙습니다. 소인은 완월당이라는 기방의 동기였던 보현이라는 놈으로, 가무에 능통하며, 시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무슨 노래를 잘 하느냐?”

 

?”

 

노래는 무슨 노래를 잘 하고, 춤은 어떤 춤을 가장 잘 추느냔 말이다.”

 

읍루씨가 여식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년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입을 연 소년의 얼굴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당했다는 것에 대한 모멸감이 떠올라 있었다.

 

노래는 아무 노래나 다 잘 하고, 춤은 학연화대무를 가장 잘 춥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너의 가무를 한 번 펼쳐보아라. , 너의 가무솜씨를 한 번 확인해봐야겠구나.”

 

노래는 구하의 당 현종과, 그의 후궁 귀비 양씨의 사랑을 노래한, 백거이의 장한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학연화대무는 본래, 대무(對 舞)이나, 독무(獨 舞)로 한 번 추어보겠습니다.”

 

소년은 이내, 큼큼 하고 목소리를 두 번 가다듬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황제 사랑 그리워함에 나라는 기울어가네

오랜 세월 세상을 살펴도 구할 수 없구려

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나 누구도 알지 못 하나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하루아침에 뽑혀 군왕 곁에 있도다

눈웃음 한 번에 모든 애교가 나오니

육궁에 단장한 미녀들의 안색을 다 가렸네

봄 추위에 화정지에서 목욕함을 허락하여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으니

시녀들 부축하여 일어나니 아름다움을 당할 힘이 없도다

그때부터 황제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구름 같은 귀밑머리, 꽃 같은 얼굴, 흩날리는 금장식

부용휘장 안은 따뜻하여 봄 깊은 밤을 헤아리니

짧은 밤을 한탄하며 해 높아서 일어나니

이를 좇는 군왕은 이른 조회를 보지 않았고

총애로 연회에 매이니 한가할 틈 없어

봄을 좇는 춘정을 즐겨 온 밤을 지새우니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 있었지만

삼천의 총애가 그녀에 있으니

금 같은 방 단장하고 교태로 밤 시중들어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을 이루니

자매와 형제 모두가 열사라

어여쁘게 여겨 가문에 광채가 나니

이로 하여금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도다

 

노래는 그만 됐고, 이제 춤을 추어보아라.”

 

노래를 끊는 읍루씨가 여식의 말에 소년은 즉시 엎드려 부복하고는, 나비처럼 사뿐히 일어섰다. 그리고 나붓나붓한 발놀림과 손놀림으로 학이 되고 연꽃이 되어, 혼자임에도 둘이 있는 듯 아름다운 춤사위를 선보였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내내, 소년의 얼굴에는 모멸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노리개로 취급하는 듯한 읍루씨가 여식의 태도에 크나큰 모멸감을 느꼈으리라.

 

그날,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유흔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가지고 싶은 것도 사라고 준 금전(金錢)을 읍루씨가 여식의 눈앞에 던지고, 그 길로 소년의 손을 이끌고 저잣거리를 벗어났다.

 

 

아가씨, ‘유란의 시종이 들었습니다.”

 

문 밖에서 어린 시녀가 어머니 유란의 시종이 들었음을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란’. 시녀의 입에서 불린 어머니의 이름에 서란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그때처럼 독을 먹이려고 시종을 보낸 걸까? 독을 먹인다면, 시종을 시켜 어머니의 처소로 나를 데려갈까, 아니면 독약을 건네 이곳에서 독을 마시게 할까? , 나는 지금 금족령이 내려졌으니, 이곳에서 독을 마시게 하겠구나.’

 

유란이 서란에게 독을 마시게 한 것은 서란이 다섯 살 때였던 5년 전이었지만, 서란은 아직도 어머니가 그때처럼 자신에게 독을 마시게 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그때 서란은 고작 다섯 살 어린아이였고, 무엇보다 자신이 어머니의 손에 죽어야할 그 어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 정말 싫다. 아니, 지긋지긋하다.’

 

이제 겨우 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란은 지긋지긋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유흔과 함께 지내기 전, 서란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의 텅 빈 눈동자와 마주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으레, 손찌검이나 매질이 돌아왔고, 모진 손속을 견디지 못한 서란이 정신을 놓기 시작할 무렵이 되면, 어머니는 이렇게 속삭였다.

 

죽으라고. 이제 그만 죽으라고. 이제 그만 죽어달라고.

 

죽어라. 죽어라. 이제 그만 죽어라. 생각만 해도 정말 지긋지긋해. 어쩌면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죽으라고 할 수가 있었는지.’

 

죽으라고. 제발 죽으라고. 이제 그만 죽으라고.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어머니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란은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다.

 

아니,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고. 살 거라고. 살아서 반드시 가주가 될 거라고. 그러니 어머니, 나를 죽이려 드는 것은 그저 헛수고일 뿐이라고.

 

누가 죽는대? 내가? 내가 왜? 누구 좋으라고? 누구 좋으라고 죽어야 하는데? 나는 살 거야. 반드시 살 거야. 살아서…… 반드시 가주가 될 거야.’

 

서란은 면경을 꺼내 들고 옷깃과 옷자락을 매만지고, 머리를 가다듬었다. 유흔이 있다 해도, 어머니가 자신에게 독을 마시게 할 것이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독을 마시면 유흔은 즉시 해독제를 먹여 자신을 살릴 것이었다. 마치 5년 전의 유흔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러니 어머니의 시종 앞에서 꼴사납게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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